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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그라운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입력 2024-07-26 18:00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창작진과 출연진(사진=허미선 기자)

 

“제 삶은 ‘엔젤스 인 아메리카’ 이전과 이후가 좀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에 담겨 있는 의미들이 너무 많거든요. 단지 작품 혹은 연극에만 한정된 의미들이 아니라 제 삶을 뒤집어 놓는 경험들을 했습니다. 이 작품 이후에도 여러 작업들을 했지만 제 시야가 확 달라졌기 때문에 (이 작품을) 놓을 수 없었죠.”



신유청 연출은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파트 1’(Angels in America Part1, 8월 6~9월 28일 LG아트센터 서울 시그니처홀)의 의미에 대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작품이 아니라고 해도 저를 뒤흔들었던 작품”이라고 밝혔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의 상황은) 보통의 일상과는 다르죠. 하지만 그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너무 많은 의미들이 담겨 있어요. 그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제가 이 세상에 왜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들을 완전히 바꿔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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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황석희 번역가(왼쪽)와 신유청 연출(사진=허미선 기자)

 

이어 “저는 그 대본에 담겨 있는 의미들을 찾아내는 수준의 연출가”라며 “우리의 언어가 아니라 그 깊이들을 찾아내 관객들에게 전하는 것만으로도 좀 벅차다는 생각이 들어 그 의견들을 담아내는 데 충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파트 1, 2로 나뉘어 8시간여에 걸쳐 진행되는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밀레니엄 직전의 세기말을 배경으로 동성애자, 모르몬교도, 유대인, 흑인 드래그퀸 등 사회적 소수자가 겪는 차별과 혼란을 혼돈과 공포, 현실과 환상을 교차시키며 풀어가는 문제작이다.

1991년 초연된 토니 커쉬너(Tony Kushner) 작품으로 1993년 브로드웨이에 입성해 퓰리처상, 토니상, 드라마데스크상 등을 휩쓸었다. 한국에서는 정경호 주연으로 2021년 파트1, 2022년 파트 2를 초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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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프라이어 월터 역의 손호준(왼쪽)과 연인 루이스 아이언슨 이태빈(사진=허미선 기자)


한국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소녀시대 수영의 연극 데뷔작 ‘와이프’를 비롯해 ‘그을린 사랑’ ‘튜링머신’ ‘언체인’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 등의 신유청 연출작으로 뮤지컬 ‘스쿨 오브 락’ ‘썸씽로튼’을 비롯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 ‘스파이더맨’ ‘데드풀’ 시리즈의 황석희가 번역을 책임졌다.
 

황석희 번역가는 “번역가로서 가장 신뢰하고 중시하는 건 텍스트”라며 “토니 커쉬너의 작품은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감독의 ‘파벨스만’(The Fabelmans)을 번역하면서 처음 접했다. 굉장히 훌륭한 작가이자 문장가”라고 평했다.

 

“훌륭한 작가라고 반드시 훌륭한 문장가이지는 않은데 이분은 훌륭한 작가이자 훌륭한 문장가이십니다. 굉장히 긴 독백에도 위트들이나 이런 것들이 흐름이 끊기질 않죠. 제가 영화를 600편 가까이 번역했는데 이 정도로 완성도 있고 멋있는 문장은 정말 드물어요. 5편도 채 안 되거든요. 그 정도로 완성도가 높고 좋은 작품이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문장에 집중해 그 흐름을 놓치지 않는 것 그리고 캐릭터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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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황석희 번역가(왼쪽부터)와 신유청 연출, 프라이어 월터 역의 손호준과 유승호(사진=허미선 기자)

 

이어 “문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을 놓치지 않고 흐름을 계속 이어간다. 하지만 영어 대본”이라며 “두 언어 간의 물리적 한계로 인해 그대로 번역할 경우에는 그 흐름이 이어질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그 흐름을 어떻게 끝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 그리고 캐릭터를 살리는 게 가장 주안점이었습니다. 다행인 건 연출·조연출님이 이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깊으신 분들이라 번역가 입장에서는 ‘치트키’를 가지고 시작한 것과 다름없었어요.”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유승호의 연극 데뷔작이기도 하다. 유승호는 손호준과 더불어 북동부 특권층을 일컫는 와스프(White Anglo-Saxon Protestant, WASP,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 출신의 동성애자이자 에이즈환자인 프라이어 월터를 번갈아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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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프라이어 월터 역의 유승호(사진=허미선 기자)

 

유승호는 “이 작품에서 다루는 이슈들에 대해서는 사실 전혀 아는 게 없어서 영화나 창세기 등을 찾아봤다”며 “손톱 매니큐어는 연출님께서 소수자들이 일상생활에서 받는 시선들을 직접 느껴보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 해봤는데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그분들의 진심에까지 다가갈 수는 없다는 확신이 들어요. 하지만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기 위해 이것저것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연출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각 장면에 담긴 의미들을 깨달아요. 매일, 매번 연습마다 장면들에 담긴 의미들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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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프라이어 월터 역의 손호준(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과 유승호, 그의 연인 루이스 아이언슨 역의 이태빈과 정경훈(사진=허미선 기자)

  

또 다른 프라이어 역의 손호준은 “프라이어 역할을 하는 저희 뿐 아니라 다른 배우들과 모여서 드래그퀸 공연도 보러가고 비슷한 성향을 가진 분들의 유튜브, 자료 등을 열심히 찾아서 공부했다”며 “1막 4장 연인 루이스의 할머니 장례식 후 자신의 에이즈 발병 소식을 전하는 프라이어”를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꼽았다.  

 

“죽음이라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루이스에게 두려움이나 공포스러운 감정을 전달하지 않기 위해 더 밝게 노력하는 프라이어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요. 프라이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 같아요. 가장 어려운 장면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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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프라이어 월터 역의 손호준(왼쪽)이 연인 루이스 아이언슨(정경훈)에게 자신의 에이즈 발병 사실을 털어놓는 장면(사진=허미선 기자)

 

그의 연인이이자 미 연방 제2항소법원의 유대인 사무직원 루이스 아이언슨은 드라마 ‘펜트하우스’ ‘연애지상주의구역’, 연극 ‘어나더 컨트리’ 등의 이태빈과 뮤지컬 ‘앤’ ‘오즈’ 등의 정경훈이 더블캐스팅됐다.

이태빈은 자신이 연기하는 루이스에 대해 “그가 하는 선택들이 어떻게 보면 되게 비겁하기도 하고 누군가한테는 되게 현실적으로 느껴질 것”이라며 “이 캐릭터를 어떻게 잘 소화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팀의 막내로서 저만의 풋풋함으로 표현해 보려고 노력 중”이라고 털어놓았다. 

 

자신의 성정체성과 모르몬교도로서의 신념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미국 연방 제2항소법원 수석 서기관 조셉 피트는 ‘삼남매가 용감하게’ ‘멜로가 체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아빠는 딸’ 등의 이유진과 ‘광염소나타’ ‘마마돈크라이’, 화가시리즈 ‘모딜리아니’ ‘에곤 실레’ ‘아르토, 고흐’ ‘천사에 관하여: 타락천사 편’ 등의 양지원이 번갈아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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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 로이 콘과 조셉으로 사랑을 느끼는 상대를 연기할 부자 이효정(왼쪽)과 이유진(사진=허미선 기자)

‘공주의 남자’ ‘시티헌터’ ‘신기생뎐’ ‘자이언트’ ‘불멸의 이순신’ ‘야인시대’ ‘여인천하’ 등에서 굵직한 연기를 선보인 이효정과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루드윅: 베토벤 더 피아노’ 등의 김주호가 연기하는 악마의 변호사이자 보수주의 정치계 유력인사 로이 콘은 스스로가 유대인이며 동성애자임을 극구 부인하면서도 조셉과 기묘하게 얽히는, 실존 인물을 극화한 캐릭터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이효정과 이유진 부자가 애정 관계에 놓이는 캐릭터로 함께 무대에 서는 작품이다. 25년만에 다시 연극 무대에 서는 이효정은 “동성이지만 사랑을 느끼는 상대를 연기한다”며 “이런 경우가 없었어서 걱정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대한민국에서 부자지간에 사랑을 느끼는 상대를 연기한 전례가 없어서 인간적으로 고민을 좀 했죠. 그걸 감내할 수 있을까, 아들 눈을 바라보면서 할 수 있을까 했는데 막상 해보니 괜찮아서 아주 재미있게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하면서) 잃어버렸던 아들을 다시 찾은 느낌입니다. 연습실에서 매일 만나 하루 한끼 이상 밥을 같이 먹거든요. 연극으로 얻는 기쁨도 크지만 아들과의 관계가 더 돈독해지고 있다는 게 제일 큰 선물이죠.”

이유진은 “태어나자마자 아빠는 배우였고 TV에 나왔기 때문에 출연작들을 따로 챙겨보진 않았었는데 이번 작품 리딩 첫날 모두가 놀랄 정도의 역량을 보여주셨다”며 “원래 있던 존경심이 더 커졌다”고 밝혔다.

“아빠를 따라 본가로 가서 비법 같은 걸 전수받으려고 했어요. 그 동안은 안 하던 행동을 하게 만든, 되게 소중한 기회이자 감사한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이미 돈독했지만 더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는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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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전체 출연진(사진=허미선 기자)

 

조셉의 아내로 약물중독으로 환상을 마주하는 하퍼 피트는 ‘빙의’ ‘그녀는 예뻤다’ 등 고준희와 ‘시지스프’ ‘여고괴담’ ‘히든’ 등 정혜인이, 드래그퀸 출신의 혼혈 간호사 벨리즈는 태항호와 민진웅이, 조셉의 어머니 한나 피트는 무대와 매체를 오가며 활약 중인 전국향과 방주란이, 프라이어에게 신의 계시를 전하는 천사는 ‘스카펭’ ‘앨리스 인 베드’ ‘파우스트 엔딩’ 등의 권은혜가 연기한다.

로이 콘 역의 김주호는 발표된 지 30년이 지났음에도 ‘엔젤스 인 아메리카’가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 “(로이라는 인물을 상징하는) 부정부패는 한 국가의 탄생, 권력과 조직의 형성으로 언제 어디서나 어쩔 수 없이 함께 흘러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걸, 에이즈 환자라는 걸, 성소수자라는 걸 부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여전히 그에 대한 고민 중이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만들어가려고 노력 중이죠.”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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