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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패턴이 돼버린 믿음과 침묵 그리고 저마다의 페어리 서클…이제는 말하고 들어야할 때! 연극 ‘사막 속의 흰개미’

[히든콘]['다'리뷰]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개관작인 김광보 연출·황정은 작가의 ‘사막 속의 흰개미’, 도심의 100년 된 고택에서 발견된 페어리 서클과 흰개미 떼의 출몰로 대물림돼 패턴화된 믿음, 청산되지 못하고 망령이 돼버린 부조리
글루밍 성폭력, 미투 열풍, 갑질의 팽배 등을 돌아보게 하는 저마다의 페어리 서클, 이제는 말하고 들어야할 때

입력 2018-11-12 07:00
신문게재 2018-11-12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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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사막 속의 흰개미’(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들 모두가 100년 된 고택 자작나무 아래서 끊임없이 ‘사인’을 보내는 흰개미가 된다. 동시에 곤충학자 에밀리아 피셔(최나라)의 프레젠테이션을 경청하는 참관자가 된다.



세종문화회관이 운영하는 가변형태의 블랙박스 공연장인 S씨어터 개관작 ‘사막 속의 흰개미’(11월 2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는 제때 청산되지 못하고 대물림된 부조리, 영문도 모른 채 “그렇다고 하니까” 식으로 패턴이 돼버린 믿음, 침묵으로 일관되며 곪을 대로 곪아버린 우리 사회의 자화상과도 같다. 

 

사막 속의 흰개미
연극 ‘사막 속의 흰개미’(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아프리카와 호주 사막에서 발견되는 지표면의 둥근 모양, 미스터리한 이 현상은 ‘요정의 원’, 페어리 서클(Fairy Circle)이라고 불린다.

‘사막 속의 흰개미’는 사막에서나 볼 수 있는 미스터리한 현상이 도심의 100년 된 고택에서 발견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10여종이 넘는 흰개미 떼의 출몰로 무너져내릴 위기에 처한 고택과 몰락 직전의 교회집안 그리고 15년 전 그 집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맞물리며 이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부조리극이다.

서울시극단장이기도 한 김광보 연출작으로 2018 서울시극단 정기공연 창작대본 공모전에 당선된 황정은 작가의 작품이다.

곤충학자 에밀리아의 논문 발표회 형식으로 진행되는 극은 표면적으로 환경문제를 논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극은 마을 최초 교회이자 마을 사람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는 대대로 목사집안이 소유한 고택의 미스터리한 현상을 파헤치며 침묵으로 지탱해온 믿음과 이로 인해 청산되지 못하고 망령이 돼 버린 부조리를 고발한다.

가뭄이 극심한 가운데서도 시들지 않은 나무들로 둘러싸인 고택은 힘차게 날개짓 하는 흰개미 떼로 인해 붕괴 직전에 이른 부조리의 온상이다. 극 중 인물들은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각계각층 혹은 다양한 부류를 대표한다.

 

바로 다음날 해결해야 할 교회 내부 문제로 불안정하고 예민한 젊은 목사 공석필(김주완),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한다고 부추기는 어머니 윤현숙(백지원), 세상을 떠났음에도 망령처럼 나타나 석필을 뒤흔드는 아버지 공태식(강신구),  

 

사막속의흰개미_석필(김주완) 현숙(백지원)
연극 ‘사막 속의 흰개미’(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네가 하는 것들 모두 이미 내가 겪었던 일이야!” “이 우물 아버님이 아니라 어머님이 메웠어.”

모든 진실이 밝혀지기 직전 석필을 향한 태식의 일갈, 우물을 메운 사연을 털어놓는 현숙의 자조 섞인 고백은 전대와 그 전대의 아버지, 어머니, 아들로부터 대물림되며 패턴화된 믿음과도 같다.

침묵을 대가로 모든 권리와 죄를 물려받고 괴로워했지만 결국 누리고 있는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패턴을 따른 아들들. 그들은 이전의 아버지들이 그랬듯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는 아버지가 된다. 현숙의 넋두리는 마을사람들이 던져 넣은 비틀려 꺾인 닭목 등으로 핏물이 길러지는 우물을 어쩔 수 없이 메웠다는 시어머니의 자조 섞인 고백을 닮았다.  

 

사막속의흰개미_윤재(한동규) 에밀리아(최나라) 재현(경지은)
연극 ‘사막 속의 흰개미’(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그 패턴화된 믿음을 의심없이 따르는 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이자 교회집사인 노윤재(한동구), 그를 비난하는 듯 보이지만 역시 경험으로 패턴화된 진실에 치우치는 인턴 연구원 서재현(경지은)은 어쩌면 몰락 직전의 고택이 상징하는 역사적 비극의 동조자다. 그 비극을 바로잡으려는 의지를 보이는 이들은 해외입양아인 곤충학자 에밀리아, 거대한 고택 아래 매장돼 버린 진실의 피해자인 임지한(황선화)이다.

해외입양아 에밀리아는 제3자 혹은 관찰자의 시각으로 고택과 페어리 서클 현상을 연구·분석한다. 그 원인을 주도면밀하게 파헤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인물들을 바라보면서도 한국사회의 현실에 발 디딘 당사자이기도 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지한은 15년 전 태식의 만행, 현숙과 석필의 침묵으로 내 몰린 피해자이며 “왜 이제야?”라 반문하는 부정적 시각들 속에서도 사건의 진실을 알리려 애쓰는 인물이다.  

 

사막속의흰개미_지한(황선화)
연극 ‘사막 속의 흰개미’(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극은 15년 전 사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묘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최근 불거진 글루밍 성폭력, 전세계를 아우르는 #미투(#Me Too, 나도 고발한다) 열풍, 재벌가와 중소기업, 벤처기업 등을 막론하는 갑질의 팽배 등 다양한 사회 현상들을 끄집어 내 돌아보게 한다.

특수 장비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나무 아래 흰개미들의 세찬 날개 짓들, 점점 더 거세지는 그 소리들은 듣지 않는다고,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것들이 아니다. 더불어 약물로 박멸해야할 존재가 아닌 환경에 적응해 살아가며 개선하려는 의지의 표출이다.  

 

사막속의흰개미_에밀리아피셔(최나라)
연극 ‘사막 속의 흰개미’(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무너져 버려라”고 악다구니를 치는 지한, “나를 죽여버리라”고 일갈하는 망령 같은 아버지 태식, 급기야 그 소리들을 듣는 아들 석필, 패턴화된 믿음에 일관되게 반응하는 윤재와 재현. 어느 하나가 아니다. 저마다의 페어리 서클의 연대다. 유기적으로 촘촘하게 엮인 모두가 스스로 깨닫고 생각하고 바뀌려는 의지를 다지고 노력해야만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

“소멸된 곳에서 어떤 현상이 발생합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 역시 저마다의 페어리 서클에 달렸다. 이에 실제로 천장부터 쏟아져 내리는 흙들로 붕괴를 예고하는 세상에 “들어보라”고, “말하라”고 종용하는 에밀리아와 지한의 연대는 눈물겹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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