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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오직 나만의 들숨과 날숨으로…누구에게나 저만의 소리길이 있다, 음악극 ‘적로’

[혼자보기 아까운 히든콘] 대금산조 창시자이자 '진도아리랑' 창작자 박종기와 이왕직아악부 간판스타 김계선 이야기 '적로'
초연의 안이호, 정윤형, 하윤주에 이상화, 조정규, 조의선 합류

입력 2018-12-10 07:00
신문게재 2018-12-1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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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극 ‘적로’(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속이 텅 비어 있고 구멍이 뚫린 대금은 부는 이의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며 저마다 다른 소리길을 내는 악기다. 그 소리길은 방울져 떨어지는 이슬(滴露)이며 악기를 통해 흘러나온 입김에 의한 물방울(笛露)이며 예술가의 혼이 서린 악기 끝에 맺힌 핏방울(赤露)이다. 

 

지난해 초연에 이어 다시 돌아온 음악극 ‘적로’(12월 7~30일 서울돈화문국악당)는 그 구멍으로 바람과 숨결이 오가며 내는 저마다의 필멸의 소리로 불멸을 꿈꾸던 예술가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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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극 ‘적로’(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벽속의 요정’ ‘하얀앵두’ ‘3월의 눈’ ‘망각의 방법’ ‘1945’ ‘춘풍이 온다’ ‘심청이 온다’ ‘놀부가 온다’ 등의 배삼식 작가가 아랍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시 ‘모든 낮과 밤, 희미한 갈대소리, 그 음악이 사라지면 우리도 사라진다’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뮤지컬 ‘침묵의 소리’ ‘햄릿’, 오페라 ‘레플리카’ 등의 안무, ‘벽을 뚫는 남자’를 연출했던 정영두 연출, ‘달이 물로 걸어오듯’의 최우정 작곡가가 힘을 보탰다. 

 

대금 산조의 창시자이자 ‘진도아리랑’의 창작자이며 병든 노모에 허벅다리 살을 잘라 먹인 일화로도 유명한 박종기와 그의 지기지우(知己之友)이자 ‘장한몽’(이수일과 심순애) 등으로 한양합주를 시도했던 이왕직아악부 간판스타였던 김계선, 일제강점기를 관통한 두 음악가의 이야기다. 

 

[적로] 공연사진1
음악극 ‘적로’(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박종기·김계선, 두 인물의 악기인 대금(박명규·여상근)을 비롯한 아쟁(한림), 타악(김준수) 등 전통소리와 서양악기인 클라리넷(이승훈), 건반(황경은)의 선율이 어우러진다. 우리 전통의 진혼곡, 판소리 등과 동시대 서양에서 유행했던 스윙재즈 등이 한데 어울리기도 한다. 

  

비빙, 소리극 ‘서편제’ ‘금시조’ ‘공무도하’ 등과 영화 ‘도리화가’ ‘전우치’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까지 다방면에서 활동 중인 소리꾼 안이호, 두 살부터 국악신동으로 두각을 나타낸 젊은 소리꾼 정윤형, 중요무형문화제 제30호 가곡 이수자 하윤주가 초연에 이어 재연에도 함께 한다. 

 

[적로] 공연사진1
음악극 ‘적로’(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더불어 가족뮤지컬 ‘심청’(2017), 영화 ‘흥부’(2017) 등에 참여하며 재치 있는 입담과 실감나는 연기력을 인정받은 소리꾼 이상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 재학 중인 차세대 소리꾼 조정규,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전수자이자 ‘정가앙상블 Soul지기’의 동인으로 영화 ‘남한산성’ OST에 참여했던 조의선이 새로 합류했다. 

 

박종기와 김계선이 처음 만나 대금으로 벌이는 격돌을 씨름으로 시각화한 ‘용호상박’을 비롯해 ‘달린다 달깍달깍’, ‘세월은 유수와 같이’, ‘저 달도 늙어지리’ ‘시절은 좋구나’ ‘네나 나나 나나 네나’ 등 소리꾼들의 자조 섞인 한과 소리에 대한 열정이 담긴 18곡으로 꾸렸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소리를 추구하던 예술가들, 그들이 서로의 소리길을 알아주고 온기와 위안을 나누는 이야기다. 판소리와 정가 그리고 현대 악기들이 어우러지며 전통 소리의 대중화, 동시대 사람들과의 공감대 형성, 시대에 발 맞춰 색다른 소리길을 찾기 위한 다양한 시도와 실험에 나선 작품이다.  

  

[적로] 공연사진1
음악극 ‘적로’(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텅 빈 악기에 뚫린 구멍으로 한 인간의 들숨과 날숨, 그 순간 담기는 희로애락이 만나고 얽히는가 하면 마음을 나누고 헤어지며 보이지 않는 흔적을 남기는 대금은 인간의 삶을 닮았다. 그렇게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필멸의 소리로 불멸의 소리를 추구하며 저마다의 소리길을 찾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는 곧 살아가는 모두의 삶이 된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악기의 속이 비어있 듯, 사람도 비워야 남을 감동시킬 수 있다.” 평생을 속이 텅빈 악기가 내는 소리를 좇았던 김계선이 했다는 이 말은 결국 공으로 돌아가는, 2018년을 살아가는 우리네 일상에도 적용되는 삶의 이치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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