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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눈물 젖은 그곳에도 사랑은 있었다

[근현대사의 흔적들] ⑨목포
통한의 목포의 눈물, 그리고 국경을 넘는 사랑의 눈물

입력 2021-06-01 07:00
신문게재 2021-06-01 13면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에도 등장하는 유달산 노적봉.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이다. 사진=남민

  

◇ ‘가수의 여왕’ 이난영도 쏟아버린 ‘목포의 눈물’

 

19살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노적봉 밑에…’ 라는, 뜻도 문맥도 알 수 없는 가사 때문이었다. 원래는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였다. ‘300년 전 임진왜란의 원한을 품은’이란 뜻인데, 일제가 발음이 비슷한 엉뚱한 가사로 바꿔 부르게 한 것이다. 일제에 의한 대표적인 ‘가요 수탈’이었다. 

 

유달산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이다. 둥글게 솟은 노적봉 바위에 이엉을 둘러치니 바다에서 바라본 왜적들이 조선의 군사가 엄청나게 많다며 겁을 먹고 퇴각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노적(露積)은 곡식을 수북이 쌓아둔 모습을 말하는데 저렇게 큰 노적이 있다면 얼마나 많은 군사가 있을까 하며 두려워했던 것이다. 임란이 끝나고 300년 후 또다시 맞은 일제강점기에 원한을 품은 가사였으니 일제가 발끈한 것이다.

 

 

목포 이난영 생가터의 이난영 여사상. 사진= 남민

 

당시 조선일보사가 일제 탄압에 억눌린 민족 정서를 북돋기 위해 공모한 전국 향토 노래 가사 대회에서 1등상을 탄 목포 사람 문일석의 가사에 이난영이 노래를 불러 공전의 히트를 쳤다. 하지만 일본 형사가 레코드 회사와 작곡가 등을 소환해 조사했고 작곡가 손목인 선생은 “‘삼백연 원안풍은’이란 말이 맞다”고 얘기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목포에서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엔 빼앗긴 조국에 대한 망향가였고, 해방 이후엔 정권에 항거하는 투쟁가, 나아가 해태 타이거즈 응원가로도 애창됐다. 목포 유달산에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있다. 대중가요비로는 최초다. 목포시는 노래비를 세우고 나서 국적불명의 노래가사도 원래 대로 수정해 다시 세웠다. 현장엔 구성진 이난영의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양동 작은 생가 터에는 흉상이 건립돼 있다. 장삼학도에는 ‘난영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난영의 수목장이 있는 곳이다.

 

 

영사관 건물 뒤로 일제가 공습에 대비해 파 놓은 방공호. 사진= 남민

 

한반도 남서쪽 끝인 목포는 부산과 함께 일본의 대륙 진출 전초기지였다. 때문에 일제는 1900년에 이미 영사관 건물을 목포 최고 요지에 우람하게 지어 위세를 과시했다. 아픈 역사의 흔적이지만 목포에서는 가장 오래된 근대건축물이라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현재는 ‘목포 근대역사관 1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건물 뒤에는 일제가 공습에 대비해 파 놓은 방공호도 있다. 들어가 둘러보면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조계지였던 거리로 내려오면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 있다. 토지를 매수해 높은 소작료를 받고 한국인에게 다시 임대해 주는 역할을 도맡았던 기관이다. 건물은 1921년에 건축한 것으로 전해진다. 부속건물은 모두 철거됐고 장방형의 2층 석조 본 건물이 남아 있다. 외벽 양각 장식과 출입문의 석조 아치 현관 등이 눈길을 끈다. 지금은 ‘목포 근대역사관 2관’으로 운용되고 있다.

 

 

◇ 일제강점기 ‘국경 넘은 사랑’ 베푼 다우치 치즈코

 

1919년 3.1 독립운동 직후 7살 어린 소녀 다우치 치즈코(田內千鶴子)가 목포로 들어왔다. 조선총독부 관리인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온 것이다. 이 땅에서 성장한 다우치는 정명여학교의 음악교사로 재직하던 어느 날, 은사 다카오(高尾) 선생으로부터 목포 고아원인 공생원(共生園)에서의 봉사활동을 권유받는다. 한국 고아들에게 웃음을 되찾아 주자는 생각, 조선총독부 관리인 아버지의 악행을 속죄하는 심정에 다우치는 주저 없이 응했다.

 

그곳에서 함평 청년 윤치호(尹致浩)를 만난다. 윤치호는 1928년 19살 때 목포의 냇가 다리 밑에서 7명의 고아를 발견하고 그들과 움막을 짓고 함께 생활을 시작했다. 이것이 공생원 역사의 시작이다. 파평 윤씨의 종손인 윤치호는 신학을 공부한 전도사였으나 공생원을 시작하면서 국내 사회복지사의 선구자가 된다. 입소문이 나면서 고아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어느 새 ‘거지대장’으로 불렸다.

 

 

윤치호와 다우치 부부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담은 공생원. 국내 사회복지 역사의 상징이다. 사진= 남민

 

1938년 다우치는 윤치호에게 먼저 프러포즈를 한다. 결혼과 동시에 이름을 한국식으로 바꾸고, 남편 성과 자신의 이름 중 두 글자를 한국식 발음으로 고쳐 이름도 ‘윤학자(尹鶴子)’로 바꾸었다. 하지만 광복 후 한때 친일파로 몰려 하는 수 없이 자녀들과 일본으로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곧바로 남편과 공생원 아이들을 찾아 다시 돌아온다. 얼마 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광주로 식량을 구하러 갔던 남편은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고아들을 떠맡은 그녀는 자신의 오르간과 기모노 등 팔 수 있는 물건은 모두 내다 팔아 식량을 조달했다. 고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목포시는 1965년에 제1회 목포시민상을 제정하면서 윤학자 여사를 첫 수상자로 뽑았다. 대한민국 정부도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외국인 출신 여성인 윤학자 여사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일본정부도 남수포장, 훈5등보관장 등을 수여했다. 1968년 10월 31일에 윤 여사가 사망하자 장례식장에는 3만 명의 목포시민과 전남 각지에서 몰려온 애도의 물결이 식장에 가득했다. 당시 언론은 ‘목포가 흐느껴 울었다’고 보도했다. 무엇 때문에 일본 여성의 죽음에 3만 명의 시민이 달려와 울음을 터뜨려야 했을까?

 

‘고아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던 바람대로 목포 유달산 남쪽 기슭의 공생원은 지금까지 4000명이 넘는 고아들에게 새로운 삶을 찾아 주었다. 공생원이 존재한 이유이다. 이곳엔 ‘윤치호 윤학자 기념관’이 있어 부부의 국경을 넘은 고아들을 향한 헌신적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윤학자 여사는 이 땅에서 버려진 ‘고아들의 어머니’였다.

 

근처 유달동엔 ‘이훈동 정원’이 있다. 이훈동은 조선내화 회장으로, 목포의 유력 기업인이었다. 1960년대 이미 공업국으로 가야 살 수 있다는 혜안을 가진 이 회장은 제철산업의 필요성을 대통령에게 역설했고 이후 포항제철이 탄생했다.

 

 

영사관 건물에서 조계지를 내려다본 모습. 사진=남민

 

‘이훈동 정원’은 고 이훈동 회장의 집으로, 1930년대 목포 최대 곡물상 우치다니 만베이(內谷萬平)가 목포 최고 명당에 지은 고급 대저택이다. 각종 석탑과 연못, 조경수가 있어 많은 사람이 찾는다. ‘백제 별서정원’이란 평가답게 자연 그대로의 경관이 수려하다. 

 

외관은 일본식을 거의 그대로 유지해 일제강점기 목포 주택의 형태를 보여준다. 웨딩 촬영 장소로 인기를 끌었고 드라마 ‘모래시계’와 ‘야인시대’ 촬영지이기도 하다. 남쪽 정원 가운데 큰 후박나무는 당시 출연자 이름을 다 ‘고현정 나무’라고 부른다. 

 

저택 앞에는 이 회장의 호를 딴 성옥기념관이 있다. 2003년 자녀들이 건립했는데 추사의 예서와 행서, 운보의 채색화조 십곡병, 남농의 금강산 보덕굴 편액 등의 희귀한 서예와 그림, 도자기 등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근처 유달초등학교에는 우리나라 최후의 호랑이 박제가 눈길을 끈다. 1908년 영광 불갑산에서 한 농부가 사로잡았는데 연도가 확실하게 기록된 남한 최후의 호랑이다. 체중 180kg에 ‘임금 왕(王)’자가 뚜렷한 전형적인 한국 호랑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목포의 명물 갓바위. 사진=남민

 

◇ 함께 둘러보면 좋을 목포의 명소

 

▲ 유달산 = 노령산맥이 뻗어내려 바다 앞에서 멈춰선 이곳에는 전망 좋은 정자가 여러 개 있다.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품은 바위 봉우리이다. 북쪽면에는 목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조각공원이 있다. 국제 조각심포지엄에서 인정받은 외국 조각가들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낙조대는 서해로 넘어가는 해넘이를 감상할 수 있는 명소이다.

 

▲ 갓바위 =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지닌 아들의 전설이 서린 바위이다. 큰 갓의 모양을 하고 있다 해서 이렇게 부른다. 저녁놀이 질 때면 영산강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풍화혈이 형성된 자연의 작품으로 희귀성을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고하도(高下島) = ‘유달산 아래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산강 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전세를 반전시킨 곳으로, 장군의 사당이 있다. 사당 옆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미국에서 육지면을 들여와 처음으로 재배한 육지면 발상지가 있다. 

 

▲ 외달도 = 목포 앞바다의 작은 섬이다. 때 묻지 않은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다. 아름다운 해수욕장과 낙조로 가족 단위와 연인이 즐겨 찾아 ‘사랑의 섬’으로 불리기도 한다. 갯벌 체험과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글·사진=남민 여행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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