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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스케이프] 봉준호도, 베르베르도, DC 짐 리도 매료된 라이브 드로잉 김정기 작가 ② “죽을 때까지 손그림!”

입력 2021-05-07 18:30

김정기 작가
김정기 작가(사진=이철준 기자)

 

“저는 제가 중심입니다. 제게 중심인 걸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게 재밌어요. 제가 다양한 것들을 많이 그리다 보니 누구나 맞닥뜨릴 접점들이 좀 많이 내포돼 있거든요. 일례로 얼마 전에 롯데 부회장님, 어떤 연예인이 제 그림을 보고는 ‘작가님 바이크 타시죠?’라고 물으셨어요. 그렇게 대화가 시작되죠. 보는 분들의 관심, 취향에 따라 그림에서 보여지는 게 달라요. 제 그림 안 소재들이 저도 알고 보는 분들도 아는 접점들이 돼주죠.”



글로벌 ‘라이브 드로잉 마스터’로 자리매김한 김정기 작가가 만화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건 겨우 여섯 살 때였다. 선물로 받은 스케치북 표지의 ‘닥터 슬럼프’ 아라레에 매료돼 꿈을 꾸기 시작했다.

“물고기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 세계관과 그림체가 너무 좋았어요. 선생님께 ‘이런 걸 그리려면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냐?’고 여쭤보니 ‘만화가’라고 답해주셨어요.”

그렇게 만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여섯 살 꼬마는 봉준호 감독, 베르나르 베르베르, DC코믹스의 짐 리,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니오케스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블리자드,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의 프로젝트 그룹 슈퍼M(백현·태민·카이·태용·마크·루카스·텐), 타이거JK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인사들과 협업하며 ‘라이브 드로잉 마스터’로 자리매김한 작가로 성장했다.


◇다소 늦은 유명세, 버틸 수 있는 힘 “그림 습관”
 

김정기 작가
지난달 16일 개막한 국내 첫 개인전 ‘김정기, 디아더사이드’에서 ‘욕망’을 주제로 라이브 프로잉 퍼포먼스 중인 김정기 작가(사진=이철준 기자)
“6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진 건 11, 12년 정도 밖에 안됐어요. 하지만 어느 한순간도 그림 그리기를 멈췄던 적이 없어요.”

국내 최초 개인전 ‘김정기, 디아더사이드’(Ki, Junggi, The Other Side, 7월 11일까지 롯데뮤지엄)에서도 주 5일 이상 ‘욕망’을 주제로 한 라이브 드로잉 퍼포먼스 중인 그가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11년 부천국제문화축제에서 선보인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다’였다.

3면에 종이를 붙이고 3일 동안 흰 종이에 관심사, 공간들, 동물들, 기계류 등의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캠코더로 찍어 유튜브에 공유한 영상이 기폭제가 됐다. 그의 첫 라이브 드로잉이었다. 이를 통해 대중들의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 퍼포먼스 작가로 해외 초청과 섭외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입시강사로 유명했어요. 만화 쪽으로는 전국에서 몸값이 제일 비쌌을 정도죠. 프로페셔널로서의 첫 걸음은 KT에서 발간하던 ‘나’라는 계간지에 실린 6쪽짜리 만화였어요. 그때는 잘 그려야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좀 딱딱했죠.”

그 후 동물을 의인화해 경영에 대해 풀어낸 네이버 웹툰 ‘TLT’(Tiger Long Tail) 등 오래도록 그림을 그렸지만 다소 늦게 빛을 본 김정기 작가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원동력에 대해 “그림을 그리면 생계도 어렵고 고생도 많이 한다고들 하는 데 저는 그런 적이 없었다”며 “운이 좋아 굴곡도 없었고 먹고사는 게 어려운 적도 별로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이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오래도록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원동력이자 다작인 이유이기도 했다.

“큰 고난도, 어려움도 없이 그냥 평범하게 살아왔어요. 그게 원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그림 쪽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어요. 학원강사로서 학생들에게 시범을 보여야 하고 의뢰받은 일도 그림이고…그림을 놔 본 적이 없으니 다작일 수밖에 없죠. 언제부턴가는 그림이 습관화됐어요. 전화하면서 그리고, 커피숍에서도 그리고…앉으면 습관적으로 식탁보, 냅킨 등에 계속 그려요. 왜 그리는지도 모르고 그리죠.”


◇나를 작가로 키운 김용환, 오모토 가츠히로, 토리야마 아키라, 존 싱어 사전트, 노만 록웰…

김정기 작가
김정기 작가(사진=이철준 기자)

 

“어려서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한국전래동화집에서 처음 본 김용환 선생님 그림을 너무 좋아했어요. 저희 집엔 그 전집이 없어서 유치원때부터 초등학교 1, 2학년 때까지는 매일을 옆집에서 살았어요.”

그렇게 심취했던 김용환의 그림체는 김정기 작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김용환은 해방 전후 선보인 시사만화의 주인공 캐릭터인 ‘코주부’로 유명한 한국 만화계·일러스트계의 거장이다.

“김용환 선생님의 자료, 책 등을 많이 가지고 있고 연구도 엄청 했어요. 더불어 선물받은 스케치북 표지 그림의 작가로 제게 꿈을 가지게 한 ‘드래곤볼’ ‘닥터 슬럼프’ 등의 토리야마 아키라, ‘아키라’ 등의 오토모 가츠히로, 유럽만화, 미국만화 그리고 대학에서 전공한 서양미술 작가 등의 영향을 받았어요.” 

 

김정기 작가
김정기 작가(사진=이철준 기자)
그는 오토모 가츠히로의 만화 ‘아키라’를 처음 봤을 때를 “충격”으로 표현했다. 김정기 작가는 “토리야마 아키 작품에 빠져들어 만화로 출발했지만 마냥 예쁘고 아기자기한 그림보다는 사실적인 걸 베이스로 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렇다고 너무 사실적인 것도 싫었어요. 사실적인 것을 바탕으로 만화적인 것들을 그리고 싶어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엘 갔는데 제가 너무 원하는 그림체의 작품을 봤는데 그게 ‘아키라’였어요. ‘내가 하려고 했는데 왜 나보다 먼저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충격을 받았죠.”

그렇게 고등학교 때까지 일본만화가 전부인 줄 알았던 그는 대학에서 ‘헤비메탈’이라는 만화잡지를 보면서 그야 말로 ‘신세계’를 접했다.

“우리가 알던 만화가 아니었어요. 특히 유럽 작가들의 작품들은 한컷 한컷이 예술이었어요. ‘이렇게 예술처럼 만화를 그리기도 하는구나’ 감탄하며 영향을 받고 미국 만화도 알게 되면서 대륙이 섞여 버렸죠. 대학에서 서양미술을 전공하면서 알게 된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노만 록웰(Norman Rockwell) 등의 영향도 많이 받았어요.”

작업이 잘 안풀릴 때면 “지금도 노만 록웰의 그림을 보게 된다”는 김정기 작가의 작품세계는 가장 한국적인 김용환 화백을 비롯해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오토모 아키라, 충격에 가까웠던 오토모 가츠히로, 만화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일깨운 유럽만화들, 기본기가 돼준 서양화가 존 싱어 사잔트, 노만 록웰 등 대륙과 장르를 아우르면서 구축됐다.

“지금도 호랑이 발, 자연물 등과 부드럽게 쓰는 선들 등은 김용환 선생님께 영향을 받았어요. 멀리 있는 건물의 층수까지 계산해서 그리는 오토모 가츠히로에게서는 집요함을, 토리야마 아키라에게서는 아기자기함과 귀여움을, 한컷 한컷을 작살내버리겠다는 마음으로 그리는 유럽만화의 장신정신과 끈기에서는 장인정신을 배웠어요. 노만 록웰은 연출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글 없이 그림만으로도 무슨 상황이고 어떤 대화를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게 하고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음을 배웠거든요.”


◇봉준호, 베르베르, DC코믹스, 마블, 블리자드, SM 등과의 협업…꼼꼼하거나 자유롭거나

김정기 디아더 사이드
라이브 드로잉의 대가 김정기 국내 첫 개인전 ‘김정기, 디인사이드’ 중 ‘기생충’(사진=허미선 기자)

 

“의뢰한 측이 원하는 내용 등을 사전 회의, 자료들로 공유받고 조합해서 만들어내요. 초반에는 그게 스트레스였죠. 제 눈높이에 맞춰서만 그림을 그리다가 다른 사람이 원하는 데 맞춰 그리는 자체가 좀 어려웠어요. 수정도 그렇고.”

그렇게 협업 혹은 의뢰받은 받은 그림을 그리기도, 의뢰한 측의 수정 요구도 “마냥 어렵기만 했다”는 김정기 작가는 “이골도 생기고 맞춰서 그릴 수 있게 되면서 조금씩 프로페셔널의 세계에 진입했다.” 그렇게 봉준호 감독, 베르나르 베르베르, 블리자드, SM엔터테인먼트 등 대단한 인물, 기업들과 협업에도 익숙해진 그는 “다들 창작자들이다 보니 저마다의 기준들이 있다”고 밝혔다.

“어떤 분은 꼼꼼하고 어떤 분은 제 뜻대로 하도록 풀어놔주시고 어떤 분은 토씨 하나도 달라지면 안된다고 하시기도 하는데 다 맞춰 드립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선생님은 오래 전부터 알아왔어요. 자신의 작품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셔서 살 하나 덧붙이는 것도 안좋아하시죠. 언젠가는 자신의 작품을 제가 만화화해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곤 하세요. 저도 너무 하고 싶은데 이미 잡혀 있는 스케줄이 너무 많아요.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품의 만화화) 그건 꼼짝 말고 10년은 해야 해서 스케줄을 조율 중이죠.” 

 

김정기 작가
김정기 작가(사진=이철준 기자)

 

일상과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을 시작하는 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걸 그려야 하는 협업이다. 그렇게 “잘 모르거나 소화되지 않는 내용들을 그리느라” 어려우면서도 인상적이었던 작업 중 하나가 2014년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전시회의 ‘위안부 피해자 특별전-지지않는 꽃’에서 선보인 ‘꼬인 매듭’이다.

“처음 의뢰를 받았을 때는 너무 힘들었어요. 정서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제가 하는 지식 수준이 많지도, 깊지도 않았거든요. 게다가 정치적·종교적 성향의 작업은 하고 싶지 않은 제 기준에도 벗어나 있었죠.”

그렇게 몇 번을 고사하다 그린 ‘꼬인 매듭’에는 한국은 물론 일본, 전세계 이목이 집중됐다. 당시를 김정기 작가는 “NHK에서는 촬영도 나왔었다”며 “숙제검사를 맡는 기분”이었다고 토로했다.

“평소라면 4시간이면 끝났을 작업이 5시간이 넘게 걸렸어요. 손에 땀도 엄청 나고…그때 기억이 지금도 많이 나요. 이슈도 많이 되고 일본에서 방해도 많이 했지만 뜻깊었고 결과적으로 괜찮은 그림이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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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6일 개막한 국내 첫 개인전 ‘김정기, 디아더사이드’ 중 슈퍼M ‘호랑이’ 뮤직비디오(사진=허미선 기자)

 

‘꼬인 매듭’만큼이나 어려웠던 협업이 SM 프로젝트 그룹 슈퍼M의 ‘타이거’ 뮤직비디오 그리고 블리자드사와 라이엇 등의 게임을 소재로 한 작업이다.

“솔직히 전 아이돌그룹에 대해 잘 몰라요. 제 플레이리스트에 아이돌그룹 노래는 한곡도 없을 정도죠. 처음 슈퍼M 뮤직비디오 의뢰를 받았을 때는 좋으면서도 당황했어요. 그러면서도 좀 떨렸죠. 닮게 그려야 한다는데 지금까지 전 그렇게 잘생긴 사람들을 그려본 적이 별로 없어요. 게다가 잘못 그렸을 때 팬들의 원성을 생각하니 위안부(꼬인 매듭) 작업을 할 때만큼이나 손에 땀이 났어요.”

이어 김정기 작가는 “같은 맥락에서 게임회사 일도 힘들다. 협업을 하면서 블리자드 본사도 방문하고 라이엇엔 제 그림도 걸려 있지만 저는 게임을 일절하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는 분야”라며 “캐릭터도 닮게 그려야 해서 시간도 오래 걸린다”고 털어놓았다.

“사람 하나를 그리는 데 5~10분이면 되지만 게임캐릭터는 1시간 넘게 그리기도 해요. 게다가 게임은 잘 모르면 금방 들통 나고 마는 분야잖아요. 자료들을 보내주시지만 자칫 오해하거나 이해가 어려운 캐릭터 간 관계, 세계관 등을 파악하기 위해 그 게임을 잘하는 제자들를 동원해요. 잘 모르긴 하지만 그 안의 소스는 언제나 공부 중이에요. 캐릭터디자인 등 그 소스들은 저도 너무 좋아하는 분야거든요.”


◇극과 극의 공존 “내 미래는 마지막까지 손으로 그림 그리기!”
 

김정기 작가
김정기 작가(사진=이철준 기자)
“처음 라이브 드로잉을 할 때는 선 하나만 잘못 그려도 스트레스였어요. 그걸 생각하느라 다른 생각이 안날 정도였죠. 하지만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우리 인생처럼 느꼈졌어요. 인생도 계획대로 안되잖아요. 틀어지면 다시 방향을 바꿔 멀리 돌아가기도 하고…어떤 때는 더 좋은 얘기가 나오기도 해요.”

다양한 대륙과 장르를 오가는가 하면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깨달음을 얻기도 하면서 구축한 작품세계에서 김정기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재미”다. 그는 “그리는 사람의 재미가 가장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언제나 그릴 때는 어린 시절 달력 뒷장에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이 그리고 싶던 걸 그리던 때처럼 해요. 그러면서 선도 자유로워지고 생각도 넓어지고 했던 것 같아요. 물론 다른 사람들의 평가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제가 재미없으면 안그려요. 의뢰를 받아도 언제나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죠. 언제나 그림 생각 뿐이에요. 잠자기 전에도, 운전하면서도 ‘내일은 이렇게 그려야지’ ‘수정은 이렇게 해야지’ 등을 늘 생각하죠.”

그는 “안맞는 것들이 어울리는 걸 좋아한다”며 “뾰족함과 부드러움, 찬 것와 뜨거운 것 등 이질감 있는 걸 같이 배치해 확대시키는 걸 좋아한다”고 밝혔다.

“특히 꾸준히 좋아하는 건 미래와 과거를 섞는 거예요. 한 공간 안에 시간 흐름, 사건의 흐름, 미래적인 것과 과거의 사건 등을 같이 넣죠. 태어나면서부터 중요한 사건들, 미래까지 한 사람의 인생들 다 넣을 수 있어요.”

그리곤 “예를 들어 ‘건강’이 주제라면 어떤 때 다치고 대장암 선고에 큰 수술을 받는 등의 사건들을 굵직굵직하게 나눠 그리고 사이사이에 다른 이야기들로 엮는다”고 설명했다.

“이 사람이 다쳤을 대의 상처, 수술 흉터 등을 다른 인생과 엮어서 그리고 미래는 장기복제시대가 오거나 로봇으로 대체돼 생활을 영위하는 등 상상을 하죠. 제 미래요? 저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 같아요. 죽을 때까지 디지털로는 안 그릴 거예요. 손 느낌이 너무 좋거든요. 그렇게 꾸준히, 손으로 그릴 거예요.”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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