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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뷰]어쩌면 SF스릴러? 조지 오웰의 기막힌 예언에 대한 한태숙 연출식 변주, 연극 ‘1984’

조지 오웰 '1984'의 로버트 바이크·던컨 맥밀런의 2013년 각색본, 한태숙 연출, 고연옥 작가 각색
연희단거리패 대표배우 이승헌, 이문수, 정새별, 유연수 등 출연, 1월 19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입력 2017-10-2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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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1984’(사진제공=국립극단)

 

“이 세계가 진짜라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어?”



저항과 자유, 사랑과 오르가즘이 사라진 2020년을 배경으로 하는 연극 ‘1984’(11월 19일까지 명동예술극장)를 본 후 가장 먼저, 크게 다가오는 것은 극 중 대사와 같은 의문이다.

조지 오웰 동명소설의 부록 부분을 ‘북클럽에 모인 사람들의 토론’으로 극 시작과 마지막에 배치한 로버트 바이크·던컨 맥밀런의 2013년 각색본을 바탕으로 한다. 그 각색본의 변주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파헤치는 심리극의 장인 한태숙 연출과 음울한 사회 단면을 군더더기 없이 피력하는 데 탁월한 고연옥 작가가 책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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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1984’(사진제공=국립극단)
1984년 체제에 의심을 품고 일기를 쓰기 시작한 윈스터 스미스(이승헌)의 기록물과 2020년 현시점이 모호하게도 중첩된다.

무대 위에서 재현되는 시점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혹은 또 다른 미래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물론 원작소설을 한번이라도 읽었다면 조금 더 이해가 쉽기는 하다. 하지만 원작을 몰랐을 때 언어의 파괴, 사찰의 일상화, 자유와 감정의 실종 등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만끽(?)할 수 있다.

상황이 이러니 ‘진짜 세계’에 대한 질문은 비단 미래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과 믿고 싶은 허상의 경계, 극단적인 공포, 매일 반복되는 분주한 일상, 믿을 수 없는 사건들 등에 맞닥뜨려 “나는 어디에 있나”를 묻곤 하는 순간이 잦아지는 시대는 언제나 도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연한 존재인 개인 사찰 시스템, 빅 브라더 등과 일상화돼 버린 업악을 떨쳐내기 위한 혁명,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거나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는 이중사고는 어느 특정 시대만의 소산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대는 거대하고 음울한 감옥을 연상시킨다. 그 미래에서 얘기되는 ‘자유는 굴종’ ‘전쟁은 평화’ ‘무지는 힘’ 등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이다. 오직 현재만 있을 뿐 과거도 미래도 없다고 외쳐대거나 텔레스크린으로 모두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되는가 하면 ‘좋다’의 반대말은 ‘안좋다’이지 ‘나쁘다’여서는 안된다는 언어파괴도 비일비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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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1984’(사진제공=국립극단)

 

사람들은 그것이 옳다고 믿고 살아가고 그 사상에서 어긋나면 ‘극단적 공포’로 상징되는 101호가 기다리고 있다. 그 101호는 잔혹한 유혈낭자의 현장이다.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들이 극대화돼 나타나는 어두운 미래상, 디스토피아다.

유혈낭자한 고문, 폭력적인 언어파괴, 사라져 버린 감정의 표현, 모두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조정하는 빅브라더의 존재 등보다 무서운 것은 그 디스토피아가 1984년이나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안주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더불어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 중 나 역시 포함됐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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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1984’(사진제공=국립극단)

 

“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뀐다고 믿는 거 너무 낭만적이지 않아?”

앞서 말했듯 시작과 끝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동시에 미래를 상상하며 쓴 윈스턴 스미스의 글에 대해 2020년 사람들이 토론을 벌이는 풍경이다. 사실 이 또한 현실인지 과거인지 미래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들은 윈스턴 스미스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들이 허구나 원래 없던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윈스턴은 그렇게 행동하는 이들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대답은 없어졌지만 경험을 공유했던 누군가가 분명 존재했던 인물이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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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1984’(사진제공=국립극단)

 

무대 추상화, 표현주의적 접근으로 윈스턴의 존재 유무, 현실과 허상을 어떻게 더 교묘하게 표현할지에 대한 한태숙 연출의 고민은 꽤 주효했다.

한태숙 연출이 말한 “자신이 하는 일에 번민할 틈도 없이 지쳐버리는 요즘 사람들과의 동질감”이나 “뭔가 진행되고 있는데 또 다른 생각들이 들이닥쳐 야기되는 혼란”이 분명하게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무의미하게 현실화돼버린 세계, 70여년 전 조지 오웰의 암울한 예언은 참혹하지만 지독히도 의미심장하고 매혹적이다.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진실인지 진실이 아닌지…그 모순과 이중사고에서의 선택은 결국 개인의 몫이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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