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속방지턱·방호울타리 등 어린이 보호구역시설 정비 같은 정책은 출산율 향상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데도 저출산 정책으로 포장됐다. |
최근 10년간 저출산 극복을 위해 정부가 100여조원의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출산율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통계청 조사 결과 지난해 10월 출생아 수는 1년 전보다 3700명(11.7%) 감소한 2만7900명이었다. 2016년 12월 2만7400명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적은 수준이다. 지난해 1∼10월 누적 출생아 수는 30만6000명으로 2016년 같은 기간보다 12.2% 감소했다. 연도별 출생아 수는 2000년 63만4500명에서 2002년 49만2100명, 2016년엔 40만6200명으로 급감했다.
다른 국가와 비교해도 심각한 저출산의 늪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3일 발표된 미국 중앙정보국(CIA) ‘월드팩트북’(The World Factbook)의 세계 각국 합계출산율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26명으로 세계 224개국 중 219위였다. 한국보다 낮은 국가는 싱가포르(0.83명), 마카오(0.95명), 대만(1.13명), 홍콩(1.10명), 푸에르토리코(1.22명)뿐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에선 35개 회원국 중 꼴찌였다.
정부는 2006년부터 지금까지 총 126조5587억원의 예산을 투입하고도 출산율 반등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정작 필요한 곳에 돈이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회예산정책처가 2016년 저출산 예산 21조여원의 사용처를 분석한 결과 30%(6조5290억원)가 저출산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곳에 투입된 것으로 확인됐다. 저출산·고령화 예산 3분의 1은 보육 지원, 3분의 1은 기초연금에 들어가고, 나머지 3분의 1만 실질적인 저출산 정책 과제에 투입되고 있다. 최근 10년간 저출산 대책은 보육 인프라 투자에만 집중됐고, 전문가와 육아 당사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일·생활 균형, 성평등 관련 정책 투자는 부족한 실정이다.
지난해 고용노동부가 실시한 ‘일·가정 양립 실태조사’에 따르면 출산율 향상과 일·가정 양립을 위해 국민이 필요로 하는 정책 1위는 ‘장시간 근로 관행 개선’(21.7%), 2위는 ‘유연근로제 확산’(14.3%)이었다. 보육과 관련된 ‘육아휴직’(11.4%)은 5위에 그쳤다. 그런데도 2006년부터 투입된 전체 저출산 예산의 65%(83조원)가 보육 관련 정책에 소요됐다. 보육 관련 예산은 0~5세 아이를 둔 부모만 한시적으로 혜택을 볼 수 있어 장기적인 관점에서 젊은층의 결혼 및 출산을 견인하는 효과가 미미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정책 목표가 일관되지 못하고 서로 충돌하거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예컨대 고령화 대응책에 언급된 ‘사회통합적 외국인력활용’이나 ‘중장기 이민정책 수립’ 등은 저출산 해소에 필요한 양질의 일자리를 줄여 저출산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비판을 받고있다.
온갖 정책을 저출산 대책으로 포장하다보니 어느 정책이 실제 효과를 냈는지, 어떤 정책이 문제가 있는지 구별하기도 쉽지 않다. 저출산 정책에 포함된 ‘아동·청소년의 건전한 성장환경 조성’의 첫 번째 과제인 ‘과속방지턱·방호울타리 등 어린이 보호구역시설 정비’는 2014년 369곳인 시설을 416곳으로 늘리겠다는 것인데 출산율 향상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이밖에 저출산 정책에 포함된 청소년 흡연 예방, 급식 안전을 위한 어린이급식관리지원센터 설치 확대, 청년 해외취업 촉진, 적성능력중심 교육체계 개편 등도 저출산과 관련성이 약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저출산 대책 단골손님인 ‘난임부부 지원’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부는 2006년부터 총 8218억2207만원을 투입해 난임시술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저출산 대책은 한 명의 아이조차 낳으려고 하지 않는 청년층이 아이를 낳도록 유도하는 게 핵심이라 난임 지원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시술비 지원 횟수나 대상이 제한돼 상당수 난임부부들에게 상실감을 주고, 성공률도 30%로 높지 않아 효과성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실제로 국회 예산정책처는 지난해 전문가 90명이 참여한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2016~2020년) 평가 자료에서 25개 주요 저출산 대책 중 난임부부 지원 정책을 효과성 측면에서 23위로 꼽았다.
지난해 정부가 저출산 기본계획으로 내세운 ‘청년고용 활성화’는 인턴 등 비정규직 확대를 골자로 하는 것이어서 반대 여론에 부딪혀 사실상 폐기됐다. ‘신혼부부 행복주택 공급확대’ 정책은 정작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신혼부부의 비율이 5%에 불과하다.
또 정부가 2015년부터 올해까지 쏟아낸 육아휴직자의 건강보험료 경감,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기간 확대, 남성육아휴직 인센티브 확대, 출산휴가 급여 지원 확대 등 대책은 대부분 고용보험기금을 재원으로 해 고용보험 혜택을 못 받는 영세기업 근로자는 논외였다.
전문가들은 그동안의 정책적 수사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선택과 집중, 분리와 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김연명 교수는 “그동안 저출산대책은 저출산과 고령화가 뒤섞여 혼란스럽고 부처의 실행 과제들을 망라해놓은 식”이라며 “다양성 면에서는 장점이 있으나 부처별 끼워넣기식 대책으로 오히려 선택과 집중이 어렵고 쓸데없이 예산만 늘렸다”고 지적했다. 이어 “저출산 문제는 단순히 정부 정책뿐 아니라 사회와 기업의 적극적인 참여와 인식전환, 일·가정 양립을 위한 문화 개선 등이 필요한 국가적 과제”라며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근로시간 단축, 유연근무제 도입, 아동수당 도입 등 구체적·실질적인 정책을 설계하고 부처간 정책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도록 컨트롤타워를 재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밖에 아동의 기초 양육비용을 보장할 ‘아동수당’ 도입, 육아휴직 급여 현실화, 민간 어린이집 국·공립 전환 등 강력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청와대에서 새정부 첫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간담회를 열고 “지금까지 저출산 대책들은 실패했다”며 “출산율과 출생아 수 자체를 목표로 하는 국가주도 정책이 아닌 결혼 및 출산 등 삶의 방식에 대한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출산과 자녀 양육을 인권으로 인정하는 ‘사람 중심 정책’으로 전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대선 당시 5세 이하 아동수당 지급, 국공립보육시설 이용률 40%까지 확대, 8세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 자녀를 둔 부모 대상 최장 24개월 임금 삭감 없는 유연근무제 도입, 육아휴직 급여 인상 등을 공약한 바 있다.
애를 낳으면 나라에서 키워준다는 의식이 형성되도록,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감한 육아 비용의 정책적·기업비용적 투자가 당연시도록 문화와 정책이 바뀌어야 젊은 세대들이 결혼하고 출산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음을 정책 입안 및 집행권자는 명심해야 한다.
박정환 기자 superstar1616@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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