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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전범 무죄" 印판사 기리는 日… 침략의 역사, 수치심도 잊다

[권기철의 젊은 인도 스토리] 침략과 식민역사 속 韓·日·印
일본은 왜 인도 최대 원조국을 자처하나

입력 2018-08-20 07:00
신문게재 2018-08-2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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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인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메이지(明治)시대였다. 1899년 동경제국대학교에 산스크리트어과가, 1903년에는 일본-인도협회가 창설되었다. 또 1910년대 인도 독립운동이 한창일 때 영국 동인도 회사의 추적을 피해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으로 망명한 이후 관심은 더욱더 커졌다. 이들 망명객들이 현대 인도-일본 관계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한명인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는 현재에도 일본인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무척 애호하는 ‘일본식 카레라이스’를 유행시킨 인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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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패전일인 지난 15일(현지시간)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를 집단 참배하고 있는 일본 정치인(AP=연합)

2015년 8월 말 일본 아베 총리가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만났을 때 “우리 일본의 모든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전범들을 재판했던 인도인 재판관 ‘팔(Pal)’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여러 차례 언급을 했다. 


지난 2007년, 아베가 첫 총리를 역임할 당시 인도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가장 우선 순위에 두고 한 일이 콜카타 방문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재판관 ‘라드하빈노드 팔(Radhabinod Pal)’의 아들과 만났다. 이 때 아베는 “일본인은 재판관 팔(Pal)을 너무나도 존경한다. 그는 일본과 인도를 연결하는 가교”라고 말했다.

왜 아베는 외국 수반이 잘 가지 않는 콜카타까지 가서 이런 말을 했을까? 자의든 타의든 인도가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동경전범재판’ 때였다.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신사 안에 있는 인도 재판관 ‘팔’ 기념비, 사진=야스쿠니신사

 

연합국 재판관이었던 인도인 판사 팔(Radhabinod Pal)은 11명의 재판관 중 유일하게 피고인 전원 무죄를 주장하는 소수의견을 제출했다. 팔은 ‘전쟁의 승패는 힘의 강약에 의한 것이지 정의와는 관계없다’는 전제 아래 ‘침략전쟁의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일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판결 이유서를 제출했다. 팔(Pal)의 의견은 판결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난징 학살을 부정한 대표적인 우익의 책 ‘What Really Happened in Nanking (난징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의 저자로 알려진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가 1952년 ‘일본무죄론(日本無罪論)’을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로 작용했다.

이것은 현재까지도 일본 우익들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66년 팔은 일본에서 1급 국가훈장을 받았고 현재 그의 모습은 군국주의의 본산 야스쿠니 신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인도는 1951년 열강들이 참석한 샌프란시스코 평화 협약을 ‘열강들이 일본의 주권과 독립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던 적도 있다.

한국이 아직도 사실 여부에 논란이 있는 고대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과 결혼한 것으로 전해지는 인도 아유타국(현 아요디아) 공주인 ‘허황후와의 혼인’을 예를 들며 한-인도간의 연결을 끈으로 삼고 있는 것에 비해 좀더 정치적으로 상징적 인물을 인연의 끈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1949년 네루(Jawaharlal Nehru) 총리는 전쟁의 상처로 고통받고 있는 일본 어린이들에게 친선 선물로 자기 외동딸 이름과 같은 ‘인디라(Indira)’라는 코끼리를 도쿄의 우에노 동물원에 보내주었다. 이 코끼리는 1983년 고령(高齡)으로 죽을 때까지 많은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인도는 1980년대부터 ‘동방정책(Look East)’의 중요한 국가로 일본을 지목했고, 일본도 이에 부응해 1986년에는 최대 경제 원조국이 된 이래 아직까지도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얼마 전 70대 초반의 유명 인도 언론인 밥 루파니(Bob Rupani)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인도인들의 일본에 대한 인식을 잘 알 수 있는 영화를 하나 소개했다. 1955년 나온 유명 영화 ‘메라 주타 헤 자파니(Mera Joota Hai Japani: 내 신발은 일본제)’였다. 이 영화 주제가는 인도 영화 역사상 가장 유행한 노래 중 하나다. 또한 2013년 영화 할리우드 영화 그래버티(Gravity)에서 인도 배우 팔두트 샤르마(Phaldut Sharma)가 불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모든 것은 다 외세로부터 받아들여도 근본은 유지하자’는 게 가사의 주요 내용이다. 이 내용의 철학적 배경이 된 것은 1880년대 일본 근대화의 핵심정신 ‘동도서기(東道西器)’로 부터다. 동도서기는 동양의 도덕, 윤리, 지배질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서양의 발달한 기술, 기계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한다는 사상이다.

이것을 그 당시 인도 최고의 힌두주의자 나렌드란드 다타(Narendranath Datta)가 받아들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모디 총리는 그의 열렬한 추종자이며 10대 후반이래 극우 힌두민족주의 단체인 RSS(민족의용군)의 단원으로 활동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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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모디 총리(사진 중앙)가 구자라투주 장관이었을 때 인도 힌두교 극우단체 RSS 행사에 참석한 장면.

 

모디와 지배층들은 일본의 잔학성이나 공격성에 대한 비판보다 일본인들이 가진 불굴의 정신과 집단적 충성심에 특별히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모디의 주지사 시절부터 중점적으로 추진 했었던 ‘바이브란트 구자라트(Vibrant Gujarat, 구자라트 경제 활성화) 투자설명회’에 해마다 주인도 일본대사를 비롯해 수많은 일본기업인들이 참석해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투자계약을 맺고 있다. 구자라트주에 스즈키 자동차를 비롯해 수많은 일본이 들어선 것도, 구자라트와 뭄바이를 잇는 고속철 신칸센 건설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와 같이 8·15를 독립기념일로 기억하는 한국과 인도, 인도 현지에서는 한-인도 국민들이 한 자리에 모여 독립을 축하하는 기념식을 매년 공동으로 개최한다. 하지만 인도의 독립이 오히려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을 되살린 계기가 된 역사적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권기철 기자 speck007@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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