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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 칼럼] 빗장도시 서울의 미래풍경

입력 2018-08-09 15:19   수정 2018-08-09 15:20
신문게재 2018-08-1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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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양이 사람을 내쫓았다. 사람공간은 양떼목장으로 둔갑했다. 양에게 삶터를 잃고 추방된 신세의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그곳에 양떼주인은 울타리를 쳤다. 범접도 진입도 할 수 없는 사실상 원천봉쇄다. 중세유럽을 휩쓴 대농(자본)주도적인 인클로저 운동의 성근 줄거리다. 초과이윤을 얻으려는 지대추구 때문이다. 


2018년 수도서울의 냉엄한 게임규칙도 현대판 인클로저 운동과 일맥상통한다. 천정부지의 아파트 값을 비롯한 생활비용이 높아지자 서울살이를 못 버틴 한계인구부터 내몰린다. 소득이라도 오르면 감내한다지만 저성장의 먹구름은 경제적 약자부터 내쫓기 마련이다.

울타리는 경계구분의 도구다. 현대판 보호와 배제의 낙인은 공간주인의 교체로 드러난다. 자본주의에선 경제권력이 울타리 위치와 범위를 정한다. 경제력만큼 인간본능인 피아구분을 확실히 규정해주는 잣대는 없다. 사치재의 과시욕만큼 발현역사도 깊다. 거주지로서 서울의 울타리는 압권이다. 빗장도시처럼 서울공간은 인접도시와 차별적이다. 곳곳에 단절장치를 설치해 공고한 거대성채처럼 밖을 내려본다. 버텨낸 자와 내몰린 자의 신분위계는 암묵적이며 고착적이고 또 구조적이다.



빗장도시 서울풍경은 암울하다.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갈수록 빗장안팎의 금권(金權)구분이 뚜렷해진다. 1%의 빗장인구와 99%의 추방인구로 엇갈린다. 비정상의 상식화다. 차별공간 서울이라고 좋을 건 없다.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다. 폭탄 돌리기도 받아줄 이가 공급돼야 지속되는 법이다. 지금은 낫다. 빗장 안에는 여전히 추방인구의 일자리가 있다. 착취든 핍박이든 서울의 존재이유다. 그러니 빗장은 아침에 열리고 저녁에 닫힌다. 일은 하되 잠은 밖에서 자라고 강제하는 구조다. 단 조건부다. 빗장이 더 넓어지고 높아질수록, 추방거리가 길어질수록 반발과 포기도 잦아진다. 일의 거부다.

후속세대는 서울이 던진 폭탄 앞에 섰다. 순서는 왔는데 받을지 말지 헷갈린다.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내집도 의문스럽다. 빗장도시의 생존원가가 귀소본능을 제거한 피난행렬을 부추겨서다.

버티자니 빚더미이고, 떠나자니 되돌아올 수 없다. 단군이래 총체적 청년위기의 불행 경고는 전대미문이다. 씨 마른 중산층은 사회이동의 사다리 대신 미끄럼틀만 설치한 빗장도시의 결과물이다. 상황반전은 어렵다. 경제사정은 가시밭길 천지다. 계층이동을 유도할 혁신실험도 멈췄다. 기괴한 빗장도시의 차별적 폭주기행에 브레이크는 없다. 개별치부(致富)의 노림수가 집단우울의 자충수가 됐다.

사람이 있어야 양도 있다. 양을 늘리겠다고 사람을 내몰면 곤란하다. 순서가 틀렸다. 안 입고 안 먹으면 양도 필요없다. 시장수급처럼 뭐든 오가야 지속가능성이 높아진다. 빗장이 뽑혀야, 청년이 웃어야 1%든 99%든 플러스다. 싹을 뿌려야 열매가 맺힌다. 빼앗고 내몰아 놓고 야단을 쳐 본들 돈 몇 푼에 웃어줄 후속세대는 없다. 이대로면 서울의 앞날은 디스토피아다. 추방인구가 늘어날수록 빗장 내부의 이전투구도 거세질 수밖에 없다. SF가 예견한 기괴한 미래도시가 싫다면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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