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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유네스코 문화유산 코스 투마르·파티마·바탈랴·알쿠바사

이슬람으로부터 독립지킨 투마르 성채 … 스페인·프랑스로부터 나라구한 감사의 상징물 바탈랴 수도원

입력 2016-04-2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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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지은 템플기사단(훗날 그리스트 기사단)이 기거하던 투마르 성채

포르투갈 여행에서 가장 이동거리가 많은 5일차 날이 밝았다. 코임브라(Coimbra)를 떠나 투마르(Tomar), 바탈랴(Batalha), 알쿠바사(Alcobaca) 등 유네스코문화유산을 한꺼번에 도는 일정이다. 게다가 ‘제2의 바티칸’으로 불리는 파티마(Fatima)까지 투마르 다음 일정으로 끼워넣었으니 전날부터 심적 부담이 컸다.
하루에 4개 도시를 이동하는 방법은 결국 렌트카를 빌리는 길밖에 없었다. 겨울이라 해가 짧고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은 탓이다. 주말에는 리스본공항 등 몇 군데를 빼놓고는 대부분 렌트카 지점이 문을 닫기 때문이다. 결국 금요일 아침 차를 빌려 이틀 동안 차를 쓴 뒤 토요일 밤 늦게 리스본에 반납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늘 그렇듯 유럽여행엔 유로카(EUROCAR) 렌트카를 쓰는 게 익숙해져 있다. 다른 업체는 코임브라에 지점이 없거나 대여하기 불편했다. 코임브라엔 코임브라B역과 코임브라시경기장(ESTADIO CIDADE DE COIMBRA) 지점, 두 곳이 있다. 유럽 특성상 매뉴얼(수동기어)차가 많고, 오토(자동기어)차는 비싸고 수량도 많지 않기 때문에 성수기 때는 가급적 빨리 오토를 예약해주는 게 좋다. 더욱이 포르투갈은 우리나라 강원도 산악지대처럼 경사가 심한 곳이 많기 때문에 초심자인 외국 관광객으로서는 자동기어차를 운전하는 게 비용이 더 들더라도 안전하다.


아침에 코임브라 비토리아호텔에서 주는 조식이 비용 대비 만족도가 높았다. 오랜만에 든든히 끼니를 채우고, 짐을 끌고 몬데구강(Rio Mondego) 앞 큰 대로로 나와 택시를 탔다. 강인하면서도 매력적인 중년의 여성 운전기사가 10여 분을 달려 코임브라시경기장 인근의 렌트카 지점에 세워줬다. 오전 8시 50분에 도착했는데 문이 열려 있지 않아 혹여 예약이 잘못된 게 아닌지 노심초사하는 순간 9시 정각에 직원들이 나타났다. 예약 컨펌만 해놓으면 예약 확인, 결제, 보험 등 상세계약은 현장에서 변경 및 확정이 가능하다. 운이 좋아서 벤츠 새 차로 업그레이드 받을 수 있었다.


경로는 가장 동쪽인 투마르를 시작으로 파티마, 바탈랴, 알쿠바사 순으로 이동하고 밤에 리스본 근교인 신트라에 도착해 묵기로 했다. 한정된 시간 때문에 무리하지만 쉼없이 달려보기로 했다. 투마르·바탈랴·알쿠바사는 포르투갈의 자랑이자, 유네스코 문화유산코스 패키지로 입장권을 팔 만큼 대표적인 성당과 수도원을 내세운다. 이들 기념비적 건축물은 각 소도시를 대변하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포르투갈의 독립과 대항해 역사를 함께한 산증인 ‘투마르’


이날 처음 들른 곳은 포르투갈 중부에 위치한 산타렘(Santarem)주 투마르의 크리스투 수도원과 성채(Convent of Christ in Tomar)이다. 차로 언덕을 한참 올라갔다. 성채는 도시를 흐르는 나바오강, 높은 위치라는 지리적인 이점을 살려 지었고 수도원을 둘러싸고 있는 있다. 무어족으로부터 투마르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지었는데, 입구부터 위엄과 견고함이 느껴진다.
성채 안으로 들어가면 정원과 함께 투마르 수도원이 보인다. 12세기말인 1160년에 템플기사단의 초대 단장인 구알딩 파이스(Gualdim pais)가 그리스트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기사단을 위해 성채를 지었고, 수도원은 기사단의 행정본부·거주지 등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마련했다. 마누엘과 주앙3세가 통치하던 16세기까지 다양한 양식으로 증개축되었다. 이 수도원은 포르투갈 국토회복운동(Reconquesta)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면서, 외부에 활발하게 문호개방을 한 마누엘(Manueline) 시기의 상징물이다. 템플기사단은 1344년에 신항로 발견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그리스도 기사단으로 변경됐으며 1357년에 수도원은 이들의 본거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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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마르 수도원의 메인 회랑과 분수대


투마르 수도원은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유럽 시토(Citeaux)회 수도원 중 가장 보존이 잘 돼 있다. 사제단실 위로 솟은 위엄 있는 2층 성가대석, 고딕과 무어 양식의 영향을 받은 건물, 아큘러스(둥근창) 등은 리스본 제로니무스 수도원, 바탈랴 수도원과 함께 대표적인 마누엘 양식의 건물로 평가받는다.
성채 안으로 들어가면 입구에 매표소가 있는데 투마르 수도원 관람권(1인 6유로)이나 바탈랴·알쿠바사까지 둘러보는 통합권(1인 15유로)을 구매할 수 있다.
정원을 거쳐 수도원 안에 들어가면 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크리스투 수도원의 수장이자 나침반을 처음 발명해 15세기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를 열게 했던 헨리(Henry)왕자가 1420년부터 1460년까지 거주했던 건물이 보인다. 12~16세기 사이에 지어진 다양한 건축 양식의 회랑 가운데 15세기 초 증축한 ‘깨끗한 물의 회랑’과 ‘무덤의 회랑’은 우아한 아치가 돋보이는 고딕양식으로 특이하다.
핵심은 1510~1513년에 마누엘 양식으로 지은 화려하고 웅장하면서도 정교한 메인 성당이다. 16각형 모양의 성당 중앙에 자리잡은 8각형의 성가대석은 로톤다(rotunda: 지붕이 둥근 원형 홀) 건축의 훌륭한 예로 꼽힌다.  
2층 계단으로 오르면 메인 성당 집회실의 밖에 꽃, 산호, 사슬 등의 문양으로 장식된 정교하고 화려한 스테인글라스 창문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붙잡아놓는다. 분수대가 있는 수도원의 메인 회랑에서 꼬불꼬불 나선형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서 이를 관찰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 곳은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역사적으로 소중하고 볼거리도 멋져 입장료가 아깝지 않았다.


성모 발현과 3가지 기적이 이뤄진 세계적 성지순례지 ‘파티마’


다음 행선지는 파티마는 리스본 북쪽 141㎞에 위치한 인구 7000명의 작은 도시다. 투마르에서 차로 약 40분(약 37km) 떨어진 산타렘주(州) 빌라노바데오렘에 위치한다.
파티마는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매년 400만명이 모인다는 세계적인 성지 순례도시 중 하나다. 가톨릭교회가 공식 인정한 성모 발현지이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거대하다는 파티마 대성당을 보기 위해 빠듯한 일정을 쪼개 찾아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실수로 파티마대성당에 거의 다 도착해서 회전 로터리에서 잘못 길을 빠져나가는 바람에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우회로도 없고 불법 유턴을 할 곳도 없어 결국 40㎞ 가량을 남쪽(리스본) 방향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했다. 결국 1시간 남짓을 허비하고 이번에는 경찰에게 갈 곳을 물어 파티마 성당에 주차했다. 화가 나서 파티마 방문을 포기하려 했지만 바탈랴를 가려면 어차피 파티마를 경유하는 게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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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5월 13일 성모 발현 기적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매년 수백만명의 순례자가 찾는 포르투갈 파티마 대성당


파티마 자체는 조용했지만 파티마 대성당(Basilica de Nossa Senhora do Rosario de Fatima)이 앞쪽, 산티시마 트린다데 바실리카 성당(Basilica da Santissima Trindade)이 뒤쪽에 있는 코바 다 이리아(Cova da Iria) 광장을 들어서니 수많은 신자들과 관광객들로 붐빈다. 이 광장은 좌우 너비 240m인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보다 약 2배가 더 넓어 약 100만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일 수 있다고 하니,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광장 서편에 마이크로 설교 메시지가 들린다. 수 백명의 인파가 인파가 운집한 이 곳은 성모 마리아 발현 예배당(Capela das Aparicoes)이었다. 규모가 작지만 이 광장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예배당으로 1차세계대전 중인 1917년 5월 13일, 이리아 광장(과거 목초 지역)에 성모 마리아가 3명의 양치기 어린이 앞에 나타나 평화를 위한 기도를 약속했던 곳에 세운 성당이다. 이곳에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르 2세 암살을 시도했던 총알이 박힌 왕관을 쓰고 있는 성모 마리아 상을 보관하고 있다.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2010년 5월 12~13일에 이 예배당을 방문해 수많은 순례자들의 영혼을 어루만져 준 성모에게 감사를 표하는 황금 장미를 선물했다. 그는 요한 바오르 2세의 암살을 떠올리며, 이 성모상이 ‘우리의 즐거움과 희망의 금, 은으로 장식된 것이 아닌 우리의 불안, 고난의 총알로도 장식되어 큰 위안이 된다’고 기도했다. 이 곳에는 목동 3명이 성모를 뵙고 자신들의 고통을 봉헌하기 위해 발현언덕을 무릎으로 기어 오른 ‘순례의 길’을 체험해보는 순례객이 많았다. 실제로 광장 한 가운데 대리석이 깔려진 긴 길을 무릎으로 기는 신자가 제법 있었는데 대부분 여성이었다.  
 
파티마가 유명해진 것은 성모 마리아의 발현과 3가지 기적 이야기 때문이다. 1차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5월 13일, 이리아 목초지역에서 양을 치던 루시아를 비롯한 3명의 어린 목동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 10월까지 5개월간 매달 13일에 열심히 기도하면 평화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말을 들은 경찰은 아이들을 체포, 철저히 조사하고 순례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아이들은 끝까지 성모 마리아를 봤다고 진술했고, 이 중 유일하게 성모 마리아와 이야기를 나눈 루시아는 성모의 3가지 비밀을 털어놨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구 소련의 공산주의화,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암살 등에 관한 예언이었다. 이를 성모와 약속한 날까지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는 말까지 공개했다. 결국 이런 예언은 모두 현실화됐다. 특히 암살 시도에 대한 예견은 당시 교황에게만 털어놨었는데, 이를 교황이 2000년에 대중에게 밝혔다. 목동들의 얘기를 듣고 파티마에 모여든 6만여 명의 신도들은 1917년 10월 13일에 하늘에서 태양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목격하고는 성모 마리아가 파티마에 강림하였음을 믿게 됐다. 1930년 포르투갈 주교들이 파티마의 성모 발현을 공식 인정했고 가톨릭은 1917년 10월 13일을 ‘태양이 춤을 춘 날’이라고 명명했다.  


파티마 대성당은 1917년에 일어난 파티마의 기적 후 레이리아의 주교가 신빙성을 인정하면서 1928년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축을 시작했고 1953년 10월에 봉헌식이 거행됐다. 로사리오 성당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성모가 목동들에게 묵주(rosario)를 들고 기도하라고 청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됐다. 대성당 앞에는 큰 십자가가 있는 65m 높이의 탑이 세워져 있다. 직접 들어가 보진 못했지만 내부에는 발현을 경험한 목동과 1920년 복원 후 첫 주교였던 호세 알베스 코레이아 다 실바(D. Jose Alves Correia da Silva)묘가 있다. 1952년에 설치된 1만2000여개의 부품으로 이뤄진 파이프 오르간, 파티마 기적에 관한 내용을 담은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기적을 표현하고 있다. 매년 5~10월 13일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데 특히 성모의 처음과 마지막 발현일인 5월 13일과 10월 13일에 인산인해를 이룬다. 


산티시마 트린다데 바실리카 성당은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성당으로 파티마 대성당만으로 방문객들을 수용할 수 없어서 1973년부터 건축에 들어가 파티마의 기적 90주년을 기념한 2007년에 완성됐고 그해 10월 12일 성삼위에 봉헌했다. 공사비는 모두 순례자 기부금으로 충당했다. 그리스 건축가 알렉산드로스 톰바지스(Alexandros Tombazis) 공모 작품으로 비잔틴과 정교회 양식의 내부 장식이 깔끔하며, 약 8500명을 수용한다. 건물 외관은 한글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언어로 성경 구절을 새겨놓았으며, 성당 앞에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상이 세워져 있다.


포르투갈 승리가 탄생시킨 건축 대작 ‘산타 마리아 드 비토리아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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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탈랴 산타 마리아 드 비토리아 수도원의 고색창연한 외벽
파티마 대성당에서 나와 약 30분(17.6km) 떨어져 있는 인구 1만5000명의 레이리아 근교 작은 도시 바탈랴(batalha)에 도착했다. 바탈랴 수도원(Mosteiro de Santa Maria da Vitoria)은 1385년 8월 14일, 카스티야(스페인)와의 알주바로타(Aljubarrota)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것을 기념해 포르투갈 주앙1세(Joao I, 재위 1385~1433)가 그의 기도를 들어준 성모 마리아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지었다.
주앙 1세는 전투 전에 성모 마리아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승리에 대한 보답으로 최고의 수도원을 짓기로 약속했고, 약속대로 3년 후에 도미니크회 수도원의 공사를 개시했다고 한다. 이 수도원의 이름이 ‘산타 마리아의 승리’인 것처럼 알주바로타 전쟁은 포르투갈로서는 중요한 전쟁이었다. 부르고뉴왕조의 마지막이 된 페르난두 1세(Fernando I, 재위 1367~1383)가 승하하자 직계 후계자인 어린 딸(베아트리스)의 남편인 카스티야의 후안1세(Juan I, 재위 1379~1390)가 포르투갈을 점령하려 했다. 나라를 빼길 것을 두려워한 포르투갈 귀족들은 페르난두 1세의 서제(庶弟)인 주앙1세를 지지했다. 결국 영국을 등에 업는 주앙과 프랑스를 등에 업은 후안 왕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1385년 8월 14일 포르투갈 중부 알주바로타(Aljubarrota)에서 주앙1세를 추종한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Nuno Alvares Pereira. 1360~1431) 총사령관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카스티야와 프랑스 군을 몰아낸 주앙1세가 나라를 구하고, 1385년 국민의회 선거로 왕위에 올랐다. 이 전쟁의 승리로 아비스(Avis) 왕조가 시작되었고, 주앙1세의 첫째 아들 두아르테 왕자가 왕위를 받아 아프리카 탐험을 도모했고, 산타 마리아 드 비토리아 수도원의 예배당을 건설하다 미완성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났고, 셋째 아들 엔리케 왕자는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이 수도원은 200년에 걸쳐 완성된 덕분에 고딕 양식에 르네상스와 마누엘 양식이 혼재돼 멋스럽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천사, 성인, 예언자 등이 정교하게 조각된 정문을 들어서니 주앙1세 예배당(Capel de JoaoⅠ)이 있다. 쭉 뻗은 커다란 기둥, 높은 천장, 햇볕이 들어오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신비스럽다. 주앙1세의 회랑(Claustro de JoaoⅠ)은 마누엘 양식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며, 회랑 복도에서 정원 쪽을 바라보면 문 위에 장식된 레이스 장식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회랑 끝자락에 있는 분수는 수도사들이 식사 전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는 의식으로 손을 씻던 곳으로 1380년대 후반 건축의 대가 아폰수 도밍게스(Afonso Domingues)의 초기 건축물에 디오구 드 보이타가가 마누엘 양식을 추가했다. 수도원 중앙에 있는 돔에는 팔각형 제등이 켜진 둥근 천장의 사각형 예배당이 있다. 예배당 중앙에는 주앙1세와 그의 아내 필리파 왕비의 무덤이 있고, 항해의 왕자 엔리케를 포함한 네 명의 아들 무덤은 남쪽 벽에 있다.
무명용사의 방(Sala do Capitulo)는 어두운 내부 앞과 기둥 주변을 미동도 하지 않는 근위병들이 지키고 있어서 신기했는데, 프랑스와 모잠비크에서 전사한 용사들이 잠들어 있는 방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미완성 예배당(Capelas Imperfeitas)이 있는데 16세기 초 마누엘 양식의 화려한 건축 기법이 응축되어 있는 곳으로, 예배당을 완성하지 못하고 갑지가 세상을 떠난 두아르테 왕과 그의 아내 레오느로 왕비가 잠들어 있다. 두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며, 천장 없이 7개의 예배실로 이루어져 있다.  
밖으로 나와서 수도원 외부의 큰 규모와 정교함에 다시 한 번 놀라고 발길을 돌려 약 40분(31km) 떨어진 알쿠바사 수도원(Mosteiro de Santa Maria de Alcobaca)으로 향했다.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이 잠든 곳 ‘산타 마리아 드 알쿠바사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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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탈랴 산타 마리아 드 비토리아 수도원의 고색창연한 외벽
바탈랴의 산타마리아 데 알쿠바사 수도원은 12세기 창건된 바탈랴 수도원에 1308년 아폰수 도밍게스(Afonso Domingues) 등 여러 건축가가 참여해 재건한 곳이다. 포르투갈 초기 고딕 양식 성당 중 가장 규모가 큰 수도원으로 장엄하고, 수수하다. 포르투갈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리는 동 페드루 1세와 도나 이네스 왕비가 묻힌 곳으로 유명하며, 198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곳은 전형적인 시토회 건축물로 포르투갈 건국과 함께 세워졌으며, 아폰수 엔리케 왕이 포르투갈에서 무어인을 쫓아내는데 일조한 시토 수도회(Cistercian)에 대한 감사로 건립했다. 성당, 회랑, 기숙사, 손님용 숙소, 부엌, 식당 등으로 구성돼 있다. 당시 수도원에는 999명의 수도사가 교대로 기도해 24시간 내내 미사가 끊이질 않았다. 고딕 양식의 폭이 좁은 성당, 심플한 기숙사, 잘 정돈된 정원 등을 통해 그들의 절제된 삶을 엿볼 수 있다.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14세기 아폰수 4세의 아들인 동 페드루 1세와 도나 이네스 왕비의 석관이었다. 동 페드루 1세 왕자가 스페인 콘스탄자 공주와 정략결혼을 했는데, 그만 공주의 갈리시아인 시녀 이네스와 사랑에 빠지고, 콘스탄자 공주가 병으로 죽자, 이네스에게 청혼했다.
왕위계승권을 놓고 포르투갈과 스페인 간의 싸움이 나고 이를 둘러싼 세력 다툼이 벌어질 것을 우려한 왕자의 부친, 아폰수왕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4명의 아이까지 낳은 이네스와 그 자식들은 코임브라로 추방당해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페드루는 왕좌에 앉자마자 이네스 암살에 가담한 신하들을 죽이고 심장을 도려냈으며, 이네스 시신을 관에서 꺼내 왕관을 씌우고 왕비임을 선포하고, 신하들에게 왕비 손에 입을 맞추게 해 충성 다짐을 받았다고 한다. 복수 후에도 평생 왕비를 그리워했으며, 죽어서 자신과 같은 석관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성당의 양쪽에 천사로 둘러싸인 왕과 왕비의 조각을 새긴 석관에 묻혀 마주 보고 있다. 왕의 관 옆면에 환생한 운명적인 두 연인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새겨져 있고, 왕비의 관 옆에는 예수의 생애를 정교하게 조각해놓았다.
왕의 홀(Sala dos Reis)에는 역대 포르투갈 왕의 입상이 전시돼 있다. 식당(Cozinha)에는 999명 수도사의 식사를 책임지던 20m 높이의 거대 굴뚝과 조리대, 수로가 그 당시 식재료와 음식량을 가늠케 한다. 절제된 생활을 해야 하는 수도사들이 식당 옆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비만하면 이를 통과할 때까지 굶어야 했다고 한다. 중앙에 위치한 침묵의 회랑(Claustro do Silencio)은 수도사들이 예배당, 식당 등으로 이동할 때 거친 곳으로 이곳에서 반드시 묵언 수행을 하듯 침묵해야 했기 때문에 ‘침묵의 회랑’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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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드 알쿠바사 수도원의 ‘침묵의 회랑’(Claustro do Silencio)
벌써 밖으로 나오니 해가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수도원 밖 계단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하루 종일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오늘도 제대로 된 점심을 못했다. 어둠 속에서 1시간 반 정도 차를 달려 리스본 근교 신트라(Sintra) 숙소에 도착했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좁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차로 올라가는 게 쉽지 않다. 더욱이 숙소인 호텔 티볼리 신트라(Hotel tivoli sintra)엔 지하 주차장이 없어 지상에 대는 것도 쉽지 않다. 이 곳 주차 사정이 다 이렇다. 도로변에 대충 주차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딱지를 떼일 것 같아 우려하던 차에 20분이 지나니 차량 1대가 빠져나가는 빈자리가 생겼다.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or)에서 추천해준 타파스·해산물 전문점인 후마리아 드 바코(Romaria de Baco) 레스토랑으로 갔다. 손님들로 북적여 식당이 좁아보인다. 왁자지껄한 대화소리, TV에서 나오는 축구경기소리 등이 소란스럽기보다는 편안한 분위기다. 지배인이 추천한 짭짤한 대구(바칼라우)에 달걀·감자를 곁들인 바칼라우 아브라스(Bacalhau a bras), 양고기 스테이크를 시켰다. 적당한 보디감의 레드와인이 함께 어우러지니 하루의 피곤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황영기 여행칼럼니스트 zerotwo7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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