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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결혼은 안 했어도 '애'는 있다, 新소비 큰손 '골드 앤트·엉클'

[싱글라이프] '조카바보'여도 괜찮다

입력 2016-02-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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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기업 차장으로 줄곧 한 회사에 근무했던 최은구(45)씨는 최근 사업가로 변신했다. 평소 프라모델 조립을 즐겨하고 조카와도 곧잘 블록을 맞추며 놀았던 경험을 살려 집 근처 일산에서 ‘블록방’을 오픈한 것. 시간당 1000원으로 각종 조립완구를 맞출 수 있는 이곳은 주말이면 발디딜 틈이 없다. 그는 직업상 잦은 해외 출장으로 국내보다 먼저 출시된 레고 모델을 구매해 조립과정을 공개하는 키덜트이자 스타블로거였다. 먼저 결혼한 동생이 아이를 낳으면서 그 취미는 이제 일곱살 조카와 공유되고 있다.



#2. 중학생 조카를 둔 현경선(32)씨는 곧잘 ‘애엄마’로 오해 받는다. 하지만 그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다. 딸 셋의 막내인 그는 띠동갑인 조카가 곧 자식이자 동생 같은 피붙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외국계 화장품회사에 다니는 그는 회사 모델인 아이돌의 사인을 받아다 주기도 하고 그 친구들을 초대해 영화 시사회에 보내 주기도 한다. 최근에는 언니의 늦둥이 딸 유치원 졸업식에 맞춰 휴가를 냈다. 현씨는 “큰조카는 친구 같은 느낌이라면 막내조카는 실제 내 딸 같다. 주말이면 형부에게는 언니와 데이트하라고 생색내고 조카와 함께 문센(문화센터)도 가고 놀이동산도 간다. 몸은 힘들어도 힐링되는 느낌”이라고 고백했다.


해마다 ‘조카바보’들이 늘고 있다. 만혼과 비혼이 늘면서 결혼한 형제·자매의 자녀를 흡사 자신의 자녀처럼 아끼고 투자하는 싱글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 유통업계에서는 일찍이 이들을 주목하고 있다. 유아동용품 시장의 큰손으로 떠오른 그녀들을 가리켜 세상은 ‘골드 앤트’(Gold Aunt)라 부른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이 신조어는 결혼연령이 늦어지고 독신자들이 증가하면서 생겨난 신(新)인류 중 하나다. 조카들을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귀여워하며 온갖 선물 공세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을 뜻한다.
 

조카바보
연예계 대표 ‘조카바보’ 엄정화. 남동생 엄태웅의 딸 지온이.(사진제공=KBS)

◇30대女 "숨겨뒀던 내 아이?"… SNS 조카사진에 오해


지난해 지금의 회사로 이직한 30대 초반의 싱글여성 박모씨는 타 부서 상사에게 “아이가 있었냐?”는 말을 들었다. SNS와 카톡 프로필사진에 조카를 안고 찍은 사진을 올린 것이 오해로 이어졌다. 박씨의 조카사랑은 유난하다.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리는 다음달 초에는 일찌감치 휴가를 낸 상태다. 유치원 졸업식까지 휴가를 내려다 참았다. 박씨는 “엄마, 아빠보다 이모를 먼저 말했을 정도로 유난히 끼고 살았다. 그 감동은 말도 못한다. 그때부터 내 자식이려니 생각했다. 양육비가 빠듯한 올케도 내가 사다주는 선물을 은근 바라는 게 느껴진다”며 조카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의 물건을 살 때는 세일을 이용하거나 직구를 하면서까지 기다리지만 조카가 필요한 물건은 즉시 결제한다.

일본에서는 이들을 가르켜 ‘식스포켓 (Six Pocket)’으로 이름지었다. 저출산과 고령화사회에 기인한 것으로 한 가구의 자녀가 1명 또는 2명으로 줄어들고 경제력 있는 조부모가 늘어나면서 귀한 손자, 손녀를 위해 지출을 아끼지 않게 된 데서 비롯해 수입이 많은 결혼하지 않은 이모, 고모 등도 포함되면서 이 같은 용어가 생겨났다.

신학기를 앞두고 앞다투어 열리고 있는 ‘신학기 가방 대전’의 경우 등하교용, 학원용, 주말용 등 다양한 버전의 용품이 불티나게 팔릴 정도로 치열한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최근 싱글족의 증가로 이모, 고모, 삼촌, 외삼촌까지 가세한 10명의 주머니 돈이 1명의 자녀에게 소비된다는 ‘10 포켓 1 마우스’의 시대가 열렸다”면서 남다른 소비력을 강조했다.


◇40대男 "삼촌이랑 놀러갈래?"… 데이트할 땐 조카동반

앞에 소개된 최씨는 결혼 1순위가 능력에서 성격으로 바뀌었다. 정작 자신은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조카바보가 되면서 아내가 될 사람도 같은 생각이었으면 좋겠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해서다. 블록방을 준비하면서 알게된 여자친구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확실했지만 취향이 달랐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소개받았던 그녀는 ‘노키드’족이었던 탓에 데이트에 데리고 나가는 조카도 부담스러워했다. 최씨는 “눈 앞에서만 예뻐하고 나중에 생각이 틀린 것 보다는 솔직한 게 낫더라”면서 “나이가 있다 보니 소개를 받고나서 마음에 들면 ‘다음 데이트에 조카를 데리고 나가도 되냐’고 묻는다”며 나름의 싱글탈출법을 공개하기도 했다. 최씨의 사업 초기자본의 대부분은 아이들의 체구에 맞는 친환경 가구맞춤과 제품 구입에 들어갔다. 엄마들을 위한 카페테리아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최씨는 “조카를 데리고 다녔던 블록방의 대부분은 제품 구비에만 초점을 맞추지만 아이들을 위한 가구와 부모들을 위한 카페테리아를 소홀히 하는 점이 늘 아쉬웠다”면서 “자식같이 챙긴 조카 덕분에 평소 몰랐던 사업아이템이 떠오른 셈”이라고 웃어보였다.


◇20대男 "뭐 필요한거 있어?"… 고정지출 된 조카선물

최근 싱글족의 남다른 소비로 인해 ‘엔젤산업=망하지 않는 장사’라는 공식이 생겼다. 엔젤산업은 영유아 및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으로 엔젤지수(Angel Coefficient)에서 파생됐다. 한 경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02년 8조원 규모였던 엔젤시장은 지난 10년간 연평균 15.8%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최근 명품들이 불황을 타파하고자 구찌 칠드런, 펜디 키즈, 버버리 키즈 등 새로운 라인을 내놓은 것도 이때문이다.

최근 연말정산을 한 20대 중반의 신입사원 이씨도 자신의 연간 신용카드 금액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별로 많이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 카드명세서에는 달마다 조카의 선물금액이 상당했다. 그 리스트에는 유모차와 영양제, 그림책 전집 할부금액까지 흡사 부모라고 해도 될 만큼의 고정지출로 빼곡했다. 이씨는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이렇게나 많이 사줬었나?’라고 놀랐다. 나 스스로가 골드 엉클이었던 셈”이라면서 “주변에서도 어릴 때만 예쁘지, 중학교 들어가면 친구만 찾는다고 정신 차리라고 하지만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사주겠나 싶다. 함께 공유한 시간과 추억은 내가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소득계층이 다양해지면서 가처분소득이 높은 미혼 남녀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돈을 쓰고 만족감을 느끼는 자기만족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부정정인 시각도 존재한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이들의 소비패턴에 대해 “아동용품이 지나치게 고급화되는 경향이 있고 선물용은 세트로 판매되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는 물건까지 사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지갑을 여는 건 본인의 자유다. 어떤 ‘내리사랑’을 할지 역시 스스로에게 달렸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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