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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그라운드]에세이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피아니스트 백혜선 “좌절에서 배우는 기쁨, 성장 그리고 다음을 준비하는 지금”

입력 2023-02-03 18:30

피아니스트 백혜선
피아니스트 백혜선(사진제공=마스트미디어)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보내면서 정말 영원한 건 없음을 너무 많이 깨달았습니다. 저희 어머니를 포함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보내면서 이 책을 쓰게 됐어요. ‘하루하루가 굉장히 소중한 거구나’를 깊이 깨달았죠.”



피아니스트 백혜선은 30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에세이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출간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동양 남자 피아니스트들이 무대에 오르면 원숭이 구경하듯” 했을 정도로 1990년대 각종 콩쿠르는 백인들의 잔치였다.

“동양 남자도 그런데 여자는 말 할 것도 없죠. 예선만으로도 꽉 차던 경연장이 동양 사람이 오르면 도망가듯 빠져나가요. 5명이나 남아 있을까…나가서 쉬었다가 다음 서양 피아니스트가 연주할 때 다시 들어오는 수모를 겪으면서 콩쿠르를 치렀어요.” 

 

피아니스트 백혜선
피아니스트 백혜선(사진제공=마스트미디어)

30여년 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의 수모는 백혜선에게 ‘두번 다시 러시아를 가지 않겠다’ ‘공산국가도 절대 가지 않는다’ 다짐을 하게 했다. 만 스물여덟,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본선 1차에서 탈락하면서 피아노를 떠날 결심을 하고 식당종업원, 전화 영업 등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런 그의 결심을 깨고 스승 변화경의 성화(?)에 참가한 1994년 차이콥스키콩쿠르에서 백혜선은 “동양 여자가 무슨 피아노를”이라는 혹독한 편견의 시선 속에서 열다섯 미국 유학시절 스스로의 가능성을 입증했던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해 1위 없는 3위에 입상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이후 최연소 서울대 교수 임용, 유수의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홀로 키운 두 아이의 하바드 진학, 여전한 연주활동과 후학양성 행보 등 꽤 성공적이며 안정적으로 보이는 백혜선의 삶도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열셋 소년체전에 출전해 수영 자유형 경북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던 그는 최윤정이라는 동갑내기 선수를 만나면서 좌절의 기쁨을 배웠다. 후일 동생 최윤희와 더불어 ‘아시아의 인어자매’로 불리며 한국 수영의 대들보였던 그 최윤정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부지런히도 반대를 하던 아버지”가 첫 칭찬으로 툭 던진 “이제 정명훈이랑 한 무대 서도 되겠네”라는 꿈을 6년 만에 이룬 백혜선은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비롯해 미국 윌리엄 카펠 국제 콩쿠르,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등에서 입상하며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서울대 최연소 교수로 임용되면서 이슈가 됐던 백혜선은 10년 후 “여기서 끝나면 절대 안된다. 외국에서 승부를 보겠다”며 그 자리를 박차고 2005년 홀연히 미국행을 선택해 다시 한번 화제의 중심에 섰다.

 

동양인 여자 피아니스트에 대한 편견 속에서도 현재 모교인 미국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로 후학을 양성함과 동시에 뉴욕에서 열리는 세계피아니스트들의 축제인 IKIF(International Keyboard Institute & Festival)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6년 연속으로 초청되어 독주회를 가지는 등 활발히 활동 중이다.  

 

피아니스트 백혜선
피아니스트 백혜선(사진제공=마스트미디어)

 

스승 변화경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푸시킨의 시와 함께 “앞으로는 일기 쓸 일이 많을 것”이라며 건넨 일기장에서 시작한 그의 에세이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는 교향곡처럼 4악장으로 이뤄져 있으며 시간 순이 아닌 독립된 에피소드로 다양한 시기를 오간다.

“저는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에요.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스승님들을 너무 잘 만난 케이스죠. 만나는 선생님들마다 저에게 너무 많은 정성을 쏟아주셨거든요. 그런 인연들과 그냥 ‘열심히 노력하니 이런 것들이 저한테 왔습니다’ 라고 쓴 것들이에요.”

좌절에서 기쁨을 배우고 과감한 도전과 노력들로 얻은 차이콥스키 콩쿠르 입상, 최연소 서울대 교수 임용, 런던 심포니, 모스크바 심포니 등 유수의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홀로 키운 두 아이의 하바드 진학, 여전한 연주활동과 후학양성 행보 등 삶 곳곳에 도사리고 있던 적지 않은 좌절의 순간들, 이를 극복하고 도전했던 이야기들이 책 속에 담겨 있다.
 

피아니스트 백혜선
피아니스트 백혜선(사진제공=마스트미디어)

“첫 줄만 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글 솜씨를 가지신 변화경 선생님이 항상 말씀하셨어요. ‘하나를 하더라도 정성을 다 담아서 해야 한다’ ‘연주를 하더라도 감동이 있어야 지 매끈한 건 필요 없다’고. 지금 나오는 세대들의 연주 실력은 너무 대단해요. 유학 온 한국 학생들에게 가장 결여되는 게 상상력이라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는 상상력이 너무 많아요. 학교 교육, 사회생활 등으로 사라져 버린 환상의 세계는 책을 읽으면서 절로 생겨납니다.” 

 

이에 백혜선은 피아니스트이자 그의 스승인 러셀 셔먼이 곡에 대한 감상을 매번 에세이로 써오라고 하고 변화경이 특정 영화를 추천하기도 했던 것처럼 제자들에게 시 읽기를 독려하곤 한다.

조성진, 임윤찬, 김선욱 등 ‘K클래식’이라는 말이 생겨나는가 하면 “국제 콩쿠를 심사위원들은 한국 참가자들을 경계할 정도”로 주목받고 있는 한국 연주자들에 대한 질문에 백혜선은 “정말 대단하다. K팝 같은 붐을 일으키고 있어서 너무 자랑스럽고 그 힘과 기교가 놀랍기도 하다”고 털어놓았다.

“대학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저는 사실 대학생들보다 중학생들이 너무 무섭습니다. 이들이 배우는 속도나 힘과 재능 등은 정말 천재가 아니면 연주를 할 수 없는 시대구나 싶을 정도죠. 그 젊은 세대들의 힘, 기교 등과 저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추구하고 고민하는 것은 연주회를 통해 마음을 울리는 혹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음악을 선사하는 겁니다. 마치 좋은 책을 읽은 것처럼 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요.”

에세이 출간을 계기로 백혜선은 4월 1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의 독주회를 비롯한 국내에서의 연주 활동에도 박차를 가한다. 그는 “연주 뿐 아니라 선생으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어떻게 베풀면서 살아야 할지 고민 중”이라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나눔”이라고 강조했다.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자신만의 것이 쌓일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는 게 제 몫이라고 생각해요. 삶에는 꿈과 그를 향한 고민들을 가진 1기, 직장과도 같은 연주활동, 후학양성의 기회가 주어지며 안정적인 2기, 정년퇴임 같은 3기가 있어요. 평생을 배우면서 살아야하는데 젊은 나이에는 다음, 다 끝난 3기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잊고 너무 바쁘게 살았어요. 저는 지금의 다음을 준비하고 있죠.”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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