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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식 기자의 세상만사] 염상(鹽商)

입력 2020-06-02 12:43   수정 2020-06-02 12:43

동패낙송(東稗洛誦)이라는 한문으로 쓴 단편소설집은 18세기 후반 노명흠(盧命欽)이 저술한 책으로 연대는 미상이나 조선 후기에 가장 오래된 소설집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백성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지는 민담-설화 등 100여 편의 내용들이 조금 황당한 대목들도 있으나 격조 있는 문장 표현과 독특한 구성 등에서 작가의 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타 문헌의 내용과 겹치는 부분들이 상당하지만 당시의 사회상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창작품으로 그 가운데 염상이라는 표제처럼 소금장사 등을 소재로 쓴 야담들입니다.



염상의 주요 내용이 “염전 주인에게 30냥을 맡겨놓고 3년 동안 소금을 받아다가 장사를 하고 3년 후 맡겨놓은 돈을 찾아가지 않겠다고 약정하면 염전 주인은 좋아라고 응할 것이다.

소금을 지고 100리 안팎의 지역으로 두루 돌아다니며 소금 값을 당장 받지 않고 외상을 남겨두어 고객들과 인정을 맺어 그들을 단골로 만들면 반드시 이문이 많을 것이다.”

예로부터 소금은 인간에게 매우 귀중한 생필품이지만 소금장수를 시작, 3년 만에 3,000냥의 큰돈을 벌어 갑부가 되었다는 염상 김서방 이야기는 조금 허황스럽기도 합니다.

소금은 인간의 신체 보전과 생명유지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무기질 가운데 하나로 인류가 처음 소금을 이용하기 시작한 시기가 대략 기원전 6000년 경 쯤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금이 소개되는 문헌은 삼국사기로 고구려 15대 미천왕조(美川王條)에 “왕이 젊었을 때 소금 장사를 하면서 망명생활을 했다.”라는 대목에 소금이 등장합니다.

삼국유사에도 시중에 소금이 유통되었다는 기록들로 미루어 본다면 우리나라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소금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나 아쉽게 통일신라시대까지 문헌상의 기록이 없습니다.

소금을 만들어 내는 곳을 규모와 방식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는데 바닷물을 끓이는 방식은 염소(鹽所), 염장(鹽場), 햇볕과 바람으로 건조시켜 만드는 방식을 염전이라 합니다.

또 소금을 직접 만들고 생산하는 사람들을 염한(鹽漢), 염간(鹽干), 염정(鹽丁), 염부(鹽夫)라고 불렀는데 대부분 천민 출신으로 소속된 염장과 염전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다릅니다.

염부(鹽部)는 요즘 말로 국가가 직영하는 국영기업체로 염부를 관장하는 염장관(鹽場官)은 생산, 유통, 판매까지 직접 관리를 하며 소금 판매 대금 가운데 일부를 봉급으로 받았습니다.

조선 시대에 관청(官廳)이 주도하는 염전 사업만큼 그 규모가 크지는 못했지만 일반 백성도 사업자로 자유롭게 염전 사업에 뛰어들어 소금을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1454년에 각 군(郡)과 현(縣)에 관한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제주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전국 바닷가에서 소금이 생산된다고 수록했습니다.

도로 사정이나 교통시설이 전무하던 18세기 후반에 모든 운송방법이 오직 사람의 등으로 짊어지고 옮겨야 했는데 소금을 운반하고 판매하는 사람들을 염상(鹽商)이라고 부릅니다.

1755년 충청도 충주 출신의 실학자 유수원(柳壽垣)이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이루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한 사회 개혁안 우서(迂書)라는 문헌에 염상의 실상을 상세하게 기술했습니다.

염상 대부분이 의식주 해결이 어려운 자로 약간의 밑천만 준비하면 소금을 사서 짊어지고 사방으로 다니며 팔수 있어 관청이 실태 파악을 할 수 없어 세금 징수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 소금은 생산과 유통, 판매 과정에서 수익이 꽤 높은 편이라 국가가 통제하고 관리하지 않는다면 권력자들이 독점할 위험요소가 항상 뒤따랐습니다.

이에 유수원은 소금 생산은 국가가 주도하고 사업 자금이 넉넉한 민간 상인은 유통업을 할 수 있게 해 각지로 운송된 소금을 염상들이 짊어지고 다니며 판매하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국가는 재정 확보 도움과 공정거래, 영세상들인 염상은 안정적 수입보장받고 백성들은 공정한 가격으로 손쉽게 소금을 구입할 수 있으니 당시에는 대단히 효율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유수원이 제시한 새로운 방법을 조선 조정에서 어느 정도 받아들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8세기 말 염상들의 방문판매 활동은 전국적으로 대단히 활발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도성(都城)에만 내염전, 용산염전, 마포염전, 이현(梨峴:종로4가)의 경염전 등이 이었으며 소금 관련 상품을 전문으로 취급한다는 뜻의 염전(鹽廛)으로 거상들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전산화 시스템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라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전문점들을 통해 연간 도성에서 유통되는 소금양이 수 백 톤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양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소금 방판의 선구자였던 염상들이 구비문학이나 이야깃거리에 종종 회자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동패낙송에 소개된 3,000냥 부자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동패낙송의 저자 노명흠이 1775년 사망했는데 영조치세(英祖治世)로 이문(利文)이 가장 많은 상품은 담배와 인삼을 꼽을 수 있는데 소금의 이문이 그렇게 많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소금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있어야 할 생필품이기에 신체 건강하고 성실하다면 적은 밑천으로 장사를 시작, 마음껏 판로가 가능하니 선뜻 직업으로 삼기에 쉬웠을 뿐입니다.


이승식 기자 thankslee57@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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