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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아는 만큼 보인다①] 근현대 품은, 조선을 위한 ‘창덕궁’

입력 2016-09-14 07:25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사진=김성욱 기자)

누구나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궁’. 역사가 담겨있는 궁은 그 아름다움으로 외국 관광객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도 즐겨 찾는 장소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궁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해설사와 함께 다니지 않으면(때로는 같이 다녀도) 궁에 숨어있는 아름다움과 선조들의 지혜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5일이나 되는 올해 추석 연휴에 어디 갈 곳을 찾는 사람을 위해 서울의 4대 궁(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중 한 곳인 창덕궁을 추천해본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창덕궁을 더욱 잘 즐길 수 있도록 숨어 있는 볼거리 등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60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는 영화 ‘덕혜옹주’, 20% 안팎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서로 다른 두 작품에는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창덕궁이다.

조선 황실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가 생을 마친 낙선재는 창덕궁에 위치하고 있다.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주인공 박보검이 맡은 효명세자가 생활을 한 곳도 창덕궁이다.

조선시대 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경복궁’이지만 조선의 정체성을 가장 많이 반영한 곳은 바로 창덕궁이다.

경복궁이 중국의 전통을 따른 웅장한 모습에 질서정연한 구조를 갖췄다면 창덕궁은 비교적 소박한 모습에 자유로운 구조를 하고 있다. 산줄기 자락에 자리잡으면서 곡선을 이룬 자연 지형에 맞게 배치된 것이다.

그리고 4대 궁 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곳은 창덕궁이 유일하다.

창덕궁은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면서부터 여타 궁과 다른 구조임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은 광화문에서 정전이 근정전이 보이고, 창경궁도 홍화문에서 정전인 명정전이 보인다. 하지만 창덕궁은 돈화문에서 정전인 ‘인정전’이 보이지 않는다(덕수궁도 정문인 대한문에서 정전인 중화전이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덕수궁의 원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으로 현재는 사라졌다).

창덕궁 인정문과 인정전
창덕궁 어로(왕이 가는 길)는 다른 궁과 달리 금천교에서 들어와 한번 꺾여 인정전으로 들어가게 돼 있다. (사진=김성욱 기자)

금천(禁川)을 지나 정전까지 어로(왕이 가는 길)가 직선으로 돼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창덕궁은 인위적인 조성을 막고 자연과의 조화를 위해 어로를 돌린 것이다.

인정전에서 바라본 남산
인정전에서 바라본 남산. (사진=김성욱 기자)

창덕궁의 구조를 좀 더 자세히 뜯어보면 각 궁궐은 모두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전통적으로 왕은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궁궐의 조화는 동서로 이뤄져 있다. 이런 배열 덕에 인정전에서 돈화문 쪽을 바라보면 남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 (사진=김성욱 기자)

인정전 내부는 다른 궁의 정전과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천장에 샹들리에가 달려있고,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다. 조선의 정체성을 가장 많이 반영했다는 궁에 서양식 전등이 있는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은 즉위 후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수리를 명했다. 수리를 일제가 맡았는데 그 때 유리창, 커튼, 샹들리에가 설치됐다. 바닥 전돌도 걷어내고 일본식 나무마루로 바꿨다.

인정전 내부
인정전 내부에는 커튼과 샹들리에가 있다. 또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병풍도 조금 높게 위치하고 있다. (사진=김성욱 기자)

몇 년 전 관람객에게 인정전 내부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했었는데, 그 때 관광객들이 커튼을 만져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커튼 교체작업을 해 샹들리에 천과 색깔이 다르다. 그리고 그 후 인정전 내부 공개가 중단됐다.

또 어좌 뒤에 있는 일월오봉도 위치도 다른 궁과 좀 다르다. 어좌랑 같은 높이가 아니라 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중기까지 우리 사회에 가득했던 다양성도 이 창덕궁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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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문 뒤로 유일하게 남은 청기와 건물 ‘선정전’이 나온다.(사진=김성욱 기자)

인정전 동쪽의 문으로 들어가면 우리나라 궁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청기와 건물 ‘선정전’이 나온다. 청기와는 ‘회회청’이라는 비싼 수입 안료와 인부의 노동력이 필요해 조선시대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선정전은 과거 임금이 공부하고 신하들과 정치를 논하던 편전으로 쓰였다.

창덕궁 희정전
희정당. 순종이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도록 입구가 포치형으로 만들어졌다. 이곳에 차량 2대를 주차할 수 있었다고 한다. 희정당 내부에 서양식 화장실도 있는데, 현재 내부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사진=김성욱 기자)

선정전 바로 옆에는 조선 궁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건물이 나온다. 임금 침소로 사용되다 조선 중기 편전으로 사용된 희정당이다. 희정당은 돌출된 건물 입구에 지붕을 갖춰 차를 댈 수 있는 포치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순종이 화재로 손실된 희정당을 복원하면서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도록 이렇게 개조한 것이다.

창덕궁 낙선재
창덕궁 낙선재 (사진=김성욱 기자)

희정당을 지나 동쪽으로 걸어가면 ‘낙선재’가 나온다. 궁궐의 일반적인 건축양식과 달리 ‘단청’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낙선재는 헌종의 아내 사랑이 담겨 있는 건물이다. 헌종 13년(1847)년, 그가 후궁 중 유일하게 경빈 김씨를 위해 하사했다고 한다. 검소함은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닮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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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부용지. 사진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정조의 사상이 담긴 규장각이다. (사진=김성욱 기자)

국내 궁궐 중 유일하게 창덕궁에만 남아있는 전통 정원, 후원도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일본과 중국의 정원은 내부에 인공물이 많고, 나무와 풀 등에도 사람의 손이 많이 닿은 모습이다. 인간을 자연보다 중시하는 태도가 반영됐다. 반면 후원은 지형은 물론 돋아나는 풀, 나무 하나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뒀으며, 건축물도 후원 전체의 1%에 불과하다. 인간보다 인간의 터전인 자연을 더 중시하는 태도가 후원에 그대로 담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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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의 ‘존덕지’에 있는 ‘존덕정’. 이중지붕 팔각형 형태가 특징이다.(사진=김성욱 기자)

후원에 들어가 부용지를 지나면 존덕지라는 연못에 있는 ‘존덕정’을 만날 수 있는데, 이 정자는 이중지붕의 팔각형 형태가 특징이다.

관람정
창덕궁 후원 ‘반도지’ 위에 있는 부채꼴 형태의 정자 ‘관람정’ (사진=김성욱 기자)

그 옆의 한반도 모양을 닮은 연못 ‘반도지’ 위에는 부채꼴 형태의 독특한 정자 ‘관람정’이 자리 잡고 있다. 관람정은 부채꼴 지붕을 가진 우리나라 유일의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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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내 유일한 초가 지붕 건축물 ‘청의정’.(사진=김성욱 기자)

후원 가장 깊은 곳 ‘옥류천’이 흐르는 곳에는 궁궐 내 유일한 초가 지붕 건축물 ‘청의정’이 있다.

이 외에도 후원에는 10여개의 정자들이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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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의 ‘연경당’.(사진=김성욱 기자)

후원에 있는 효명세자의 건물 ‘의두합’과 ‘연경당’은 낙선재와 마찬가지로 단청이 없는 모습이다.

연경당은 순조 28년(1828년), 효명세자를 위한 건물이다. 궁궐 중 유일하게 사대부가 건물의 형식을 하고 있다. 의두합과 마찬가지로 세자의 검소함을 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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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연경당’의 ‘선향재’. 국내에 두 개 뿐인 청동 지붕 건물이다.(사진=김성욱 기자)

연경당 내부를 돌아보면 청동지붕 건물이 하나 나온다. 독서처로 사용했던 ‘선향재’인데 이 같은 청동 지붕 건축물은 강릉 선교장을 포함 국내에 단 2개 뿐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축물에서 이처럼 많은 건축 형태를 만나다 보면, 과거 더 다채로웠을 창덕궁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다.

창덕궁에서 과거로의 여행을 끝나기 직전, 들어올 때 만났던 돈화문의 안쪽 모습을 보게 된다.

열려진 3문 옆으로 벽 같은 문이 2개 숨겨져 있다. 우리나라 궁의 정문은 3문 형태다. 5문은 황제만 사용수 있는 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문을 사용했다는 것은 중국을 도발하지 않는 선에서 그 권위에 도전하는 ‘기개’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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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8경 중 1경인 창덕궁 전경. (사진=김성욱 기자)

고려를 떠나 보내며 ‘500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노래했던 길재의 마음이 이러할까. 창덕궁을 돌아보고 돈화문 밖으로 나오면 만감이 교차한다.

창덕궁은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는 과거의 궁궐이 아니다.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조선의 정체성이다.

최은지 기자 silverrat89@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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