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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경제의 ‘신간(新刊) 베껴읽기’] <위대한 거래> 현명관

화려했던 삼성 2인자에서 최순실 연루 의혹까지...유서 쓰는 심정으로 쓴 자서전

입력 2020-07-07 07:00   수정 2020-07-06 23:28

 

 

저자는 한 때 삼성그룹 비서실장이었다. 총수인 이건희 회장에 이어 그룹의 2인자였다. 이런 최고위 그룹 관계자가 이병철 회장이나 이건희 회장에 관해 이렇게 책으로 얘기를 옮긴 적이 아마도 기자의 기억에는 없다. 아쉽게도 그룹의 깊은 속내를 드러내는 얘기는 거의 없다. 두 회장과의 일과 연관된 에피소드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두 오너에 관한 저자의 실제 경험담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성공이란 물건을 먼저 받고 대가를 치르는 것이고, 실패란 대가를 치르고 물건을 나중에 받는 거래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 “치러야 하는 대가에 화를 내거나 두려워 말고, 받는 선물에 집중했으면 한다”고 조언한다. 화려했던 시절을 뒤로 하고, 인생 막바지에 최순실 관련 의혹에 휩싸여 가족 모두가 고초를 겪었던 아픈 경험을 곱씹으며 하는 말이다. 이 책도 사실은 그 때의 울분과 부당함을 어디에든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에서 의도된 듯 하다. 실제로 그는 처음에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술회한다. 그나마 이 책을 쓰면서 다소나마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해 다행스럽다.  

 

 

 

* 이병철 회장의 ‘만두 해부’ 지시 - 1981년 2월29일 저녁 9시. 현명관 당시 호텔신라 상무는 중식당 조리장과 함께 서울의 유명 호텔에서 만든 만두를 해부하느라 몇 시간을 실랑이한다. 이병철 회장이 신라호텔 만두를 맛보고는 더 이상 손을 대지 않더니 불쑥 이런 지시를 내린 것이다. 숙주가 얼마나 들어갔는지, 돼지고기 다진 것은 얼마나 들어갔는지 등을 꼼꼼히 체크하고 원가 계산까지 해야 했다. 새벽 3시에 작업을 끝낸 이 상무는 원가와 품질, 맛에 대한 비교표를 만들어 이 회장에게 보고했다. 저자는 “무슨 일을 하든, 얕은 얼음을 밟는 심정으로 쫀쫀하게 하라”는 이 회장의 무언의 명령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사소한 만두 하나라도 경쟁자는 어떻게 하고 있는 지 알아야 한다는 이 회장의 특별한 지시였다.

 

* 신라호텔에서 ‘팁 문화’를 없애다 - 저자는 어디를 가든 ‘공적(公敵)’으로 몰렸다고 한다. 기존의 틀을 엎어버리는 개혁 조치들을 꾸준히 실천했기 때문이다. 신라호텔에서는 팀을 받지 못하게 해 큰 원성을 샀다. 일본이나 한국은 호텔 요금에 10%의 봉사료를 따로 미리 산정해 손님에게 청구한다. 따라서 별도의 팁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었다. 유럽 호텔들은 애초에 월급을 적게 주고는 본인의 역량에 따라 손님에게 추가로 팁을 받으라는 문화인데, 우리는 관행적으로 팁을 받아온 것이라며 이를 바꿔 버렸다.

 

* 공포의 신라호텔 23층 ‘신라 스위트’ - 그룹 사장단과 임원들이 가장 두려워한 장소가 신라호텔 23층의 신라스위트였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이 주 1,2회 씩 사장단과 점심을 마친 후 이곳에서 회의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처음 이 회장을 만난 저자는 이 회장으로부터 “잘 보고 많이 배우고 가라”며 ‘무거운’ 덕담을 주었다고 한다.   

 

* 80년대에 이미 고객 빅 데이터를 축적 활용하다 - 저자는 신라호텔에서 고객들을 위해 ‘나를 알아주는 서비스’에 집중했다. 1980년대였다. 호텔 프론트는 모든 고객의 사소한 취향까지 정리해 분류했고 좋아하는 신문이나 잡지, 선호하는 음악은 물론 조미료에 대한 호불호 등의 고객 데이터를 추가로 확인해 수작업으로 만들어 놓았다. 단골손님을 알아주는 서비스는 직원들의 마인드도 바꾸고 신라호텔의 이미지와 명성을 끌어올리는 데 크게 일조했다고 한다.

 

* 불도장(佛跳牆) 헤프닝 - 당시 호텔 중식계는 플라자호텔 ‘도원’의 유방녕 셰프와 신라호텔 ‘팔선’의 후덕죽 셰프로 양분되어 있었다고 한다. 후덕죽의 당시 최고 히트작이 곰 발바닥 요리와 불도장이었다. 불도장은 전복과 바닷가재, 돼지 발굽 힘줄 등 스무 가지 재료를 넣고 3시간 동안 찐 중국요리다. 글자 그대로 스님이 요리 냄새를 못이겨(고기 맛을 못 잊어) 수도를 포기하고 담을 넘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그 만큼 탁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도장을 자랑하려 신문에 낸 작은 조각광고가 문제였다. 광고를 본 스님들이 불교계를 욕되게 했다며 들고 일어났다. 백배 사과하고 마무리되었지만, 이 때 저자는 ‘겸손’을 배웠다고 회고한다.

 

* 이건희 회장과의 기 싸움 - 1988년 말에 호텔신라 서비스가 정평이 나면서 힐튼 호텔이 신라호텔을 견제하기 위해 무려 20명이나 한꺼번에 인력을 빼내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건희 회장이 현 사장을 긴급 호출해선 “어떻게 인력관리를 하길래 특급 조리사 등을 다 빼앗기느냐”며 질책을 퍼부었다. 제주신라호텔을 지을 때도 너무 많은 돈을 쓰는 게 아니냐고 따지고 들었다. 리버사이드 호텔을 투자 차원에서 매입하려는 이 회장에게 “일류호텔을 지향하는 신라호텔이 가치가 떨어지는 호텔을 매입하는 것은 좋지 않다”며 반대도 했다. 특히 신라호텔의 부실한 재무구조에 대해서도 꾸준히 질책을 당했다고 한다. 이 때 저자는 회사채 발행과 기업공개 추진을 얘기하고 “기한 내 이루지 못하면 책임을 지겠다”고 맞섰다. 그리고 그것을 해 냈다. 당시엔 서비스기업의 기업공개 자체가 불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저자는 “전문경영인은 소신을 보여줄 때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 이건희 회장과의 2라운드 - VIP를 영접하는 승지원이라는 영빈관이 있다. 이건희 회장이 주재하는 사장단 회의가 이곳에서 만찬을 겸해 열리곤 했다. 그룹의 대소사와 중요 사안에 관해 이 회장이 ‘국문’에 가까운 질문과 타박이 늘 이어져 사장단에게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신라호텔에서 만년 적자기업이던 삼성시계 대표로 ‘좌천’ 된 저자는 이 곳에서 일본 세이코와의 합작사인 삼성시계 문제를 거론해 분위기를 얼어붙게 했다. 그는 “삼성시계가 살아나려면 세이코와의 불공정한 거래를 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비싼 기술 도입료와 일본인 부사장의 지나친 권한 등을 성토했다. 삼성시계는 이건희 회장의 주도로 이뤄졌던 프로젝트였기에 모두들 초긴장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누가 하지 말하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라며 사실상 그의 삼성시계 대수술을 수락했다. 마치 이제까지 그런 말을 해 주는 사장을 기다렸다는 듯이. 

 

* 이병철의 유언을 푼 이건희의 담대함 - 이병철 회장은 군부에 빼았겼던 동양방송과 한국비료만은 꼭 다시 찾아오라고 유언을 남겼다. 마침 한국비료가 민영화 조치로 시장에 나왔다. 당시 금강화학과 대림그룹이 경쟁자였다. 다른 곳에서 엄청난 베팅을 할 것이라는 생각에, 삼성은 주당 33만 1950원의 입찰가를 써 냈고 당당히 낙찰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다른 기업들 보다 무려 300억원이나 더 써냈음을 알고 저자는 이건희 회장의 모진 질책을 걱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이 사람아, 시장에서 사고 싶은 물건을 사는데 비싸게 주고 사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고생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때 이 회장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한다.

 

* 섬세함의 이병철 vs 직관력의 이건희 - 저자는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철저한 일본식 관리의 삼성을 만든 사람이 이병철이라면, 직감에 의지해 신속하게 치고 나가는 스타일이 이건희라고 비교한다. 이병철 회장의 작품이라고 알고 있는 반도체 신화도 사실은 이건희 회장의 무모한 도전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이병철 회장은 그런 이건희 회장을 그룹 후계자로 삼기 직전까지 고민했다고 한다. 치밀한 경영능력과 꼼꼼한 관리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반대로 삼성의 관료주의와 보신주의에 넌더리를 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삼성이 계속 이렇게 가다간 죽을 것이라며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제는 양에서 질로 승부해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고 전한다.

 

* 만두를 해부시킨 이병철 vs 가전제품을 분해시킨 이건희 - 이건희 회장은 만두를 분해시킨 이병철 회장보다 더 지독했다고 저자는 술회한다. 그는 LA호텔 연회장을 통째로 빌려 모든 가전제품을 분해시켰다. 계열사 사장들에게 삼성 제품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려 한 것이다. 

 

* “삼성은 2류”라는 후쿠다 보고서 - 이건희 회장이 그룹 총수로 취임한 1987년. 그는 기술 고문 후쿠다 이사의 56쪽 보고서를 받아든다. 보고서의 내용은 “삼성은 2류 기업이니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를 계기로 LA 회의를 거쳐 프랑크푸르트 회의까지 이어졌고 이른바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봐”라는 ‘삼성 신경영’이 탄생한다. 최측근이던 이수빈 비서실장 마저  양적 성장의 마인드에 여전히 매몰되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먹던 포크를 집어던지는 이건희를 보면서 그룹은 서서히 바뀔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 “바꾸는 건 당신이 잘하잖아” 한마디에 비서실장으로 - 이건희 회장은 저자를 한남동 집으로 불러 삼성그룹의 운영의 문제점을 말해 보라 한다. 여기서 저자는 “그룹을 전자업종, 금융업종, 서비스업종으로 나눠 소그룹별로 경영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의견을 개진하다. 이 회장은 곧바로 “현 사장, 비서실장 하세요”라고 지시한다. 저자가 그룹에 오래 몸담지 않아 오히려 변화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바꾸는 것은 당신이 잘하잖아”. 이 말에 그는 향후 3년 동안 비서실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 진정한 프로 스포츠 구단이 없는 한국 - 저자는 삼성 말년에 삼성라이온즈 구단주를 역임했다. 저자는 이 때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프로 스포츠 구단이 없다”고 잘라말한다. 자체 입장 수입으로 선수 연봉과 프론트의 임금을 감당하지 못하는 반쪽 짜리, 무늬만 프로 구단들이라고 비판한다. 모두 모기업의 지원 아래 움직이는 ‘기생식물 같은 존재’라고 혹평한다. 800만명 관중이라고 말하는 프로구단이지만 각 구단마다 100억대 전자를 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삼성의 경우 2000년 감소보고서를 보면 총 302억3937만원의 수입액 중 160억원이 계열사 지원금이었다. 입장료 수입은 18억 6630만원에 불과했다. 이러니 자금을 대 준 기업들의 민원 전화와 부당한 간섭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 삼성가 불문율을 지켜 성공한 이승엽 - 삼성가에는 불문율처럼 내려오는 경구가 있다. ‘불신물용(不信勿用) 용인필신(用人必信)’이다. 사람을 믿지 못하겠거든 끝까지 쓰지 말고, 쓰고자 한다면 반드시 믿고 맡기라는 뜻이다. 2002년 LG트윈스와의 프로야구 한국 시리즈에서 6차전까지 이승엽은 20타수 2안타였다. 당시 구단주였던 저자는 김응용 당시 감독에게 이승엽의 교체를 지시하려 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이제 터질 때가 되었다”며 기다려 주었고, 결국 이승엽은 끌려가던 경기에서 3점 홈런으로 동점을 만들었고 이어진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으로 삼성은 첫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 ‘현수남’에서 ‘현명관’으로 개명 - 원래 저자의 이름은 현수남이었다. 이를 22살 되던 해인 1962년에 아버지가 ‘출세하고 집안을 일으키라’며 바꿔 지어 주었다. 집안에서 한 사람 밖에 개명이 안된다고 해 아버지의 배려로 저자만 특별히 이름을 고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서울대 법대 3학년 때 사법고시 1차에 합격했다. 하지만 이후 2차 시험 낙방에 이어 1년 후 다시 치른 2차 시험에서도 계속 고비를 마시는 등 기대했던 관운이 따르지 못했다.

 

* 행정고시 패스로 행정직 공무원의 길로 - 사법시험 준비 중 경험 삼아 치른 행정고시에서 덜컥 합격하고 만다. 당시 사무관은 지방 군수급이었다. 첫 부임지는 부산 시청 인사과 고과 계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만연했던 인사 청탁과 비리를 직접 체험하고는 탈출을 결심한다. 때 마침 감사원에서 제안이 와 옮기게 됐지만, 이곳 역시 권력기관 눈치보기에 급급한, 부정을 눈감아 주고 개인 이득을 취하는 그런 곳이었다고 한다. 유신 정부 청와대의 사정 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오라는 제안을 뿌리치고 그는 일본 유학을 떠났고 이후 귀국 직전에 때 마침 오퍼가 온 삼성그룹으로 옮기게 된다. 그룹에선 중앙일보를 권했으나 상장 1호 기업이자 안정적인 경영실적을 자랑하던 전주제지를 선택했다. 

 

* 일본 유학에서 얻는 일본관 - 저자는 “나를 살리고 대한민국이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관대함과 후덕한 마음으로 일본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좀더 냉정하게 일본을 바라보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설픈 증오나 폄훼는 우리 스스로를 죽이고 창조의 싹을 자를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일본의 ‘자기규칙’과 ‘보은 정신’을 강조한다. 일본인들은 신세를 지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영역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더더욱 쉽게 마음을 내 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 이건희 회장에 보고한 ‘일본이 우리보다 강한 이유’ - 신경영 선언 후 1년 지난 뒤 이 회장이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소니를 이길 수 있겠소”하고 물어 보았다. 저자는 ‘기본을 지키는 철저함’이 일본이 우리보다 강한 부분이라고 설명했고, 이 회장은 이를 즉각 모든 계열사에 전파하라고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저자는 일본의 소프트파워를 두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은하는 정신이다. 따라서 그들을 이기려면 서로 믿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 일본은 작은 일도 대충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도 기본부터 철저히 지켜야 극일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 한심한 관료제를 보고 정치인 전향 결심 - 제주 출신인 저자는 끊임없이 제주도지사 출마를 권유받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결국 그는 거대 그룹을 경영하면서 알게 된 ‘돈의 매커니즘’을 제주에 적용해 하와이를 능가하는 관광지로 만들고자 하는 꿈을 꾸게 된다. 그 이면에는 제주의 발전을 막고 있는 한심한 관료제를 부숴버리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고 한다. 제주 신라호텔 공사 때 관리사무소 소장이 기와 색깔을 문제 삼아 신축 계획서 접수를 거부하고, 해변으로 내려가는 계단 하나 만드느라 1년 넘게 관공서를 들락거려야 했던 비효율성을 반드시 바로잡아야 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는 항공요금 50% 인하, 제주 인터넷 산업특구 프로젝트, 삼다수 증산을 통한 에비앙 따라잡기, 동북아 허브 구축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차별화했다. 

 

* 두 번의 실패, 그리고 얻게 된 새로운 반려자 - 두 번의 도지사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유권자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지 못한, 비호감 후보였던 탓이라고 자평했다. 굳은 표정에 찬바람 부는 이미지를 바꾸지 못한 채 선거운동을 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두 차례 선거에서 물심양면으로 자신을 도운 전영해라는 여인을 얻었다. 본 부인과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혼을 결심하고 새로운 가족을 맞아들였다. 

 

* 3류 도박장이던 마사회를 완전히 바꿔놓다 - 34대 회장으로 취임해 본 마사회는 저자의 눈으로 보기에 ‘3류 도박장’이었다. 경마는 영국에서는 ‘왕의 스포츠’ 불릴 정도다. 입장료만 최고 40만원까지 하고, 드레스코드 까지 있을 정도다. 하지만 우리는 욕설과 쓰레기로 뒤덮힌 하우스 도박장과 다름 아니었다고 한다. 저자는 마사회의 환골탈태를 결심하고 이곳을 건전한 레저 공간으로 만들기로 했다. 가장 먼저, 모든 직원에게 품위있는 의상을 입히고 호텔 직원처럼 행동하게 했다. 그러자 슬리퍼와 반바지, 쓰레기가 없어졌다. 직원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도 급감했다. 고객과 접점인 마권 판매대의 유리벽도 허물어 버렸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사람들이 서서 베팅을 하던 화상경마장도 품위있게 앉아서 보도록 바꿨다. 매출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회상 경마장이 되었다고 한다. 

 

* ‘최순실 3인방’ 의혹에 상처뿐인 마사회 회장 -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최순실 사태가 터지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마사회 회장이라는 직책 탓이었는지, 그는 물론 그의 아내까지 ‘최순실 3인방’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국회의원들은 치외법권을 활용해 확인 안된 의혹을 연일 제기하며 저자의 가족을 최순실의 핵심 측근으로 몰아갔다. 저자의 휴대폰까지 압수해 조사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9개 고소 고발 건 모두 무협의로 판명났다. 하지만 믿었던 마사회 노조까지 고발에 나서고, 고용노동부 특별근로감독과 농림부와 감사원의 각각 두번의 감사 등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마사회에서 그를 도와 개혁을 진행했던 사람들도 고초를 겪고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생겨났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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