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뉴스 전체보기

닫기
더보기닫기

[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첨탑 꼭대기 닿을 수 없던 첫사랑… 뽕나무 아래선 임 만나 보겠네

[근현대사의 흔적들] ⑩대구
첫사랑의 아린 추억 '청라언덕'과 두자충의 뽕나무 사랑이 깃든 사랑의 도시

입력 2021-06-08 07:00
신문게재 2021-06-08 13면

 

가곡 ‘동무생각’의 배경인 대구 청라언덕을 오르는 3.1만세운동 계단. 사진=남민

 

◇ 아련하고 풋풋한 첫사랑의 청라언덕

 

계성학교 남학생 박태준이 등굣길에 백합처럼 어여쁜 신명학교 여학생에게 짝사랑을 고백한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아 서둘러야 했던 그는 백합 한 송이를 들고 그녀의 등굣길을 막았다.“졸업하면 뭐 할거노?”. “일본으로 피아노 유학 간데이…” 말문이 막혀버린 박태준은 멍하니 길을 비켜서야만 했다.

 

가슴 시린 짝사랑을 떠나보낸 박태준은 이후 마산 창신학교 음악교사로 부임했고, 그곳에서 시인 노산 이은상 선생을 만난다. 자신의 짝사랑 이야기를 털어놓은 그가 보여준 악보에 이은상은 ‘사우(思友)’라는 시를 붙여준다. 박태준이 이를 ‘동무생각’으로 풀어 바꾼다. 그 유명한 가곡 ‘동무생각’이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 백합 같은 내 동무야 /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짝사랑의 무대이자 가곡의 배경이 되었던 청라언덕은 대구에서 ‘동산(東山)’으로 부르던 야산이다. 이곳엔 이국풍 선교사 주택 3채가 있다. 대구·경북지역 기독교 성지였던 이곳의 선교사 주택에 푸른 담쟁이 넝쿨이 무성했다고 해서 ‘청라언덕’이라 불렀다. 박태준이 약령서문 근처 집에서 계성학교에 가려면 이 언덕을 넘어가야 했다. 청라언덕에는 지금 ‘동무생각’ 시비가 세워져 있다.

 

 

대구 청라언덕 위 스위즈주택. 사진=남민

 

100여 년 전 대구에 들어온 선교사 아담스가 세운 계성학교를 다닌 인연으로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란 박태준은 평양숭실전문학교 시절에 선교사에게서 성악과 작곡을 배워 ‘오빠생각’ ‘오뚜기’ ‘하얀밤’ ‘맴맴’ 등 우리나라 대표 동요들을 작곡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민족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그는 연세대학교에서 종교음악과를 개설하고 음대학장을 역임했다. 그는 150여 가곡과 동요를 남겼다.

 

청라언덕은 ‘대구 근대골목 투어’의 출발점이다. 선교사가 들어와 병원(현 동산의료원)을 지으며 언덕에 선교사 주택도 지었다. 예쁘기 그지없는 챔니스주택, 블레어주택, 스윗즈주택으로 2층 붉은 벽돌로 지은 미국풍 주택이다. 1910년에 지었으니 100년이 넘었다. 지금은 각각 의료박물관, 교육-역사박물관, 선교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청라언덕에는 웅장한 고딕양식의 신축 교회 건물인 대구 제일교회가 우뚝 솟아있다. 1898년 설립된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개신교회다. 처음엔 남성로(약전골목)에 세웠고 지금도 그 자리에 구 건물이 남아있다. 청라언덕에는 1994년 신축했다. 지하 2층 지상 5층에 종탑 8층으로 대예배실 좌석수가 무려 3100석이다. 화강석 외벽과 함께 웅장하고 아름다운 고딕양식의 건축미가 압도한다.

 

 

대구 제일교회. 고딕 양식의 웅장함이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사진= 남민

 

건물 뒤편에는 종탑과 선교사들의 묘지인 은혜정원, 선교사가 미국에서 들여온 대구 능금의 시목이 있다. 이 언덕 아래 대로 건너편으로 가면 계산성당이 있다. 

 

계산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세워진 고딕양식 성당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 서품을 받은 곳이자,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예수의 십자가 부목도 간직하고 있다. 주차장이 있는 뒤편에서 계산성당과 맞은편 언덕 위의 제일교회를 함께 시야에 담으면 마치 유럽의 어느 도시에 온 듯한 착각에 빠져 든다. 

 

남성로에는 400년 가까운 전통의 약령시(약전골목)가 있다. 한약재 향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느낌이다. 

 

 

◇ ‘뽕도 따고 임도 본’ 귀화 명나라 장수 거리

 

임진왜란 때 이여송(李如松)이 이끈 명나라 원군에 풍수지리 참모 두사충(杜師忠)이 함께 왔다. 그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21세 손으로 명나라 최고의 풍수전문가였다. 해군으로 이순신과 함께 왜군에 맞선 진린 도독의 처남이기도 했다.

 

귀국길에 오르던 두사충은 명나라의 앞날이 걱정됐다. 곧 청나라가 조국을 집어삼킬 것을 예지한 그는 ‘오랑캐의 백성은 될 수 없다’며 두 아들과 함께 조선으로 귀화했다. 선조(宣祖)는 크게 반기며 한양에 살 곳을 마련해 줬지만 그는 대구에 터를 잡았다. 풍수의 대가였던 그는 현 경상감영 자리가 ‘하루에 천 냥 나오는 자리’라며 터전으로 삼았다.

 

 

대구 경상감영. 명나라 두사충이 재운이 따르는 명당이라고 자리잡았던 곳이다. 사진=남민

 

하지만 달성공원에 있던 경상감영이 그곳으로 이전하려 하자 나랏일이 우선이라며 자리를 양보했다. 계산동으로 옮긴 두사충은 대토받은 4000평의 땅에 뽕나무를 심었다. 추위에 떠는 백성들의 의복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생각이었다. 덕분에 지금 대구 근대골목 중앙에 있는 계산동은 ‘뽕나무골목’이라 불린다. 한때 이 골목은 근대화 물결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벽화만이 그 현장임을 말해준다. 

 

이곳에서 두사충의 러브스토리가 시작된다. 뽕나무에 오르던 어느 날 그는 담 너머 집에서 절구를 찧던 한 여인에 반한다. 아낙이 눈에 아른거려 상사병에 걸린 두사층은 매일 뽕나무를 올랐다. 눈치 챈 아들이 여인을 찾아 아버지 사정을 설명하니 마침 아낙도 청상에 홀몸이 되어 두사충을 몰래 훔쳐봤다고 하는 게 아닌가. 마침내 둘은 하나가 되었고, 여기서 ‘뽕도 따고 임도 본’ 일화를 남겼다. 

 

그의 후손들은 일제강점기 때인 1912년부터 모명재(慕明齋)를 지어 그를 추모하고 있다. ‘모명’는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귀화 후 두사충의 호이기도 하다. 그 재실을 모명재라 불렀다. 수성구 만촌동 그의 묘소 근처에 있다.

 

 

대구 뽕나무골목 벽화. 사진=남민

 

임진왜란 당시 두사충은 이순신 장군과도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다. 이순신 장군은 두사충에게 ‘봉정두복야’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 이 시를 모명재 기둥에 주련으로 붙여두고 있으니 두 집안의 우정을 짐작케 한다. 이순신 장군의 7세손도 그의 신도비를 만들었다니 각별한 우정이다.

 

두사충이 ‘하루에 천냥 나오는 자리’라고 말했던 경상감영 터는 대구 비슬산(앞산)의 정기가 뻗어 흐른다는 명당이다. 그의 말 대로 이곳에 경북도청이 들어서면서 정말 ‘황금땅’으로 변모했다. 근대사, 현대사를 거치며 감영 근처 향촌동 일대가 최대의 상권을 형성한 것은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경상감영 자리는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감영 건물로는 선화당과 징청각이 있다. 징청각은 관찰사의 주거공간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건물인 만큼 그 가치가 높다.

 

두사충은 자신이 말년에 살던 곳에 대명동(大明洞)이란 지명을 남겼다. ‘대 명나라’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고국 명나라를 그리워하는 그를 ‘대명처사(大明處士)’라 부르며 생긴 지명이다. 지금은 대구에서 가장 큰 동네가 됐다.

 

두사충의 뽕나무골목 옆에는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역사적인 인물 ‘서상돈 선생’의 고택이 있다. 1906년 대한제국 정부는 1300만 원이라는 거액을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빌려 쓰면서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돈의 생리를 잘 아는’ 서상돈은 이 빚을 갚지 못하면 이 나라를 넘겨줘야 할 위기로 판단했고 이듬해 1월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게 된다. 

 

가난한 소년 서상돈은 상점 심부름꾼이던 18살 무렵에 고 김수환 추기경의 외할아버지인 대구 천주교회 원로회장 서용서의 도움으로 보부상을 시작해 큰 부를 일구었다. 이후 대구 최고의 경제인 반열에 올랐지만 자신은 평생 검소하게 살았다.

 

 

민족 시인 이상화의 대구 고택. 사진=남민

 

서상돈 고택과 대문을 마주한 앞집은 민족시인 이상화의 집이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대구 출신으로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절을 폭풍같이 살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노래한 저항시인이다.

 

이상화는 ‘빼앗긴 들’을 결국 돌려받지 못한 채 1943년 43세라는 짧은 생으로 눈을 감았다. 그의 고택 옆에는 친형 이상정 장군의 고택이 있다. 그 방 안에는 형수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파이럿인 권기옥 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가객’ 김광석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사진=남민

 

◇ 함께 둘러보면 좋을 대구의 명소

 

▲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 서구식 종교건축물이 국내에서 변천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대구 남산동에 있다. 1915년 건축한 코미넷관은 로마네스크양식과 고딕양식을 혼합한 건축물로 주목받고 있다. 1927년에 축성한 역사관과 함께 프랑스 수녀들이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후 한국의 수녀들의 발자취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 천주교 대구 대교구청 =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와 길 하나 사이로 마주 보고 있다. 이 일대가 대구 천주교의 성지임을 말해준다. 프랑스 루르드지방의 성모 동굴을 닮은 거대한 야외 성모당과 유럽풍의 성직자 묘역이 특히 눈길을 끈다.

 

▲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 ‘가객(歌客)’ 김광석을 추억하는 골목이다. 대구 대봉동에서 태어나 5살에 서울로 이사간 김광석은 33살이라는 짧은 인생을 마감했지만 그 여운은 길게 남아있다. 대구 방천시장과 신천 사이의 담벼락 350m 구간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김광석 그리기가 진행됐고 그가 웃으며 세계무대에 오르는 그림이 그려지며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라는 칭호도 붙었다. 

 

▲ 팔공총림 동화사 = 1500년의 전통을 지닌 사찰이다. 세계 최대 석불인 약사여래대불을 비롯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명소다. 선원, 강원, 율원을 모두 갖춘 총림 사찰로 그 위상을 말해주고 있다.

 

글·사진=남민 여행작가 suntopia@hanmail.net 

기자의 다른기사보기 >

이시각 주요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