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뉴스 전체보기

닫기
더보기닫기

[비바100] 여전히 ‘춤 길’ 위 '깊은 여름' 한국 춤의 대가 김매자 “이 길이 끝날까요?”

[허미선 기자의 컬처스케이프]

입력 2021-06-04 18:00
신문게재 2021-06-04 12면

김매자 명인4
김매자 명인(사진=이철준 기자)

 

“시골 노인네가 농사일을 하다가 막걸리 한잔 걸치고 손을 척하고 올리면 그게 바로 춤이에요. 손끝에는 아무 것도 없어 보여요. 하지만 그 손끝에는 무수한 움직임이 있죠. 손끝에서 떨어지는 삶이 있거든요. 그렇게 우리 춤은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이 전부 들었죠.”



한국 춤의 거장 김매자는 우리 춤에 대해 “힘으로 추는 게 아니라 몸속 에너지로 추는, 춤추면서 내면의 에너지와 기를 만들어내는 춤”이라고 정의했다.

‘춤’ ‘무용’이라는 개념조차 서지 않았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춤에 빠졌던 그는 여성국극에 매료돼 정식으로 무용을 배우기 시작하던 중학시절, 인왕산 국사당에서 벌이는 굿판을 드나들던 대학시절, 새벽 6시면 산에 올라 봉원사 박송암 스님에게 작법(불교의식에서 재를 올릴 때 추는 모든 춤의 총칭)을 배우던 때도 그는 삶이 춤이 되는 순간을 목도하곤 했다.  

 

김매자 명인
70여년을 ‘춤 길’ 위에서 여전히 춤 추고 있는 명인 김매자(사진제공=현대차 정몽구 재단)

 

“(인간문화재) 김천응 선생님이 (김매자가 운영하는 최초의 무용전문 소극장) 포스트극장 무대에서 마지막 춤을 추셨어요. 춘앵무를 추시는데 발 디딤 하나도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 불교 의식무 존재 자체도 몰랐던 시절 창경궁 민속박물관에서 박송암 스님의 춤을 처음 봤을 때도 그랬어요. 나비춤을 턱턱 추고 법고를 탁탁 치는데…꽃에 나비가 살짝 앉았다 튀는 것 같은 경지를 느꼈어요. 전 아직도 남자무용수들이 그 스님처럼 추는 걸 보질 못했어요.”

김매자는 “평생 제를 올리고 춤을 추면서 자연스레 쌓이는 것들이 터져 나오는 순간들이었다”며 “우리 춤은 각자 살아온 자기의 모습대로 호흡이 끊어지지 않도록 연결하고 거기서 몸속의 기를 만드는 길”이라고 표현했다. 그 역시 1976년 창작무용연구회(이하 창무회) 창단, 복합무용전문기관 창무예술원 설립, 무용 전문 소극장 포스트극장 운영, 춤 전문 월간지 ‘몸’ 발행 등으로 여전히 춤추고 연구하며 ‘춤 길’ 위 에 서 있다.


“수행, 한국춤은 수행이에요. 기를 만들어내고 자기화하고 우주 가운데 나를 생각하면서 명상하고 존재하게 하죠.”

 

김매자 '깊은 여름'
김매자 명인전 ‘깊은 여름’(사진제공=현대차 정몽구 재단)

◇가을·겨울 없는 ‘깊은 여름’

“지금까지 한번도 권태기를 가져본 적도 없어요. 춤을 추고 춤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저는 운이 참 좋은 사람이에요. 원하는 걸 할 수 있으니까요. 평생 춤추기를 원했는데 여전히 춤을 추고 있잖아요.”

그는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춤을 추는 동시에 “무용전문지 ‘몸’을 통해 이론적으로 끊임없이 연구하고 소극장에서 젊은 춤꾼들을 실험하게 하고 저 자신도 실험하는 게 아직까지 재밌다”고 말을 보탰다.

권태기도 없는 그의 ‘춤 길’, 전통을 바탕으로 한 ‘이 시대의 한국춤’에 대한 끝없는 연구와 모색의 여정이 ‘깊은 여름’(6월 12, 13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펼쳐진다.

 

현대차 정몽구 재단이 주최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산학협력단이 주관하는 ‘예술세상 마을 프로젝트’ 사업으로 진행하는 세 번째 ‘명인시리즈’다. ‘깊은 여름’은 여전히 ‘춤 길’ 위에 서 있는 김매자의 출생부터 지금까지의 연대기다.

“왜 춤을 추고 있는지, 나 자신조차 나에 대해 물어봐야하는 물음표를 계속 달아가는 공연이에요. 그 물음표에 대한 답을 하라고 내어준 기회가 아닌가 싶어요. 나이로 따지면 끝나는 시점, 종지부를 찍어가는 과정 속에서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스스로에 대해 질문하면서 아직은 내가 할 수 있음을 확인하고 있어요.”

프롤로그 ‘창무이즘’과 ‘길의 탄생’ ‘태생적 무-차이와 반복’ ‘마술적 도포’ ‘깊은 여름’ 4장으로 구성된 작품에 대해 김매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공연”이라고 표현했다.

“가장 강하게 떠오른 기억은 어려서 피란 나오던 얘기예요. 1장 ‘길의 탄생’에서 그려질 내 인생의 시작이죠. 바로 밑 동생을 잃어버리는 순간과 그 동생이 없어서 월남할 수 있었던 아이러니, 얼음이 꽁꽁 언 강을 건너 피란을 나와 이곳저곳을 거쳐 부산에 가서 춤에 입문하던 때, 대학에서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이 길을 택하게 된 계기 등이 담겼죠.” 

 

김매자 명인2
김매자 명인(사진=이철준 기자)

 

2012년 춤 인생을 정리하는 ‘봄날은 간다’라는 작품을 선보였던 그는 ‘깊은 여름’이라는 제목도, ‘명인’이라는 타이틀도 “아직은 어색하기만 하다”고 털어놓았다.

“벌써 여름을 한참 지나 가을 끝자락, 초겨울도 넘어섰는데 ‘깊은 여름’이라는 제목을 지어주셔서 몸둘 바를 몰랐어요. 게다가 대단한 전문가들이 지난해 10월부터 2월까지 저를 연구하고 토론하며 판을 만들어줬죠. 그냥 춤 추는 게 좋아서 췄을 뿐인데 어느새 저도 모르게 ‘춤의 대가’ ‘교수’ ‘무용가’라는 타이틀이 붙었어요. 내가 교수인가? 무용수인가? 계속 물었고 그 타이틀들에 익숙해지는 데도 오래 걸렸죠. 이번 ‘명인’ 타이틀도 어색하고 고맙고…내 몸에 닿기까지 또 오래 걸릴 것 같아요. 더 이상 뭘 하겠어요. 저의 마무리를 이렇게 다들 나서서 도와주니 하루에도 몇 번식 감사하다는 말이 절로 나와요.”

 

 

김매자 명인3
김매자 명인(사진=이철준 기자)

◇우리 춤의 총망라 ‘춤본’


“얼씨구절씨구 장단에 맞춰 춤만 추는 것이 한국 춤이 아니에요. 즉흥성, 자유로움, 해방감 등 한국 춤의 특징을 가지고 어법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가 “전통적이고 문화적인 걸 내 속에 내면화시키면서 좀더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기본기를 만들어보자 마음먹고” 만든 것이 ‘춤본’(1987)이다.

“춤본은 처음 춤을 배우는 사람의 기본 발디딤이 아니라 한국춤의 본질에 대한 연구예요.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전통 문화 발굴이 대대적으로 이뤄졌어요. 하지만 춤은 이론적으로 부실한 상태였어요. 그래서 저와 정병호·한명희·서한범·황병기·최종민 선생이 ‘한국 전통예술에 나타난 한국인의 미의식’이라는 논문을 썼죠.”

그의 전언처럼 “미의식이 뭔지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완성한 논문”을 “무대에서 보여주기 위해 만든 것”이 ‘춤본’이다. 그는 “내 춤 그리고 몸, 자세의 기본은 궁중무용이다. 민속무용은 지역마다 특징이 다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며 “왕 앞에서 하는 궁중무용은 한국인이 가지는 가장 바른 자세”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궁중무용을 기본으로 한 우리나라 전통 무용 전부를 다 담겠다 마음먹었죠. 의욕은 넘쳤지만 막상 해놓고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단지 제가 한 건 구조적 틀을 만들고 명상적 춤으로서 우주적 에너지의 흐름을 느끼는 정도였어요.”

춤본 김매자
‘춤본’에서의 김매자 명인’(사진제공=현대차 정몽구 재단)

 

다시 연구에 몰두에 3년만에 발표한 것이 ‘춤본2’다. 그는 “첫 번째 ‘춤본’이 구조적 틀과 내 몸, 어법에 대한 이야기라면 ‘춤본2’는 우리 춤이 가지는 신명, 내 안에 내재된 것들을 어떻게 풀어갈까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라고 밝혔다.

“한번은 제 춤을 좋아하시는 일본대사님이 ‘일본 춤과 한국 춤의 다른 점’에 대해 물으셨어요. 그때의 답이 한국춤의 특징을 잘 표현하는 것 같아요. 일본 춤은 네모 안에 갇힌 형식을 갖췄다면 한국 춤은 안에서 출발해 밖으로 향하는 동시에 바깥에서 안으로 끌어들이죠. 뭐든 받아들여 내 걸로 만들어 발산시키는 것이 우리 춤이에요. 그 사람을 가장 잘 표현하는 춤이죠.”  

 

그렇게 한국 춤은 추는 사람에 따라,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메시지도, 표현법도 달라지는 유기체와도 같다.



◇지켜야할 우리 춤의 정신, 변화해야 살아 숨쉴 전통

김매자 명인
김매자 명인(사진=이철준 기자)

“자유로움, 즉흥성 등 우리 춤이 가진 특징 중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신명이에요. 한국 춤은 흔히들 정적이다, 한이 많다 하지만 살풀이나 진오기 굿에 국한된 얘기예요. 한과 슬픔, 정적 등이 몸에, 마음에 응어리지고 깊어지다 터지면서 밝음으로 나갈 때 맞닿는 계기, 어둠과 밝음의 충동이 신명이죠.”


우리 춤의 정신 중 지켜야할 것으로 ‘신명’을 꼽은 김매자는 “신나는 음악에 마구잡이로 몸을 흔드는 게 아니라 내면에 담긴 희로애락을 비롯한 모든 걸 풀어낼 때, 밝음으로 갈 때의 충동이 신명”이라고 부연했다.

“우리 춤에 엇모리를 탄다, 장단을 먹는다 등의 표현이 있어요. 한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지는, 미술의 여백같은 거죠. 정적이지만 모든 것이 존재하는 정적. 음과 음 사이를 이어주는 여운들…그 중심은 결국 나이고 내 몸이에요.”

그는 “한국 춤을 안무할 때 방법론적인 기초는 중심 집중적”이라며 “내 몸이 중심이며 대우주 가운데 나는 소우주다. 우주로서 대우주의 기운을 안으로 끌어들이게 하는 것의 내 춤의 시작”이라고 털어놓았다.

“한국 춤 자세 자체가 사방에서 중심을 향해 들어오는 형식이 대부분이에요. 퍼지기보다는 중심을 가지고 안으로 모으죠. 끊어지는 게 아니라 무한한 원을 그리며 가는 거예요. 승무, 살풀이 등 선이 끝나지 않고 무한대로 우주를 연결하고 있거든요. 그 가운데 내가 서 있는 거예요. 모든 것의 연결과 응축이 바로 나죠.”

 

그렇게 우리 춤의 전통, 정신 등을 고수하면서 지금을 담아내는 ‘이 시대의 한국 춤’은 김매자가 평생을 탐구한 것이기도 하다.
 

“전통은 멈춰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시대에 발 맞춰 재창조해 나가야만 전통이 오래 버티고 그 정신을 이어간다고 생각해요.”

 

김매자
여전히 맨발로 무대에 오르는 김매자 명인(사진제공=현대차 정몽구 재단)

 

그가 1970년대 중반부터 맨발로 무대에 오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 생활을 보면 귀족, 양반네들이나 버선을 신지 보통은 맨발이었다”며 “명절이나 예의를 차려야할 어른을 대할 때나 버선을 신었다”고 설명했다.

“유교시대,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우리 춤이 기방으로 들어가 버리면서 귀족화, 양반화되고 그들의 소유물이 돼 버렸죠. 하지만 이전의 우리 민속춤, 놀이, 유희 등은 맨발이었어요. 보편적인 우리 문화죠.” 

 

그렇게 김매자의 맨발은 “변하기 이전 우리 춤의 원형이자 보편성”이다. 의상 역시 비단이 아닌 손수 짠 삼베, 무명 등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SHAO_F2C9802 Resized
김매자 명인은 제자들을 "감사한 존재"라고 표현했다(사진제공=창무회)

“예쁜 의상, 선, 웃음 등이 너무 싫었어요. 저와는 상관없는, 제 감정은 전혀 담기지 않은 것들이었거든요. 제가 살아온 시대는 근대화로 많은 변화를 겪는 시기였어요. 격동기의 급물살을 맞으면서도 예뻐야 하나 싶었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귀족적인 것,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기 위해 변질된 거지 우리 진짜 모습은 그렇지 않아요. 제가 살던 그 당시 환경이 그렇게 귀족적이어야 하는 사회가 아니었거든요.”



◇삶을 담은 종합예술 ‘춤’, 어디서든 여전히 춤추고 있을 ‘나’

 

“이번 ‘깊은 여름’ 공연에서 우리 제자들 인터뷰에 그런 얘기가 나와요. 춤추는 시간보다 안장서 토론하는 시간이 더 많다는. 안무가가 아무리 뛰어나고 아이디어가 아무리 좋아도 혼자서 100%를 채울 수는 없어요.”

안무가와 무용수, 연주자 등의 음악적 요소, 조명·세트 등 무대예술 등 춤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 김매자가 추구하는 ‘춤’이다. 그런 그의 춤을 받아주는 “정말 많은 제자들”은 김매자의 춤 길에서 빼놓을 수 없이 “감사한 존재”들이다.

“아무리 제자들이라도 무용수들에게 억지로 이렇게, 저렇게 춤춰라 하지 않아요. 제가 말하는 걸 그들이 이해해 자기화해야 하거든요. 그들 마음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화되지 않으면 제 춤을 받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 춤의 특징인 자유로움과 즉흥성을 많이 넣으려고 해요. 짜여진 것 같지만 짜여지지 않은 것이 우리 춤이거든요. ”

이어 김매자는 “무용은 삶을 담는 종합예술이고 하나로 모이게는 하는 연결고리를 만든다”며 “춤만 따로 떨어질 수 없다. 무당이 소리를 하고 공수도 내릴 때도, 탈춤의 과장 사이에도 언제나 춤이 있어 힘을 모아주고 응축시킨다”고 말을 보탰다.

 

김매자 명인11
김매자 명인(사진=이철준 기자)

 

“저는 여전히 길 위에 서 있어요. 그 길이라는 게 끝이 있을까요?”

스스로를, 자신의 춤 그리고 삶을 ‘길’이라고 표현한 그는 여전히 “현장이 제일 좋다. 지금도 연습복만 입고 다닌다”며 환하게도 웃는다. 내년 춤 인생 70주년을 맞는 그에게 ‘기념’ 계획에 대해 물으니 진정한 춤꾼다운 답이 돌아온다.

“예전에는 몇주년엔 뭐 해야지 계획도 하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을 안해요.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공간이 허락돼 항상 춤출 수 있으면 그걸로 좋거든요. 게다가 전 지금까지 여전히 춤을 추고 있잖아요.”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기자의 다른기사보기 >

이시각 주요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