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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인도-파키스탄, 그 애증의 역사 <상>

[권기철의 젊은 인도 스토리] 힌두와 이슬람교, 종교 달랐던 두 형제

입력 2019-03-25 07:00   수정 2019-03-24 17:54
신문게재 2019-03-25 15면

 

인도 국기 강하식
인도-파키스탄 국경에서 국기하강식 행사의 모습 (사진=LiveMint)

 

한·일 관계 이상 복잡한 관계를 가진 두 나라를 꼽으라면 최근 전쟁 위기에 놓였던 인도와 파키스탄이다. 종교 갈등으로 시작된 두 나라의 애증 관계는 한일 두 나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다. 한 때 공존했던 힌두교와 이슬람이 각자 종교의 미래를 찾는 과정에서 균열이 생겼고 이제는 종교를 떠나 정치적으로도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나라들이 되어 버렸다. 그런 가운데서도 크리켓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 두 나라의 앞날을 쉽게 전망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의 오랜 애증관계와 미래를 두 차례에 걸쳐 조망해 본다.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의 관계를 잘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영국 식민지 시기에 전달된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기(國技) ‘크리켓’ 경기다. 국가대표 경기가 있는 날에는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의 거리가 한산할 정도다. 특히 2015년 크리켓 월드컵 ‘인도-파키스탄’ 경기는 티켓 발매 후 11분 만에 6만 8000개 좌석이 매진될 정도였다. 이 경기 시청자는 인도에서만 2억 9000만 명에 달했다.

양국간의 크리켓 경기는 두 나라가 갈등을 겪을 때면 어김 없이 중단되기도 하는데, 1965년과 1971년 인도-파키스탄 국경 전쟁 때 무기한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두 나라의 관계를 정상화 시키는 것도 크리켓이었다. 즉, 외교적으로 크리켓 경기를 재개하는 방식을 논의하며 양국간의 관계가 정상화되기도 했다. 비록 두 국가는 갈등을 항상 겪고 있지만 문화와 스포츠를 통해 그 갈등을 치유하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인도 축구
인도와 파키스탄 크리켓팀 주장들이 크리캣 월드컵 트로피를 들고 결승전에 앞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사진=LiveMint)

 

그렇다면 무엇이 인도-파키스탄을 갈등 속으로 몰아놓고 있는 것일까? 한·일간의 갈등은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와 이에 대한 역사 인식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렇지만 인도와 파키스탄의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종교’다.



종교 갈등이라고 하면 기독교와 이슬람 그리고 중동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1947년 인도제국이 영국에서 독립할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로 분리가 결정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종교 갈등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같은 지역에서 다른 종교를 갖고 살던 그들은 과거에도 지금처럼 서로 반목하고 갈등했을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 힌두와 이슬람, 한때 ‘번영’을 나눈 공존 관계

힌두교와 이슬람은 오랫동안 평화롭게 공존해왔다. 인도에 이슬람교가 전해진 것은 대략 서기 711 년부터였다. 원래 이 지역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혼재하고 있었고, 이슬람교는 그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이 인도를 침입한 7~13세기, 남인도는 힌두교 왕조가 북인도는 이슬람 왕조가 지배했다. 북인도를 지배한 델리-술탄 왕조(13~16세기)를 지나 이슬람 왕국이 인도 전역을 지배한 무굴 제국(16세기~19세기)을 거치며 ‘지배자는 무슬림, 민중은 힌두교’라는 구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인도에 들어선 이슬람 왕조들은 유화 정책을 취하며 대다수가 힌두교도였던 민중과 공존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슬람 황제는 힌두교의 유력 집안에서 왕비를 맞이하기도 했다. 무굴 제국의 제 6대 아우랑제브 황제(타지마할을 만든 샤 자한 황제의 아들)는 이슬람 이외의 종교에 대해 엄격한 정책을 펼쳤지만, 지방과 일반인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네루
인도 초대 총리 네루가 독립기념식 행사에 참석했다.(사진= Gustakhimaaf)

 


무굴 제국 시기 이슬람교는 인도 사회에 깊이 파고들어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특히 세계 5대 종교 중 하나인 시크교는 힌두 문화 바탕 위에 이슬람교의 유일신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지금도 시크교도가 쓰는 터번을 인도 남성의 상징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한편, 무굴 제국의 지배자들은 인도인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힌디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을 혼합하여 우루두어를 만들었는데 오늘날에도 인도에서는 22번째, 파키스탄에서는 유일한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건축에서는 타지마할과 같은 뛰어난 작품이 나타났다. 타지마할은 이슬람 사원 양식에 연꽃 무늬를 비롯한 인도 힌두 문화가 잘 조화된 인도·이슬람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 종교 갈등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은 영국

대항해 시대(15~18세기)를 거치며 유럽 국가들은 아시아 지역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15 세기 말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인도 아대륙(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이 있는 지역)에 진출했다. 17 세기 후반, 영국과 프랑스가 인도를 둘러싼 플라시 전투(1757년)가 벌어졌고 영국이 승리하게 된다.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설립해 식민 지배에 들어간다. 동인도 회사는 이름은 ‘회사’지만 지금의 회사와는 달리 무기와 군인을 갖춘 군대와 같은 회사였다.

그리고 무력에 의해 식민지화 된 인도는 영국을 위한 면화와 차, 중국 판매용 아편 등의 생산에 강제 동원된다. 동인도 회사는 영국 면제품을 인도에 대량으로 판매하게 되었다. 값싼 제품이 들어오며 인도 수공업자들은 큰 타격을 받았고, 영국 동인도 회사가 농촌에서 직접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하며 지역 경제는 황폐화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종종 대기근이 발생했고, 영국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커져만 갔다. 특히 1877년에 발생한 대기근으로 약 500만 명이 아사했다. 이러한 민중의 불만은 1857년 인도 용병인 세포이들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영국은 반란을 철저히 진압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명맥만 이어오던 무굴 제국은 멸망하고, 동인도회사는 폐지되었다. 1877년 본격적으로 영국은 인도제국을 세워 직접 인도를 통치하게 된다.

영국은 다양한 방법으로 인도 국민들의 분열을 야기하는 통치 기법을 사용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종교에 의한 분열도 포함되어 있다. 그 결과, 원래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던 힌두교와 이슬람교는 대립을 시작했고 이것이 오늘날 갈등의 씨앗으로 남아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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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화 되는 힌두교, 반발하는 이슬람

식민지 시대 인도는 정치행적학적으로 영국령 인도(인도제국)와 인도 번왕국(토후국) 등 2개의 통치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영국은 주요지역은 직접 통치했고,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는 ‘번왕국’을 통해 일부 내정권을 인정하고 이를 감독하는 주재관을 파견해 통치했다. 특히 번 왕국을 통해 인도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서로 대립하도록 조장하는 한편 종교적 측면에서는 국민의 불만이 자신들에게 향하지 않게 하기 위해 힌두교와 이슬람교 신자들이 서로 대립하도록 유도했다.

힌두교는 원래 다른 종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하다. 힌두교 신 만해도 3억 8000만이 넘고 심지어 부처님도 힌두교 신중의 하나라고 여긴다. 이런 개방성과 관대함 때문에 서양 문화와 영어 교육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서구화되어가는 인도 사회에서 힌두교도들은 의사 · 변호사 · 공무원 등은 지도층에 편입될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다.

반면 무슬림들은 서양 문화에 대해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때문에 힌두교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게 된다. 영국 지배 전에도 지배층이었던 무슬림들은 소수였다. 하지만 영국 통치자들에 의해 소수 통치자였던 무슬림들은 몰락하고 사회적인 성공도 어렵게 되었다. 무슬림들은 “우리는 차별 받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자신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힌두교도들에 대한 반발과 증오심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간디
간디
이에 힌두교와 이슬람은 융화를 통해 인도 독립을 쟁취하려 한 시도가 있었는데, 바로 힌두교 신자였던 마하트마 간디가 이끌었던 ‘비폭력·불복종’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미 양 종교간 대립은 뿌리가 깊었고 간디의 뜻과는 달리 인도 각 지역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했다. 약 1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대립은 더욱더 심화된다. 

간디를 암살한 것은 과격한 힌두교도였다. 영국은 인도의 독립을 방해하기 위한 묘안을 짜냈다. 평등과 갈등 조정을 내세워 인도제국 국회에 힌두교와 이슬람교, 기타 종교, 그리고 불가촉 천민 등에게 의석을 할당하는 제도를 시행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종교 문제를 고착화 시킬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을 가진 간디는 무기한 단식을 통해 저항하게 된다.

영국은 또 2차 세계 대전 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무슬림들이 다수 거주하는 파키스탄을 분리시킴으로써 문제 해결을 도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힌두교들과 인도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간디는 파키스탄과 인도 분리에 크게 반대했고, 심지어 인도 독립 기념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무슬림이 거주하는 지역을 방문해 힌두교와의 화해를 설파했다. 하지만 “무슬림을 너무 관용적으로 대한다”며 불만을 품은 과격 힌두교도에 의해 간디는 암살된다. 이를 계기로 인도와 파키스탄은 뜻하지 않게 급속히 갈등 국면으로 들어서게 된다.

권기철 기자 speck007@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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