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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 칼럼] 잃어버린 거위의 꿈

2024-08-15 13:38

거위가 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적어도 한국에선 없을 듯하다. 오죽하면 날지 못하는 걸 전제한 ‘거위의 꿈’이란 노래까지 히트쳤을까. 그런데 실은 좀 다르다. 날아다니는 거위를 본 목격담이 많다. 찾아보니 결론도 비행가능이다. 먼 곳까지, 높은 곳까지 제한도 없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답은 ‘환경’에 있다. 가축화되면 날지 못해서다. 실제 캐나다 등의 원초적 본능에 충실한 야생거위는 확실히 새처럼 난단다. 새의 비행을 의심해 미안하나, 닭처럼 퇴화된 환경에선 걸어다닐 수밖에 없다. 안 날고, 못 나는 게 최적이니 비행포기는 퇴보보다 진화에 가깝다. 원래 새는 당연히 난다. 해서 ‘거위의 꿈’은 오해이자 착각이다. 거위를 청년으로, 환경을 한국으로 바꿔보자. 구구절절 설명은 불필요하다. 2024년 꿈조차 사치인 한국청년의 퇴화현실과 일치한다. 0.72명(2023년 잠정치 출산율)이 증거다. 꿈꾸지 않아도 날아야 거위이듯, 큰 노력 없이도 당연한 인생경로를 연기·포기한 결과다. 꿈은 미래·희망이다. 청년에겐 당연한 본능욕구다. 몸과 말 모두 앞날을 향할 때 사회는 지속가능성을 확보한다. 한국은 아닌듯하다. 비행을 망각한 거위처럼 미래를 상실한 청년이 흘러넘친다. ‘미래편익=현재고통’을 교환한 본능사수의 청년은 드물다. 그래서 연애·결혼·출산의 당연한(?) 길을 의심하고 회피한다. 이로써 한국청년의 기본값(Default)은 수정된다. 상식파괴를 흡수한 새로운 행동기준이 광범위하게 채택된다. 사라진 ‘거위의 꿈’처럼 달라진 ‘청년의 길’이 신질서로 완성된다. 미래를 배려하지 않는 현실중시가 MZ세대의 피봇전략이 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시대변화에 올라탄 최적화된 생존기술과 같다. 0.72명이 아쉬운 건 기성세대다. 떠받들고 봉양해줄 뒷배상실을 뜻해서다. 사라진 꿈은 분명한 끝으로 되돌아온다. 청년의 미래실종은 사회의 절멸경고를 뜻한다. 미래를 잃으면 현재도 덧없다. 청년에 집중할 때다. 정확히는 청년의 공간과 시간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게 먼저다. 염세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청년에 주목할 때 기필코 그들이 심화시킬 소멸미래의 방어묘책도 찾아낼 수 있다. 거위가 나는 게 꿈일 수는 없다. 당연함을 되찾는 정상회귀다. 청년의 본능·욕망이 감춰지고 사라지는 것도 정상·표준일 수 없다. 잃었던 미래를 되찾아줄 어른이 절실하다. 청년절망이 잘못됐음을 탓하고 구해줄 선생(先生)이 요구된다. 너무나 자연스런 미래편익과 현재고통의 교환가치가 공유되고 확산되는 게 바람직하다. 비정상·불균형의 미래포기·희망상실은 청년본능과 맞지 않다. 자연과학이 검증한 거위의 날갯짓과 사회과학이 완성한 청년의 꿈꾸기는 타협불가의 절대가치다. 꿈의 실종은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다. 예외가 정상을 꿰차며 주인노릇을 하도록 방치해선 곤란하다. 0.72명의 비명소리에 주목할 때다. 놓치면 꿈을 잃은 청년의 자포자기는 날선 칼날의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청년=미래’다. 깨지면 모두가 아프다. 거위는 원래 날았다. 왜 날지 않는지 반추해볼 때다.

[브릿지 칼럼] 에이지즘의 재구성

2024-07-10 14:09

사실상 나이가 전부인 사회다. 많이 변했지만, 나이는 한국사회를 통제하는 결정잣대 중 하나다. 잘하든 못하든 연령별 고정관념이 직간접적인 평가기준으로 적용된다. 놀이터에서 경로당까지 서열정리의 만능카드가 나이인 것이다. 특히 한국은 연령사회의 분위기가 짙다. 위·아래가 확실한 유교기반 가족주의 때문이다. 연상·연하의 나잇값에 따른 추월·도태는 곧 파격·자멸을 뜻한다. 중립·중도적인 기준값을 투입해 개인·역량중심으로 논하는 서구권에선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해서 비슷한 후속주자 MZ세대는 불편과 불만 속에 나이규범을 거부하고 저항하기 시작했다.세상이 변하듯 상식도 바뀐다. 이제 연령논쟁은 한국사회의 시대화두가 됐다. 과거 만들어진 연령기반의 상식·역할이 더는 먹혀들지 않아서다. 요컨대 나이는 그대로인데 신체특징과 기대역할은 확연히 달라졌다. 당장 연령통계가 급변한다. 중위연령·기대수명부터 은퇴연령·연금수급까지 변하고 변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정중앙 사람의 나이인 중위연령은 2024년 46.1세로 높아졌다. 1970년 19세였다니 꽤 상향조정된, 즉 늙어가는 사회다. 기대수명은 더하다. 남녀평균 ±88세로 1970년(62세)보다 26세 늘었다. 때문에 환갑은퇴는 불가능 하다. 국민연금 수급연령도 높아질 운명이다. 얼추 작게는 70세 전후까지, 크게는 정년폐지형 평생근로가 표준질서로 채택된다. 때문에 나이논쟁은 세대갈등의 불씨로 번지기 십상이다. 연령기준은 그대로인데, 평가내용이 달라져 엇박자는 커진다. 환갑퇴장이 전제된 세대부조형의 사회질서가 곳곳에서 무너져서다. 유지불능 연금개혁부터 고령인구 무임승차까지 희생과 수혜의 교환구조가 더는 먹혀들지 않는다. 불안불안한 건 2025년이다. 한국의 초고령사회 진입원년인 까닭이다. 고령화율(65세↑/전체인구) 20%를 넘기는 파워풀한 늙음속도가 반영된 결과다. 인구피라미드의 본격적인 가분수(▽)화를 뜻한다. 젊음이 늙음을 먹여살릴 수 없다는 의미다. 고정관념은 막히고 제도질서는 깨진다.시대가 바뀌면 질서는 변한다. 그래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구질서를 대체할 신질서를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이때 ‘에이지즘(Ageism)’이 떠오른다. 연령을 이유로 차별하는 걸 뜻한다. 연령을 하나의 기준으로 묶어 특정개념을 완성하는 형태다. 특정연령을 잣대로 대접·역할이 달라지는 차별(?)은 시대변화와 상대감정에 따라 환영 혹은 홀대된다. 가령 경로사상 혹은 노인혐오는 공존한다. 고령화가 빠를수록 에이지즘이 심화된다는 연구가 있다. 반대로 고령인구 비율이 높을수록 에이지즘이 약화된다는 분석도 있다. 모순적이나, 공감적이다. 즉 고령복지를 위한 사회부담이 늘면 그들을 향한 불만은 커진다. 동시에 역설적이게 고령화율이 높으면 당사자가 많아져 그들의 목소리가 커진다. 세계최고 속도·규모로 늙어가는 한국사회의 미래단면 중 하나라 눈여겨봄직하다. 요컨대 베이비부머의 은퇴진입은 고령자에의 과격한 공격적 논조가 심화될 타이밍으로 추정된다. 물론 문화요인도 크다. 성공·집착이 강조되는 남성다움도 에이지즘과 직결된다. 에이지즘의 재구성은 기대효과가 적잖다. 사회비용을 줄일뿐더러 선입관을 바꾸고 차별·혐오를 덜어준다. 실리적 성과창출은 더 고무적이다. 에이지즘을 바꾸면 새로운 기회가 보이기 때문이다. ‘고령인구=성장산업’의 등식이 그렇다. 노년차별·경로사상 등 늙음지배의 에이지즘은 고령산업의 성장기회를 축소했다. 더는 곤란하다. 뭉뚱거려진 취약인구의 집단최면에서 벗어나는 게 좋다. 변하는 연령패턴에 맞춰 세분화된 욕망과 장기화된 수요를 찾아야 한다. 해외에서는 빠르게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는 한국적 에이지즘을 주목하고 있다. 에이지즘의 재구성에서 퀀텀점프의 기회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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