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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일제 배불린 '황금어장', 눈물 삼킨 파도만 넘실

[근현대사의 흔적들] ④포항 구룡포

입력 2021-04-27 07:00
신문게재 2021-04-27 13면

 

구룡포 일대는 1900년대 초에 이미 일본인들이 고기떼를 쫒아 물밀듯이 올라왔을 정도로 황금어장이었다. 이곳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은 거액을 들여 방파제를 세우고 바다를 매립하며 구룡포항을 일본의 수산 도시로 만들었다. (사진=남민)

 

◇ 물고기떼 따라와 세운 ‘수탈 도시’ 구룡포

 

일본 가가와현 출신의 하시모토 젠기치, 오카야마현 출신의 도가와 야스부로가 1906년에 8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울산 방어진 앞바다를 거쳐 포항 구룡포로 들어왔다. 그들을 이곳으로 이끈 것은 바로 물고기떼였다. 

 

일본 본섬(혼슈)과 시코쿠 사이의 좁은 세토내해 어장이 포화상태가 되어 살 길이 막막했던 일본 어부들은 때마침 거대한 물고기떼를 만나 끝없는 추격전을 펼친 끝에 이곳 황금어장으로 들어왔다. 물고기가 너무 많아 그대로 그물을 당기면 배가 뒤집혔기에 그물을 찢고 물고기 일부를 쏟아낸 후 끌어 올려야 했을 정도였다.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지점이라 모든 물고기가 몰려와 황금어장을 이뤘던 것이다.

 

조선 어부들의 저항에 처음에는 주춤했던 일본 어부들도 일제가 자국민의 조선 이주 촉진을 위해 구룡포 거주 자국 어민에게만 어업권을 부여하자 앞다퉈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하게 된다. 이 때 조선 황금어장의 수탈에 앞장선 주역이 바로 하시모토와 도가와였다.

 

구룡포에 정착한 일본 어민들은 바닷가 산비탈 험준한 곳에 항구도시를 건설한다. 엄청난 물고기가 도시건설의 재원이 된다. 1913년에는 뒷산에 신사를 지어 일본화를 가속화했고, 1915년엔 일본인 자녀만 다니는 심상소학교를 세워 철저히 일본 도시로 만들었다. 구룡포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1926년에는 182m 길이의 방파제를 축조하고 바다도 매립해 도시확장을 꾀했다.

 

 

칼의 모양을 한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 해방 후 주민들이 비문의 이름들을 시멘트로 덮어버렸다. (사진=남민)

 

조선총독부에서도 실사 측량과 자금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계획적인 바다수탈이 진행된 셈이다. 구룡포는 1930년 우리 국민들이 상상도 할 수 없던 백화점과 병원, 극장, 당구장 등 모든 현대식 기능을 갖춘 도시로 발전했다. 일본인들은 구룡포에 생선 가공공장과 건조장을 짓고 자국에 수출하며 큰 부를 일궜다.

 

일본인들이 지은 신사와 학교는 지금은 모두 없어져 구룡포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이곳을 오르는 계단에는 신사를 지을 때 공헌한 120명의 일본인 이름이 새긴 작은 비석이 있는데, 해방 이후 적개심이 불탔던 주민들이 이름에 시멘트를 바르고 비석도 반대로 돌려 세웠다. 36년 지배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던 셈이다. 그 후 충혼각을 세울 때는 후원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에는 도가와 야스부로 송덕비가 솟아 있다. 주민들이 이 비문에도 시멘트를 발라버려 비문의 내용은 알 수 없다. 송덕비를 유심히 보면 쌓아올린 받침돌은 손잡이, 비석은 칼날로, 전체가 하나의 칼의 모습이라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산 정상은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다. 지금은 철거되어 1956년에 어민들의 풍어와 안전을 위한 용왕당이 지어졌다. 드물게 신사 유물도 남아 있다. 참배 때 손을 씻는 석조물 쵸우즈야가 충혼탑 기단 옆에 있다. 바로 옆에는 포탄 모양의 돌조각도 땅에 꽂혀 있다. 호전적이던 일본인들이 전쟁에 나가면서 승전을 위한 제를 올릴 때 이 포탄 석조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1920년대 당시 고급 자재를 들여와 지은 하시모토 살림집. 전형적인 일본 고급 주택이다. (사진=남민)

 

방조제 맞은편 안쪽 골목으로 들어서면 하시모토가 1920년대 일본에서 고급자재를 들여와 지은 2층 저택이 있다. 일본 고급주택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춘 고급주택이다. 이 집의 특징은 비로부터 바깥창문을 보호하기 위해 이중문을 설치해 필요시 개폐하는 구조를 갖췄다는 점이다. 한국 일본 건축전문가들이 반드시 거쳐간다고 하는 연구 대상 주택이다. 지금은 ‘구룡포근대역사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골목의 이케다유희장은 일제강점기 유희장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1992년 방영)를 촬영한 곳이다. 2층 목조주택인 이 집의 2층 창문틀에는 일본인들이 영산으로 신성시하는 후지산 문양이 작게 조각돼 있다. 대등여관은 구룡포에 오는 사람 누구나 꼭 한 번은 숙박하고 싶어했던 여관이었다고 한다. 1938년에 지은 건물로 지금은 식당으로 바뀌었다.

 

구룡포에서 태어나 자란 당시 이주민 2세들이 조직한 ‘구룡포회’라는 모임이 지금도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가끔 구룡포를 방문한다고 한다. 그들에겐 고향인 셈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여명의 눈동자’ 촬영지. (사진= 남민)

 

◇ 일본인들의 아픔을 간직한 호미곶등대

 

일본이 한반도 땅을 호시탐탐 노리던 1907년 9월 어느 날, 한반도 동해의 해류와 어족분포와 연해수심 등을 조사하던 일본수산강습소 실습선 ‘쾌응환(快應丸)’이 포항 호미곶 구만리 앞바다에서 좌초되어 교관 1명과 학생 3명이 조난 당했다.

 

그런데 일본이 황당하게도 “대한제국의 해안 접안시설이 미비해 사고를 당했다”며 책임배상을 요구했다. 맞대응할 힘이 없었기에 대한제국은 일본의 요구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했다. 일본은 등대 설치를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우리 예산과 노동력으로 이듬해인 1908년 11월에 한반도 지형의 호랑이 꼬리인 이곳에 등대불이 밝혀졌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위해 호미곶을 7번이나 다녀갔다고 한다. 조선 최고의 풍수가 남사고는 이곳을 ‘조선의 명당 중 명당’으로 꼽았다고 한다. 처음 이름은 동외곶등대였다가 이후 장기갑등대, 장기곶등대를 거쳐 지금 이름으로 불리운다. 

 

지금 이 등대는 해맞이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굳이 해맞이가 아니더라도 짙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바다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라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호미곶등대는 수려한 경치와 해맞이 소원을 비는 명소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올 만큼 높이 치솟은 호미곶등대는 높이 26.4m로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가장 높은 등대였다. 흰색 외벽에 그리스신전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고딕양식이다. 적벽돌을 팔각형으로 쌓아 나선형 108개 주물계단으로 6층의 등대에 오르게 된다. 

 

등대 천장에는 대한제국의 황실을 상징하는 문장 오얏꽃이 양각된 이화문(李花紋)이 내려다 본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국화(菊花) 문양으로 가려놓았으나 광복 후 오얏꽃이 다시 빛을 보게 됐다. 등대 앞에 서면 강렬한 수직 상승감에 압도 당한다. 바닥 부위는 넓고 상층부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설계로 안정감이 빼어나다. 

 

참고로 ‘등대’의 공식명칭은 ‘항로표지관리소’다. 흔히 말하는 ‘등대지기’는 ‘항로표지관리원’으로 부르든가 ‘등대원’으로 불러야 한다. ‘등대지기’라는 표현은 비하의 의미가 담겨있어 등대원이 가장 싫어하는 용어다.

 

 

◇ 함께 둘러보면 좋을 포항의 명소

 

▲ 죽도시장 = 횟집만도 200곳에 이르는 동해안 최대 규모 재래시장이다. 활어와 건어물을 비롯한 수산물과 의류, 채소 과일, 가구 등 일상용품점들이 밀집해 있다. 1960년대 해안가 갈대밭 늪지대 노점상으로 출발해 이제 포항시내의 한 부분을 이룬다. 사시사철 싱싱한 횟감이 여행객의 발길을 유혹한다. 겨울철에는 별미 과메기가 입맛을 자극한다.

 

▲ 보경사 = 포항 시내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 있지만 주변의 12폭포와 함께 경치가 뛰어난 1400년 된 고찰이다. 신라 진평왕 때 지명법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8면보경을 연못에 묻고 지은 사찰로 전해 온다. 원진국사비와 승탑, 괘불탱, 적광전 등 귀중한 문화재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 오어사 = 신라 진평왕 때 건립된 사찰이다. 원효대사와 혜공선사가 수도 중 죽은 물고기를 살리는 시합을 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살아나자 서로 ‘내(吾)가 살린 고기(魚)’라 하여 오어사로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자장과 의상대사도 수도한 유서 깊은 사찰로 가을 단풍이 절경이다.

 

 

글·사진=남민 여행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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