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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의 수상 도시 ‘베네치아’ … 모래톱에 올린 환상적 건축물

비잔틴·고딕·르네상스·바로크 전시장 ‘산마르코광장’ … 아름다운 ‘탄식의 다리’

입력 2017-09-1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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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에서 바라본 두칼레궁전과 산마르코성당의 종탑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물의 도시’, ‘수상도시’로 불린다. 필자는 막연히 해변을 중심으로 몇 개의 섬들이 이어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베네치아만(灣) 안쪽의 석호(潟湖, Lagoon)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섬이라는 게 실은 우리나라 다도해처럼 띄엄띄엄 놓인 게 아니라 다닥다닥 붙어 있되 격리된 사주(砂洲, 모래톱)가 무리지어 있는 것이었다. 좁게는 수 m, 넓게는 수십 m, 아주 넓게는 100여 m 간격을 두고 놓여진 섬을 돌로 된 무지개다리가 잇고 있었다. 모래톱 위에 도시가 형성됐으니 지반이 약하고 염도가 높은 지하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거대한 섬 군락 위에 험란한 공정을 거쳐 휘황찬란한 건축물을 일궈냈으니 가히 섬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일 만하다.


베네치아(Venezia)는 이탈리아 동북부에 위치한 베네토주(Veneto Region)의 주도로 영어 이름은 베니스(Venice)다. 본래 뻘밭이었으나 567년 이민족(훈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석호 안 모래톱 위에 도시를 건설했다. 뻘밭에 나무기둥을 박고 돌·벽돌·흙으로 축대를 쌓아 올린 기반 위에 도시를 조성했다. 이른 바 배적임수(背敵臨水)의 입지다. 몽고군이 쳐들어오자 강화도로 옮겨 저항한 고려인의 절박감이 느껴진다.


6세기 말에 이미 리알토섬을 중심으로 12개 섬에 취락이 형성됐다. 리알토는 이후 베네치아 산업의 심장부 역할을 했다. 아라비아 숫자 ‘2’처럼 중심을 관통하는 대운하만이 그나마 베네치아가 섬의 군락임을 재인식시켜줄 뿐이다.


패키지관광에선 대체로 뭍과 베네치아 섬 군락을 연결하는 길이 3850m의 유일한 연륙교인 자유교(Ponte della Lieberta)를 건너 여객선터미널에 내려 배를 타고 베네치아 서쪽에서 남쪽으로 C자 모양으로 감아돌아 산마르코성당, 산마르코광장, 두칼레궁전, 탄식의 다리 등이 있는 곳(약칭 본섬)을 둘러보고 수상택시를 타고 대운하를 남에서 북으로 거슬러 올라 여객선터미널로 돌아오는 루트를 택한다. 시간과 비용의 여유가 있는 여행객이라면 도보로 하루이틀 베네치아의 여러 섬들을 잇는 다리를 건너며 몽환에 잠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여름 베네치아에선 과도하게 몰려드는 관광객 때문에 이 곳 시민들이 이탈리아 정부에 여행객 제한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를 감안하면 베네치아 곳곳을 둘러보는 것은 “나에겐 ‘로망스’일지언정 그들에겐 ‘불청의 민폐’”가 될 것이다. 베네치아는 근래에 지구 온난화에 의한 지반침하와 주민·관광객들에 의한 석호 오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낮에는 화사하지만 밤에는 음울한 분위기가 풍겨나온다고도 한다. 주민의 삶의 터전이라기보다는 관광객에 의해 철저히 이용되어지는 곳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하지만 관광수입 감소를 우려하는 이탈리아 정부가 베네치아 여행객을 급격하게 제한할 것 같지는 않다.


본섬을 향하는 여객선 선상에서 보니 양안에 오래된 유서 깊은 건물이 즐비하다. 재력가나 유명인의 별장, 미술관이 상당수인데 개별 선착장을 갖춰놨다. 오래된 성당과 궁전, 관공서도 즐비하다. 본섬 남측 맞은 편에 산타마리아델라살루테성당(동쪽부터 서쪽으로), 페기구겐하임미술관, 아카데미아미술관이 도열해 있다. 이보다 남쪽으로 더 떨어진 산조르지오섬엔 산조르지오마조레성당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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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에서 바라본 산타마리아살루테성당


산타마리아델라살루테성당은 안성기 씨가 커피광고를 찍을 때 배경으로 나온 곳이다. 1630년 페스트가 돌았을 때 베네치아 시민의 약 20%인 4만7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 살아남은 사람이 성모 마리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56년에 걸쳐 지은 게 이 성당이다. 팔각형 기단 위에 세운 하늘색 돔이 아름답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커다란 돔이라고 한다.


페기구겐하임미술관에선 샤갈, 달리, 칸딘스키 등 현대미술 거장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아카데미아미술관은 베네치아 화파의 대표적 작품을 모아놓은 곳이다. 폭풍우 치는 날 들판에서 가슴을 드러내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와 이를 지켜보는 남자를 그린 조르지오네의 대표작 ‘폭풍’을 비롯해 틴토레토, 카르파치오, 만테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욕심을 낸다면 레이스장식을 특산품으로 내세우는 부라노섬(본섬 동북쪽), 유리세공업으로 유명한 무라노섬(본섬 북쪽), 국제영화제 개최지·해수욕장·카지노 등이 들어선 리도섬(본섬 동남쪽) 등을 둘러볼 수도 있을 것이다. 본섬에서 벗어나 여행하려면 수상택시를 타야 한다.


본섬에 내리니 두칼레궁전이 첫 눈에 들어온다. 두칼레궁전은 베네치아 총독이 사용하던 관저이다. 이곳에서 판결을 받은 죄수들이 교도소로 넘어가던 ‘탄식의 다리’도 보인다. 탄식하기엔 너무 어여쁜 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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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칼레궁전과 교도소를 잇는 탄식의 다리


산마르코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과 광장은 꼭 들러봐야 하는 곳이다. 수십 명의 유명 화가들이 이 명소를 자기만의 화풍으로 그려냈다. 마르코는 우리말로 성경을 정리한 ‘마가’ 수호성인이다. 마가의 상징동물은 ‘사자’여서 이 성당 곳곳에는 사자와 관련된 조형물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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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르코광장의 시계탑과 아치형 회랑


9세기 초에 말마로코의 부오노(선량한 이)와 토르첼로의 루스티코(시골뜨기)라는 이름의 두 상인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마가의 유해를 훔쳐 회교도인 이집트인들이 금기시하는 돼지고기 밑에 숨겨 밀반입했다. 이를 안치하기 위해 829~832년에 지은 납골당이 성당의 근간이 됐다.


그러나 976년 반란이 일어나 화재로 교회(납골당)가 불타 버렸다. 1063년부터 소실된 교회 자리에 베네치아의 절정기였던 당시의 경제력을 쏟아부어 약 10년 간에 걸쳐 재건했다. 베네치아는 10세기 말 동부 지중해 지역과의 무역으로 이탈리아의 자유도시(도시공화제) 중에서 가장 부강한 곳으로 성장했다. 이 때부터 대운하 출구 쪽에 지금의 산마르코광장과 대성당, 교회·궁전 등의 기초를 조성했다. 대성당은 동방의 영향을 받은 비잔틴 양식의 전형으로 화려하기 그지 없다. 4개 원형 돔은 비잔틴풍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베네치아 시민은 동방을 침략할 때마다 대성당을 장식할 조상(彫像)·부조(浮彫) 등을 조달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엔 십자군이 성지(이스라엘)는 가지 않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를 함락해 막대한 재화와 보물들을 약탈했고, 이 중 일부가 베네치아로 흘러들어왔다. 청동으로 된 4마리의 청동 말 조각상(Quadriga, 콰드리가, 로마의 전차경주용 4두마차)이 대표적이다. 대성당 내부의 대리석 판석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 깔린 것을 뜯어왔다고 한다.


산마르코광장은 베네치아의 정치·종교·문화의 중심지로 대성당과 16세기에 지어진 정부 청사 건물로 싸여 있다. 아치형의 정부 청사는 지금 아케이드 상가로 쓰인다. 광장 주변은 이탈리아·아랍·비잔틴·고딕·르네상스·바로크 양식 등 각양각색의 건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가 이 곳에서 융합되는 느낌이다. 광장은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찬사를 보냈을 정도로 아름답다. 비에 젖은 야경은 더욱 인상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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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르코광장의 시계탑과 아치형 회랑


광장 북면(대성당 전면의 우측)에 1499년에 완공된 시계탑(Torre dell Orologio)이 보인다. 베니스 상인들이 아라비아와 무역하면서 익힌 아라비아 숫자로 시계를 만들었다는 사연이 전해진다. 시계탑 아래로는 아치형의 통로가 리알토 지구의 상점으로 연결되는데 이 길을 메르체리아(Merceria)라고 부른다.
시계탑의 대각선 방향으로는 1720년에 개업한 유럽 최초의 카페 플로리안(Florian)이 아직 영업 중이다. 나폴레옹, 괴테, 바이런, 카사노바 등이 단골이었다고 한다. 커피 한 잔 값이 식사 한 끼에 버금갈 정도로 비싸다.


광장 한 켠의 산마르코종탑(Campanile di San Marco)에 오르면 도시 전경을 관람할 수 있다. 높이는 98.6m이고, 붉은 벽돌로 쌓은 단순한 구조다. 첨탑 꼭대기에 있는 황금 동상은 대천사 가브리엘을 본뜬 것이다. 종탑은 1514년에 지금의 형태로 완성됐다가 1902년에 붕괴했다. 지반이 약한 데다가 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종탑은 1912년에 재건됐다.


베네치아 여행의 꽃이라는 곤돌라와 수상택시를 연이어 탔다. 곤돌라를 타면 울렁거린다고 하는데 그런 느낌은 별로 없다. 혹자는 뱃사공이 이탈리아민요를 불러주며 운치를 돋운다는데 그런 일도 없었다. 사공은 숙련된 솜씨로 안정하게 노를 저을 뿐이다. 운하 양측의 가옥들은 바닷물에 침식돼 언제라도 붕괴될 것처럼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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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수상가옥을 흐르는 운하와 이를 잇는 다리


곤돌라로 좁은 수로를 지나다보니 마리아 스칼라란 문패가 보였다. 짐작대로 사공은 과거 ‘천의 목소리’로 불린 그리스계 이탈리아 소프라노 가수인 마리아 칼라스(1923~1977)의 별장이었던 곳이라고 확인해줬다. 마릴린 먼로(1926~1962)의 별장도 베네치아에 있었다. 수변에 아름다운 정원이 있어 더욱 고급스럽다고 한다.


매우 빠른 속도로 달리는 대운하 관통 수상택시에선 베네치아 제일의 국립대학인 ‘카포스카리대’(Universita Ca Foscari)와 상권 중심지의 상징이자 가장 유명하고 큰 ‘리알토다리(Ponte di Rialto)’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카메라에 못 담아서 그런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흔히 한국인은 베네치아를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의 무대이자 198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배우 강수연이 ‘씨받이’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으로 기억한다. 베니스의 상인은 15~16세기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베네치아의 시대상과 그 그 성공모델인 유태인에 대한 반감을 반영한 스토리다. 강수연을 시작으로 전도연(칸, 2007년 밀양), 김민희(베를린, 2017년, 밤의 해변에서 혼자) 등 한국 영화배우가 이른 바 3대 영화제의 본상을 모두 수상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로마·피렌체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3대 관광지이다. 제노바(제노아), 나폴리에 이은 3대 상업항구다. 20세기에 접어들어 베네치아 섬 군락에 마주보는 육지쪽(對岸)에 마르게라·메스트레 등 화학·기계 공업지대가 들어섰다. 구시가지는 면적이 좁고, 현대적인 편리한 환경 조성에 한계가 있어 대안부의 도시화가 현저히 진행되고 있다.


베네치아에서 숙박은 쉽지 않다. 비싸기도 하고 유럽 여행객이 몰리는 성수기에는 숙소를 구하지 못해 노숙해야 한다. 숙박할 곳을 오래 전에 예약하거나 베로나, 파도바 등 인근 대도시에 숙소를 구하는 게 현명하다. 몽환의 수상도시를 여유 있게 보면 좋을 텐데 이를 갈망하는 세계인이 너무 많으니 다시 가볼 수 있을지 조바심이 난다.



정종호 기자 healtho@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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