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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이름마저 빼앗긴 강… 그곳엔 눈물이 흐른다

[근현대사의 흔적들] ⑤익산 춘포
‘만경강’ 이름에 담긴 ‘식량증산’ 수탈의 상흔

입력 2021-05-04 07:00
신문게재 2021-05-04 13면

 

대장촌 호남평야 전경. 원래 이름은 춘포(春浦), 우리말로 ‘봄개’였으나 일제시대 일본인 대지주 호소카와가 ‘넓은 들’이란 뜻으로 이렇게 이름을 바꿔 불렀다. (사진=남민)

 

◇ 호소카와 총리 할아버지가 수탈한 땅 ‘대장촌’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의 귀족 호소카와 모리다치(細川護立)가 1904년에 익산 춘포 인근 평야 약 2000정보(600만평)를 사들였다. 이어 담양과 광주에도 1000정보의 논을 사들여 호남의 땅을 움켜쥐었다. 춘포(春浦)는 우리말로 ‘봄개’였지만 호소카와는 ‘넓은 들’이란 뜻으로 ‘대장촌(大場村)’이라 고쳐 불렀다.

 

거대 농장주가 된 호소카와는 농장을 대리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일본에 살며 1년에 한 번씩 다녀가곤 했다. 대형 정미소까지 지어 벼를 도정한 후 군산항을 통해 쌀을 가져갔다. 심지어는 춘포에 신사를 지어 자신의 조상에 제를 올리게 하는 등 이 땅에 치욕을 안겼다. 군산항으로 쌀을 실어나를 철길마저도 춘포를 지나가게 할 정도로 당시 그의 정치적 위세는 대단했다.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 권력의 주류에서 밀려나게 되자 구마모토의 인맥들도 그를 따라 한국으로 건너와 농지수탈에 합류했다. 호남평야 일대는 거대한 일본인 농지로 변해갔다.

 

 

100년전에 지은 호소카와 정미소. 도정 공장 연면적이 2056㎡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규모에 하루 40톤의 도정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사진=남민)

 

호소카와는 모든 땅을 조선인에게 소작을 줬다. 당시 소작인이 2132명에 달했다고 하니 딸린 식구까지 포함하면 1만 명이 넘는 조선사람들이 호소카와의 땅에서 먹고 살아야 했다. 직원들 가운데 조선인은 단 두 명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호소카와 모리다치의 손자가 일본 정계에 우뚝 섰다. 1993년 제79대 총리가 된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다. 자민당의 부패와 파벌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창당한 그는 비자민당의 첫 총리가 된다. 취임 첫해 한국을 방문한 그는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과거 일본의 침략에 대해 사과와 유감을 표명했다. 할아버지의 식민지 수탈을 대신 사과한 셈이다.

 

호소카와 가문의 농장이었던 춘포 지역에는 침탈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춘포면사무소 앞쪽의 정미소는 그 규모만 봐도 수탈의 정도를 알 수 있을 정도다. 1914년에 지은 도정공장이 연면적만 2056㎡에 이른다. 100년 전에 지은 이 정미소는 바닥과 지붕을 2중 공법으로 지어 온도와 습도를 유지했다고 한다. 하루 40톤의 엄청난 도정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하니 당시로선 첨단 도정 시설물이었다. 입구의 작은 사무실은 수탈의 회계장부를 썼던 곳이다. 

 

정미소 앞으로 난 골목 100여 미터 앞쪽에는 ‘김성철 가옥’이라 불리는 주임관사 주택이 있다. 1920년대 일식 가옥이다. 또 하나의 호소카와농장 주택인 에토(당시 농업기술자) 가옥도 수리를 거쳐 개인이 살고 있다. 등록문화재(제211호)로 등재된 주택으로, 역사성과 건축사적 의미를 가졌다. 목재 비늘벽을 붙인 2층 일본 기와집으로 다다미방과 도코노마, 발코니 등 일본 특유의 주택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호소카와 농장 관리인 주택. 등록문화재(제211호)로 등재된 2층 주택으로 다다미방, 도코노마 등 일본 특유의 옛 주택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진=남민)

 

◇ 만경강 쥐어짠 일본, 100만 이랑 농토 챙기다

 

힘없는 나라가 땅을 얼마나 처절하게 수탈당했는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익산이다. 땅도 강도 지명도 하나 남김없이 모조리 수탈당했다. 그들은 강이 범람하던 갈대밭 우거진 늪지대까지 거둬갔다. 퇴적층의 비옥한 땅을 찾아낸 것이다. 

 

당시 일제는 뱀처럼 휜 곡류천을 직강화(直江化)하며 제방을 쌓았는데 김제 해안까지 무려 76㎞에 이른다. 갈대밭 늪지대였던 국유지까지 모두 농경지로 바꾸어 손에 넣은 것이다.

 

그런 일본의 야욕은 강 이름까지 바꿔버렸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사탄(沙灘)’이라 지칭했고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사수강(泗水江)’이라고 한 이 강을 일제는 직강화 한 천으로 바꾼 후 1920년대부터 아예 ‘만경강(萬頃江)’이라 불렀다. ‘경(頃)’이 ‘100이랑’을 뜻하는데 ‘100이랑’이 만 개가 있는 강이니 ‘100만 이랑’이라는 뜻이었다. 강 물줄기를 바꾸어 100만 이랑의 땅을 더 만들어 쌀을 가져가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일제는 삼한시대를 포함한 2000년 고도(古都) 익산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마저 없애버렸다. 익주-익산으로 이어져온 고도의 중심인 익산미륵사지 주변 금마면을 해체했다. 만경강 갈대밭 속 작은 마을 ‘솝리(솜리, 속리)’를 한자로 변형시켜 ‘속 리(裡)’자와 ‘마을 리(里)’자를 써 ‘이리(裡里)시’를 탄생시켰다. 그 바람에 외곽의 익산군은 존재감을 잃었다가 1995년 익산군과 이리시가 통합하면서 원래 이름인 익산으로 불리게 됐다.

 

 

익옥수리조합 전경. 당시 일제는 산미증산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의 곡식 등을 무자비하게 수탈해 갔다. (사진=남민)

 

일제는 구한말 나약한 정부를 압박해 산미증식이란 명분하에 수리조합 조례 등을 멋대로 제정해 수탈의 근거를 확보했다. ‘일본 수리왕(水利王)’으로 불리는 후지히로 신타로는 1909년에 만경강과 황등역 일대에 수리조합을 잇따라 창설해 땅의 용도를 바꾸고 편의대로 유린했다. 익옥수리조합은 토지개량과 수리사업을 명분으로 우리 국민에게 과도한 공사비와 수세(水稅)를 거둬가며 농민들을 몰락시킨 대표적인 기관이었다.

 

1930년에 건립된 익옥수리조합 사무실과 창고는 익산시 평화동에 그대로 남아있다. 붉은 벽돌조로 된 2층이지만 옥탑방처럼 생긴 3층 공간도 갖고 있다. 맨사드 지붕의 목조 트러스 기법이 적용된 르네상스 팔라죠 양식의 건물로 등록문화재(제181호)다. 창문은 일본을 상징하는 ‘日(일)’자 모양이고 외벽돌 기둥엔 태평양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횃불 형상이 있다.

 

얼마나 내진설계를 잘 해 놓았는지 이리역 폭발사고 때도 이 건물만큼은 멀쩡했다고 한다. 영화 ‘동주’를 찍은 공간이기도 하다. 일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건물에 비상탈출구를 만들어 놓는 치밀함도 보였다. 건물 뒤편 마당의 삼각형 유리시설물 속에는 익옥수리조합 사무실에서 담장 밖 마을로 도망칠 수 있는 지하터널이 놓여져 있다. 바라보노라면 허탈감을 안겨준다.

 

 

◇ 함께 둘러보면 좋을 익산의 명소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를 기리기 위해 건축된 나바위성당. (사진=남민)

 

▲ 미륵사지 =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서석탑으로 유명하다. 해체 보수했지만 너무 인위적이라 비판이 많다.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무왕 40년(639년)에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 최대 규모 사찰로 관측된다. 석탑 해체보수 과정에서 사리함과 함께 50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됐다. 동탑, 서탑, 중앙 목탑이 각각의 금당을 갖고 있어, 3개의 독립된 가람배치로 주목 받고 있다.

 

▲ 왕궁리유적 = 왕궁과 사찰의 신비가 공존하는 곳이다. 사비(부여)시대 백제의 무왕이 익산에 왕궁을 건설한 유물이 발굴됐다. 무왕은 천도를 고려해 이곳에 왕궁을 짓고 일정 기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왕궁 건물지와 석축 등 시설물들이 발굴됐다. 이후 왕궁을 철거하고 사찰이 건립된 것으로 관측된다. 현재는 왕궁리오층석탑(국보 제 289호)이 남아 있고 왕궁리 유적전시관이 있다.

 

▲ 보석박물관과 화석전시관 = 화려하고 진귀한 보석과 원석 등 11만여 점을 소장한 세계적 수준의 보석박물관이다. 국내 최고의 귀금속 보석 전시판매장인 ‘주얼팰리스’가 개관하면서 국내외 우수업체들이 대거 입점해 있다. 장인들이 빚어내는 고급스럽고 세련된 귀금속을 만나볼 수 있다. 옆에는 화석전시관과 공룡테마공원이 있다.

 

▲ 나바위성당 =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된 김대건 신부를 기리는 성당이다.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고 몰래 귀국하면서 첫발을 내딛은 곳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화산’이라 부른 곳에 위치해 초기에는 화산본당으로 불리다 1989년에 나바위성당으로 바꿔 불렀다.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 양식으로 주목받아 국가문화재 사적(제318호)으로 지정되어 있다. 

 

글·사진=남민 여행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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