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뉴스 전체보기

닫기
더보기닫기

[비바 2080] 100세 시대 신간… 강원국 <강원국의 인생공부>

입력 2024-01-16 07:56

책

 

이 책의 부제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이다. 저자 강원국이 이 시대의 사표가 될 만한 15명을 직접 인터뷰해 그들이 전하는 삶의 철학과 원칙, 실패를 딛고 다시 도전해 일어선 용기의 메시지를 대신 전해 준다. ‘당신의 삶에서 배웁니다’라는 저자의 고백과 같은 메모에서 보듯이, 꽤 삶을 오래 산 사람들도 새겨 들을 만한 울림이 있다.




◇ 유현준 ‘불안과 결핍을 딛고 만들어낸 소통의 공간’


건축가 유현준을 있게 한 것은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경제신문 기자였던 아버지가 내세울 것 없던 학벌 탓에 번번히 승진에서 누락되어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보고, 그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아버지는 그가 판검사가 되길 기대했지만 수학이 싫었던 그는 어중간하게 건축학과를 지원했고 MIT와 하버드를 거쳐 세계적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의 건축 사무소에서 경력을 쌓았다.

귀국 후 한 동안 일감이 없어 고생께나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신문 연재를 계기로 2015년에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썼고 이른바 ‘대박’을 쳤다. 그는 “인생은 차선이 모여 최선이 되더라”고 말한다. 건축 설계만 고집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며 글을 쓴 덕분에 그는 ‘인문 건축가’라는 명성을 갖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한다.

유현준은 건축학을 ‘공간 연구를 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건축은 ‘관계’를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 사이를 좀 더 화목하게 만드는 공간 구조를 설계하고자 한다. 그는 “공통으로 머물 공간이 많아져야 소통이 이뤄지고 갈등이 완화된다”면서 벤치 하나만으로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1만 평짜리 하나 보다 가까이에 1000평짜리 공원 10곳을 만드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 최재천 ‘젊은 날의 공허를 딛고 순수한 탐구열의 세계로’

생태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인 최재천은 하버드에서 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다. 그런 그도 대학 본 고사에서 수학 문제를 거의 풀지 못한 수포자(수학포기자)였다. 어릴 때 꿈도 시인이나 소설가가였다. 어렵게 재수를 해 의예과를 지원했으나 2지망으로 동물학과에 붙었다. 처음에는 적응도 못하고 어려움을 겪었으나 우연히 하루살이 전문가인 조지 에드먼즈 교수의 현장 조교 역할을 맡아 따라다니다가 생물학에 눈을 뜨게 된다.

공부도 않던 아들이 갑자기 유학을 가겠다고 하자, 여유가 없었던 아버지는 중도에 회사를 그만 두고 퇴직금을 받아 유학비와 등록금을 대 주었다. 이를 악물고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버드에서 에드워드 윌슨 교수 밑에서 박사과정을 할 때,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를 연구하겠다며 민벌레 연구자가 된 인연으로 그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다. 2005년에는 윌슨 교수의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통섭(通攝)이라고 번역해 출판하면서 큰 성공을 이루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길게 설계하고, 살다가 어려움이 생겨도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이 ‘통섭형 인재’”라고 말한다.

◇ 최인아 ‘사랑하는 이에게 묻듯 자신에게 질문하는 사람’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는 카피로 유명한 최인아 전 제일기획 부사장. ‘유리천정’을 뚫고 삼성그룹 최초의 여성 부사장에 올랐던 그는 최고책임자 지위까지 오를 것이란 기대를 접고 느닷없이 은퇴를 선언한 후 두번 째 직장으로 ‘책방’을 선택했다. 그가 강남 한 복판에 세운 ‘최인아 책방’은 시작부터 달랐다. 일하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 컨셉트였다. 애초부터 책만 팔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책을 중심으로 사람이 모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점’이 아니라 ‘책방’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독자의 고민을 중심으로 책을 분류했다. 그리고 ‘생각의 힘’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책을 읽은 독자들이 만나서 생각의 넓이와 깊이를 더할 수 있도록 공간을 제공했다. 그래서 슬로건을 ‘생각의 숲을 이루다’로 지었다. 회원제로 북클럽을 시작한 지 6년 만에 회원이 650명에 달했다. ‘책방 마님의 편지’를 통해, 어떤 책을 골랐고 어떤 점에서 읽어볼 만한 지를 알렸다. 저자들을 초청해 회원들을 위한 북토크 자리도 따로 제공했다. 그는 매사를 고민에서부터 출발하라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멘토를 꼭 주변에서 찾지만 말고, 책에서도 찾아보라”고 조언한다.

◇ 박준영 ‘약자를 위한 재심을 내 운명과 같이’

박준영은 국내 유일의 재심 전문 변호사다. 그에게 재심 변호를 부탁하러 오는 대부분은 사회적 약자다. 돈을 받지 않고 변론할 때가 많다. 본인 말대로 그는 ‘한번 만 더’ 인생을 살았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목포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가 군대 다녀온 것이 학력의 전부다. 늘 그를 믿고 지지해 준 어머니가 없었다면 일찌감치 꿈을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세 번의 도전 끝에 사법시험을 통과했고 사법연수원 턱도 가까스로 넘어섰다. 매달 카드 8개로 돌려막기 할 상황에서 공부가 될 리가 없었다. 학연도, 지연도 없던 그로선 건당 20만~30만 원의 ‘국선 변호인’이 돌파구였다. 그러다 ‘수원 10대 소녀 상해치사 사건’의 재심을 맡아 2013년에 범인으로 지목됐던 7명 전원의 무죄를 이끌어내면서 비로소 이름을 알렸다.

그가 무죄를 받는 재심 사건은 10건이 채 안된다. 승소율 100%지만, 절박한 마음으로 그를 찾는 이들을 모두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유다. 그는 무죄를 선고 받기까지는 돈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생계는 강연료로 채운다. 그는 모든 피의자에게도 진술거부권을 보장하자고 외친다. 약자를 배려하고 약자의 인권을 고민하면서 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박미옥 ‘형사계의 전설… 지금은 돈 안받는 책방 주인’


박미옥은 국내 최초 강력계 여형사, 최초의 여성 강력계 반장이다. 일곱 남매 중 막내로 자유분방하게 자라온 덕에 경찰관 시험에도 도전할 수 있었다. 중도에 형사를 그만두고 스님이 될 꿈도 꾸었지만, ‘여자가 뭘 하겠어’ 하는 그릇된 생각을 바꿔 보겠다고 좌충우돌 하다 보니 33세에 강력계 반장을 역임하며 어느 새 ‘전설’이 되어 버렸다. 신창원이 여성들을 애인으로 삼아 도피행각을 벌이던 때에, 이를 단서로 잡아 그를 검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잘 나가던 직장에서 8년 일찍 명예퇴직을 했다. 경찰서장 자리가 보였으나, 자신의 삶과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로운 삶을 제주에서 보내기로 했다. 책 3000권 정도를 갖추고 책방을 열었다. 책방인데 책은 팔지 않는다. 돈을 받지도 않는다. 책을 읽다가 책 주인에게 자기 속내를 실컷 얘기하면 그만이다. 돈 안되는 책방이지만, 사람들을 만나 살아보자 하는 마음에 만든 공간이기에 최소한 10년은 더 해보고 또 다른 삶을 결정하겠다고 한다.

◇ 노브레인 ‘무대를 불사르는 자유로운 영혼의 탈주자들’


30년 가까이 흐트러짐 없이 함께 하는 밴드는 거의 없다. 노 브레인이 가능했던 것은 멤버들 특유의 ‘무소유’ 인식 덕분이었다. 법정스님이 말처럼 ‘내가 아무 것도 안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1996년 밴드를 처음 결성한 후 극심한 경제난에 막노동을 포함해 온갖 허드렛일을 했지만, 음악을 할 수 있다면 그 조차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했다.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음악적 열정을 불살랐다. 소유에 대한 집착 없이 오로지 음악과 무대에만 집중했다.

‘주류’에 들어가기 위해 억지로 노력하지 않았기에, 27년 동안 정체성 흔들림 없이 밴드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이들은 저작권부터 개인 활동 수입까지 모두 똑같이 나눴다. 20년 넘게 최근까지 그렇게 지냈다. 오히려 이들은 금전적인 문제 보다는 무대 자리 싸움이 더 큰 문제였다. 네 명 모두 곡과 가사를 쓰고 연주를 하니, 서로의 역할을 유연하고 자유롭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보컬과 드럼이 각자 역할을 바꿔 공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룹 이름 ‘노 브레인(No Brain)’은 그냥 뇌가 없는 혼수상태로 음악을 듣고 미친 듯이 놀아보자는 뜻이라고 한다.

◇ 나태주 ‘살기 위해 썼고, 살아남기 위해 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국민 애송시가 되어버린 이 짧은 시 덕분에 평범한 시골 초등학교 교사 였던 나태주는 ‘풀꽃 시인’이라는 애칭과 함께 ‘국민 시인’이 되었다. 그는 “시는 내가 쓰는 게 아니라, 시가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시가 잘 나오도록 잘 도와주는 사람이라며 “시는 ‘쓰다’,‘짓다’가 아니라 ‘낳는다’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 자체에 존경심을 넘어 어떤 경외감을 갖다는 느낌을 준다

나태주는 교직생활 40년이 넘도록 늘 동심을 유지해 왔다. 두 차례 큰 깨달음 덕분이었다. 한 번은 장학사 시절에 어느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떠들고 뛰어 노는 것을 나무라자, ‘왜요. 저런 게 애들인데요’라고 말하던 교감 선생님에게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의 귀가 고장났다며, 애들이 뛰어 노는 소리가 즐겁게 들리지 않던 자신을 다잡았다고 한다. 정년을 6개월 앞둔 2007년에는 췌장염이라는 죽을 병을 앓다 간신히 살아났다. 이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나’보다 ‘네’가 더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조진래 기자 jjr2015@viva100.com 

기자의 다른기사보기 >

이시각 주요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