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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뷰] 마음껏 발 구르고 소리치며! 억눌렸던 설움과 서글픔을 위한 ‘씨어터 RPG 1.7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세 번째 패치!

입력 2017-06-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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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어터 RPG 1.7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사진제공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 극은 부조리극이자 힐링극이다.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출발해 팀을 이끄는 조연출을 따라 분장실, 연습실, 1층 카페, 연습실, 기획 사무실로 옮겨 다니다 대극장까지 단 한시도 관객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렇게 정신 없이 휘몰아치다 대극장 무대 위에 선 그 심정이 참으로 미묘하다.



표면적으로는 4팀으로 나뉘어 각 포스트를 돌며 게임, 쪽지 쓰기 등 미션을 클리어해야 하니 이름하여 ‘씨어터 RPG 1.7’이다. RPG(Role-palying Game, 역할 수행 놀이) 공연명은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25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다.

‘카포네 트릴로지’ ‘벙커 트릴로지’ ‘모범생들’ ‘룸스’ 등의 김태형 연출과 지이선 작가 콤비가 황희원 연출과 의기투합한 관객 참여형 공연이다. 이 정도면 연출이나 대본 집필이라기보다 프로그래밍에 가깝다.

2013년 마로니에여름축제에서 첫선을 보이고 그해 정식 초연, 2015년 재연을 올렸으니 올해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는 게임으로 치자면 마로니에여름축제로 베타 서비스 후 세 번째 패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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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어터 RPG 1.7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사진제공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극을 이끄는 이들은 4명의 조연출 김슬기·손은지·조안나·황선화(가나다 순)다. 관객들을 이끌며 고래고래 구호를 외치고 연기를 하는가 하면 게임을 진행하고 싸움의 중재도 해야한다. 이들은 명실상부한 극의 하드캐리(팀워크가 중요한 게임을 승리로 이끈 선수나 그 행위) 캐릭터다.

극의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와 동선은 정해져 있다. 내일 공연을 해야하는데 카페에서 회의 중이던 연출(김현수)과 작가(김유진)는 겹치기, 생계, 극 제작에서의 역할, 지금의 위치에 오기까지 누구 공이 더 컸는지 등을 두고 감정싸움에 열을 올린다. 얼음이 날아다니는가 하면 고성방가 수준에 가깝게 목소리를 높인다.

분장실의 남녀 배우(공재민·김로사)는 점심문제로 혈압을 올리고 메뉴를 바꿔 달라거나 고생하는 조연출을 챙겨주겠다고 있는 힘껏(?) 성질을 피우며 식당 사장과 기싸움이다. 연습실의 안무가(주민진)는 한국어를 잘 못해 대화에 애를 먹고 시키는대로 춤을 추느라 기진맥진이다.

기획사 사무실의 과장(양소민), 대리(이안나), 인턴(윤영민) 사원은 성폭력 예방수칙 교육을 두고 갑론을박이다. 시작과 끝을 제외하고 4개의 포스트에서는 한두 가지의 게임이 있고 게임의 승자는 아이템을 얻게 된다. 중간중간 쪽지에 스트레스 거리, 보고 싶은 사람, 걱정거리 등을 적는 시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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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어터 RPG 1.7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사진제공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 극에는 명확한 캐릭터 명이 없다. 연출, 작가, 안무가, 과장, 대리, 남녀 배우 등 직급 혹은 성별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직급은 대부분 조연출 위에 군림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말끝마다 “이런 건 원래 조연출이 하는 거야” “넌 밥도 제대로 못시키니?”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게 뭐야?” “내가 언제까지 챙겨줘야 돼?” 등 비난과 폭언이다.

배우지만 오디션마다 떨어지고 더 볼 오디션도 없다 보니 공연 가까이에라도 있겠다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 울먹이는 조연출을 따라 극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좇다 보면 이상한 데서 울컥거리는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그 순간들은 사람에 따라 전혀 달라지기도, 모두가 함께 같은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배우든 연출이든 일상화된 겹치기, 작가와 연출 등 스태프와 배우들 사이의 권위적인 서열, 작가가 제안했을 때는 반발하더니 연출이 거드니 해볼만한 것으로 변해버린 성폭력 예방수칙 교육, 무의식 중에 행해지는 위계에 의한 성폭력, 남녀·상하·주조 등에 따른 차별 등 공연계의 본질적인 문제, 부조리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사회 문제들이 민낯을 드러낸다.

사실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속 부조리들은 비단 공연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바닥을 치는 취업률, 직장 내 권위주의 및 갑질 팽배, 위계에 의한 성폭력, 일상화돼 버린 성희롱 및 남녀차별 등 누구나에게 적용 가능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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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어터 RPG 1.7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사진제공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성폭력 예방수칙 교육 등 다소 설명적이고 교화하려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이 극이 수시로 던지는 이슈들은 누구나의 이야기고 누구나 고민해봐야할 문제들이다. 그래서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는 부조리극이다. 

 

하지만 사회 부조리나 문제들만을 보여주는 데서 끝나지는 않는다. 극은 공연계 종사자들은 물론 관객 대부분이 처했을 억울하고 억눌린 상황을 마음껏 표출하고 풀어낼 수 있도록 이끈다. 게임으로 즐겁고 아이템이라고 획득한 것이 꽤나 소소해서 웃음이 터진다. 배달은 속도가 생명이니 스피드 퀴즈를 하는 등 게임을 해야하는 이유 역시 흥겹다.

연습실의 안무가에게 벽 깨기 댄스를 전수(?) 받거나 숨겨두었던 스트레스, 걱정거리, 보고 싶은 사람, 꿈 등을 쪽지에 적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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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어터 RPG 1.7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사진제공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그리고 마지막 대극장 무대 위에 모인 관객, 배우들은 마음껏 소리 지르고 발구르고 점프하며 강한 척, 괜찮은 척 꾹꾹 눌러두었던 설움과 서글픔을 풀어놓고 허물어뜨린다. “따라만 다니셔도 움직이게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고”라던 극 시작 전 김태형 연출의 자신감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프로그래밍된 자유 속에서 관객들을 움직이게 하고 울고 웃게 하는 영리함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극은 힐링극이다. 더불어 출연자 리스트 어디에도 없더니 연습실에서 “갓뎀” 단 두 글자로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하는 배우 이정수는 이 극의 히든카드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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