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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 칼럼] 영화 ‘자유국가 존스’를 권하며

입력 2018-07-23 08:30

배진영
배진영 인제대 교수(경제학)
전국이 불볕 가마 더위이다. 뜨거운 공기만큼 숨 쉬는 세상의 공기도 확연히 바뀌었다. 숨쉬기가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은 TV가 제법 내 친구가 되었다. 영화를 골라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제넘게 오늘은 영화 한 편을 추천하면서 그 속에 나오는 한 인간의 간절한 자유의지와 자유국가를 위한 조건을 소개한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 실화에 바탕을 둔 “Free State of Jones”가 그것이다. 재미있으면서도 감동을 주는 영화이다.



존스(Jones)는 미시시피 주에 있는 존스 카운티라는 지역 이름이다. 주인공 뉴턴은 목화사업을 위해 노예제를 끝까지 유지하고자 하는 농장주들의 욕심 때문에 남부 연합군으로 강제 징집되어 참전한다. 총을 만져보지도 않은 자신의 어린 조카도 전쟁에 동원되었고,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조카는 삼촌 곁을 한시라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런 조카가 자기 앞에서 총에 맞아 숨지는 것을 보고 분노하면서 그는 탈영한다. 탈영은 자유를 향한 그의 기나긴 여정의 시작이다. 그는 동조하는 사람들을 모아 존스 카운티에서 자유국가를 선포한다. 선언문은 아주 간결한 4개 항으로만 되어 있고 여기에 자유정신의 핵심이 녹아 있다. 그것을 풀어본다.

첫째, “한 사람의 가난이 다른 사람의 부가 될 수 없다.” 이것은 빈익빈 부익부처럼 한 사람의 부가 다른 사람의 가난을 야기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다. 또는 모든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아래 세 번째 조항을 보면 그것은 철저히 시장경제의 원리를 담고 있음을 발견한다. 즉 개인은 그가 새롭게 부가한 가치에 의해서만 자신의 부를 쌓을 수 있지, 남의 것을 빼앗아서 자신의 부를 쟁취할 수 없음을 천명한 것이다.

둘째,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위해 살거나 죽거나를 강요할 수 없다.” 이것은 명분 없는 전쟁에 강제 징집된 주인공 뉴턴의 처절한 심정에서 우러난 것이다. 그는 무엇을 위해 심지어 누구를 위해 죽어야 하는지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이런 국가의 폭력에 탈영으로 저항했고, 자유를 얻기 위해 총을 들었다. 국가를 위시한 어떤 집단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반하는 폭력적 행위는 중단해야 함을 선포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심지어 세금이라는 명분으로 빼앗아 가는 행위에도 총으로 대항한다.

전쟁과 평화. 진보와 보수. 우파는 전쟁과 보수로 주홍글씨처럼 딱지 지워져있고, 좌파는 평화와 진보로 분칠되어 있다. 평화는 언제 어디서나 공동선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 없이는 평화가 없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다. 주인공 뉴턴도 평화로운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국가의 폭력에 대항한 것이다. 평화라는 용어를 좌파 쪽에서 즐겨 사용하기 때문에 이 단어의 사용을 배척하는 것은 평화와 자유의 관계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평화와 자유는 경쟁관계가 아니며, 평화가 자유의 하위 개념은 더 더욱 아니다. 평화는 자유의 상위 개념이다. 미제스의 자발적 교환이나 인간행동학 그리고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는 평화를 위해 개인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는 강력한 이론들이다. 평화라는 용어 사용을 꺼리면, 우파는 평화를 싫어하는 괴물로 비치게 된다.

좌파들은 자발적이고 협력적인 인간사회의 모든 관계를 빼앗고 빼앗기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가진 자는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고 가지지 못한 자는 자신의 몫을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자들의 것을 국가가 강제로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주는 것은 정당하고 정의로우며 그것이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여긴다. 국가는 이를 위해 강력한 공권력을 지녀야 하며, 그런 국가를 신성하게 여긴다.

빼앗고 빼앗기는 세계관, 그래서 다시 빼앗는 것이 정당한 국가관, 얼마나 살벌한가? 그럼에도 좌파는 ‘평화’와 ‘진보’라는 두 용어 선점으로 이를 멋지게 감추는 데 성공했다. ‘진보’의 탈은 무언가를 새롭게 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반면, ‘보수’의 탈은 자신의 것을 지키기만 골몰하는 욕심스러운 사람들로 형상화해버렸다. ‘보수’는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근검절약과 창의력으로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려는 사람들이라고, 이를 위해 자유를 지키려 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이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의 딱지만 씌워버리면, 승패는 갈린다고 그들은 믿는다. 여기에 ‘평화’는 결정타이다. 평화의 반대어가 전쟁이 아님에도 평화만을 줄곧 외치다 보면, 어느새 우파는 자신의 욕심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 괴물이 되어버린다. 주인공 뉴턴이 ‘자유’를 위해 총을 들었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셋째, “자신의 땅에서 거둔 것은 자신이 가지며 그 누구도 이를 빼앗을 수 없다.”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 만든 가치는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은 인간사회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원칙이다. 이런 구절이 모세의 십계명에도 나오고 고조선의 8조법에도 나오는 것을 보면, 그것은 거의 정언(定言)명령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원시수렵 사회나 고대 농경사회에서 보는 이타적 행위는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는 행위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자신의 굶주림과 병들 때를 생각하기 때문이며 집단을 벗어나서는 결국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온 행위라고 해석될 수 있다.

넷째,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두 다리로 걷는 한 모두는 인간이다.” 위의 셋째 조항을 보면 이때의 평등은 ‘물질적 평등’이 아니라 ‘형식적 평등’을 말한다. 그는 흑인들의 실질적인 참정권을 얻기 위해 총을 들고 그들과 함께 투표장으로 나아간다. 죽음을 무릎 쓰고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의 이런 행위를 우리는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라고 한다. 이를 민주화 투쟁이라고 이름 붙이면 어쩐지 미국역사를 깎아내리는 듯하다. ‘자유화 투쟁’이라는 용어가 ‘민주화 투쟁’보다 더 비장감을 주는 용어이지 않는가? 그런데 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거의 모든 약소국가들의 ‘자유화 투쟁’이 왜 ‘민주화 투쟁’으로 격하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격하라고? 그렇다. 자유는 사회적 기본가치인 반면 민주화는 이를 위한 절차적 가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수립 이후 일어났던 운동들을 ‘민주화 항쟁’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적절한 용어 사용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분명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다. 비록 국회에서 통과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대통령 헌법개정안의 전문을 보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참정권 보장을 위한 거의 모든 항쟁들이 헌법의 ‘전문’답지 않게 나열되어 있다. 이를 민주화 운동이라고 우리 스스로 부른다. 한국에서는 오직 민주화만이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유일한 가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운동의 내용을 보면 그것은 ‘자유 쟁취를 위한 투쟁’이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있었던 항쟁들을 ‘민주화’라 부르기보다 ‘자유화’라 명명하는 것이 그 항쟁을 더욱 명예롭게 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불렀다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규정한 ‘자유민주국가’에서 ‘자유’라는 용어를 그 누구도 함부로 삭제하지 못할 것이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자랑스럽지 않다고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배진영 인제대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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