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태구의 평소 순박한 말투를 따 병구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정혁기 감독의 말처럼 영화 ‘판소리 복서’의 그는 기존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은 배우 특유의 아우라가 가득차 있다. (사진제공=CGV아트하우스) |
판소리와 복서라니. 장구의 리듬에 맞춰 나가는 펀치는 기묘하면서도 강렬하다. 영화 ‘판소리 복서’는 첫 오프닝 장면부터 관객의 허를 찌르는 영화다. 동트는 새벽의 바닷가에 권투인지, 택견인지 모를 한 남자의 실루엣이 명랑하게 펼쳐진다. 율동에 맞추는 박자는 저 뒤 바위에서 한복을 입고 북을 치고 있는 묘령의 여인이다.
주인공 병구는 한국최초로 판소리 복서를 탄생시킨 인물. 배우 엄태구가 극과 극의 인물을 차분히 오고간다. 정혁기 감독의 단편 ’뎀프시롤:참회록’을 상업영화로 완성한 ‘판소리 복서’는 전작 ‘차이나타운’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조현철이 동일인물을 연기하기도 했다.
“장편으로 만들어진다는 소식만 듣고도 너무 기뻤어요. 나에게 제안이 올거란 생각은 해본적도 없을 정도로 영화의 팬이었거든요. 그저 ‘누가 할까?’라고 관심있게 보고 있었죠. 그런데 (조)현철이가 각본으로 참여하고 출연요청이 저에게 왔을때 정말 꿈인가 싶었습니다. 당장 체육관에 등록해서 실제 선수처럼 훈련을 짜 달라고 했죠. 처음 욕심은 진짜 선수들이 봐도 인정할 만큼의 ‘흉내’였는데, 진짜 복싱을 배우면서 복싱 선수들을 존경하게 됐어요. 정말 죽을만큼 힘들더군요.”
(사진제공=CGV아트하우스) |
타고난 허스키한 목소리와 강렬한 눈매로 악역을 주로 맡았던 엄태구는 병구역할을 통해 평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 박자 늦고, 매사에 웃는 얼굴로 순박하게 ‘툭’하며 던지는 조용한 맡투가 바로 그것이다.
‘밀정’의 친일파 형사 하시모토와 ‘택시운전사’의 군인의 모습은 완벽히 지운 날것 그대로의 엄태구의 매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감독 역시 상업영화에서 보여진 거친 그의 이미지보다 실제로 만났을때 느낀 순수하고 여린 면을 살려 병구 캐릭터를 만들어갔다는 후문이다.
“이상한데 슬프게 웃겨요. 제가 이 영화에 접근한건 한마디로 ‘묘하다’였어요. 완벽히 제 취향이었고요. 주변에서 나에게 ‘너 병구같아’라고 하는게 참 좋았어요. 과거와 현실속의 모습이 다른데 그렇게 오고가는 감정을 연기하는게 배우로서 행복했고요. 촬영 일정상 순서대로 촬영이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 집중하는데 도리어 큰 공부가 됐어요.”
병구는 잘 나가던 프로 선수였지만, 진통제를 먹은 것이 화근이 되어 약물로 인해 복싱계에서 영구제명되는 비운의 선수다. 뇌세포가 죽어가는 펀치 드렁크를 겪고 있지만 오랜 기간 그를 가르친 박관장(김희원)과 신입회원 민지(혜리)의 도움을 받아 생애 마지막 링에 오른다. 외형만 보면 할리우드의 ‘록키’가 연상되지만 엄태구가 연기하는 복서는 한국 특유의 한이 서려있다.
그는 “감독님은 부족한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갖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링 위에서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면서 “세월에 밀려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가치관이 서로 통했던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매 작품이 도전이고, 그나마 잘 할 수 있는 연기를 하는게 꿈만 같아요. 죽기전에 하고 싶은 것? 결혼이요.(웃음) 집에 들어갔을때 누군가 있었으면 하거든요. 역할을 말하는거면 한가지를 꼽기보다 연기 잘하는 배우가 되는겁니다. 요즘 ‘낙원의 밤’을 촬영중인데 제가 사실 강한 연기를 많이 했어도 건달 캐릭터를 이렇게 길게 한적이 없거든요. 박훈정 감독님과의 누아르 영화라니, 매일 매일이 행복합니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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