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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평생 ‘노마드’ 최동열 작가 “꿈 보다 의지, 윌(Will) 파워를 믿어요”

[허미선 기자의 컬처스케이프] 1980년대 이스트빌리지에서 바스키아, 키스 해링, 릭 프롤, 앤디 워홀 등과 작업했던 최동열 웨이브아이 대표

입력 2021-03-26 18:00
신문게재 2021-03-26 12면

최동열 작가
히말라야에서 작업 중인 최동열 작가(사진제공=작가 본인)

 

“모든 ‘니즘’은 스타일이 있죠. 우린 스타일이 없었어요. 개인이 다 달랐죠. 바스키아도, 해링도, 릭도 그리고 저도 자기가 제일 잘났었어요. 그 자존감들을 서로 존중하면서 순수하게 자기세계를 구축했고 온전히 내 걸 할 수 있었죠. 화랑들은 작았고 누구나 전시를 할 수 있었고 매주 단체전이 있었어요.”

최동열 작가이자 웨이브아이 대표는 1980년대 이스트빌리지를 돌아보며 “지금의 한국에 그리고 동양에 그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전했다.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 키스 해링(Keith Haring), 현재 리안갤러리에서 한국 첫 개인전을 진행 중인 릭 프롤(Rick Prol) 등과 1980년대 이스트빌리지에서 활동했던 그는 현재 작품활동과 더불어 살아남아 지금까지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스트빌리지의 친구들을 한국과 아시아에 소개하는 벤처기업 ‘웨이브아이’를 운영하고 있다.

최동열 작가
최동열 작가(사진=이철준 기자)

“아시아에서 뉴욕을 주목하기 시작했어요. 뉴욕 작가들에게 아시아는 굉장히 중요한 시장이죠. 최근 1980년대 이스트빌리지가 다시 조명받고 있기도 해요. 요즘 아주 기분이 좋아요. 많은 친구들이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살아서 그림을 그리는 그 시절의 친구들이 있거든요. 자괴감, 포기하고 싶은 마음 등과 마약, 술, 에이즈 등 유혹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이스트빌리지에서 여전히 작품활동 중인 그 친구들을 소개하고 있죠.”

 

그 친구들 사이에서 ‘이스트빌리지의 아시아 대사’로 불리는 최동열 작가는 2018~2019년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됐던 ‘이스트빌리지 뉴욕: 취약하고 극단적인’을 통해 바스키아, 키스 해링, 릭 프롤을 비롯해 데이비드 워나로비치(David Wojnarowicz), 던컨 한나(Duncan Hannah), 제임스 롬버거(James Romberger), 스티븐 랙(Stephen Lack), 마틴 웡(Martin Wong) 등 25명의 이스트빌리지 작가들을 소개했다.

 

비슷한 시기 서울숲아트센터(더페이지갤러리)의 ‘반항의 거리, 뉴욕’에서는 바스키아, 키스 해링, 크래쉬(Crash), 데이즈(Daze), 푸투라(Futura), 케니 샤프(Kenny Scharf), 쳉쾅치(Tseng Kwong Chi), 찰리 에이헌(Charlie Ahearn), 마샤 쿠퍼(Martha Cooper) 등 뉴욕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15명을 한데 모았다. 이 두 전시는 ‘Beats Goes On’이라는 제목으로 묶여 중국 청도에서 관람객들을 만나고 있고 곧 상해에 입성한다.

 

“친구들에게 늘 얘기해요. 우리는 이제부터라고. 앞으로 10년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역사가 될 수도, 죽을 때까지 마이너로 남을 수도 있으니 이제부터는 너희들 하기에 달렸다고. 작가에게는 막바지 작품들이 중요하거든요. 고흐도, 세잔도, 램브란트도 그랬어요. 우리는 살아 남았고 여전히 힘도 남아 있고 그림도 그리고 있어요. 이젠 할 수 있어요. 그걸 기다려왔거든요. 우리는.” 


◇베트남 전쟁, 블루노트, 이스트빌리지 그리고 실크로드와 히말라야…평생 ‘노마드’

최동열 작가
최동열 작가(사진=이철준 기자)

 

“미국에서 아주 거칠게 살았어요. 대학교도 의미가 없어서 그만 두고 방황하다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게 됐죠.”

그는 일제강점기 변호사로 활동한 최진의 맏손자로 태어났다. 부모 세대까지는 서울 인사동의 대궐 같은 99칸 한옥에 살았지만 그는 6.25전쟁 발발로 피난 중이던 부산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납북, 집안의 쇠락으로 순탄치 못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경기중학교 졸업 후 검정고시를 치러 15세에 대학생이 될 정도로 영특했다.

이른 나이에 대학생이 됐지만 쉬이 적응하지 못했던 그는 열여섯에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HID로 2년 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참전과 첩보부대 활동으로 난폭하고 피폐해진 스물두살, 행정고시를 위해 절에서 공부 중이던 그는 교환학생으로 미국행을 택했다. 

최동열
최동열 작가(사진제공=작가본인)

 

하지만 그의 말대로 “학교는 의미가 없었던” 그는 뉴올리언스, 플로리다, 멕시코로 떠돌며 험악한 일들이 벌어지곤 하던 클럽의 가드, 유명 재즈바 블루노트의 바텐더, 염소농장 일군 등으로 일했다. 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마약이 난무했으며 여자와 어울리며 흥청거렸다.


“블루노트 바텐더로 일하면서 사라 본, 윈튼 마샬리스와 그의 아버지 (피아니스트) 앨리스 마샬리스 등의 활동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재즈를 공부했고 ‘이미지스트로’로 시를 썼어요. 그러다 카페에서 텍사스주립대 미대생인 지금의 아내(엘디)를 만나 그림을 시작했어요. 예이츠를 읽거나 시를 쓰던 제 눈에 그(엘디)와 친구들 그림의 색상, 동작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흥분이 될 정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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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열 작가(왼쪽)와 앤디 워홀(사진제공=작가본인)

  

그림의 색채, 동작에 빠져든 최동열 작가는 “정말 문득 붓글씨 연습을 하느라 늘 가지고 다니던 묵으로 말을 그리기 시작했다”며 “이유도 없었다. 그저 그때가 말의 해였기 때문이었다”고 껄껄거렸다. 그렇게 그림에 입문한 최동열 작가는 “고기를 사면 싸주는 종이를 사서 붓과 먹으로 수백 마리의 말을 그렸다.”

 

“마지막으로 그린 두 작품이 너무 멋있게 나왔어요. 전혀 교육을 받지 않은 제 작품을 전시했는데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해줬어요. 리놀리언 판화 누드를 그렸고 ‘그림에 근육이 있다’ ‘파워가 있다’는 평을 받으면서 신이 나서 그림을 그렸죠. 지금 생각해도 뭔지 모르겠지만 너무 신이 났고 좋았어요. 그래서 결심했죠. 그림으로 끝까지 가겠다고.”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그림을 그리며 멕시코, 캘리포니아, 뉴욕 등을 오가다 들른 멕시코의 한 화랑에서 미술전문잡지 ‘아트 인 아메리카’(Art in America)에 실린 이스트빌리지 기사를 보자마자 그곳으로 향했다. 

최동열
뉴욕 지하철의 최동열 작가(사진제공=작가본인)

 

가자마자 들른 첫 화랑에서 전시를 하게 되면서 이스트빌리지에 입성했지만 그 후로도 노마드의 삶은 계속 됐다. 실크로드, 티벳불교미술에 심취하며 티벳, 네팔, 아프리카 정글 등을 전전했고 최근 10년 동안은 시베리아 히말라야의 4000~5000미터 고지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평생 어느 한 군데 머무르지를 못해요. 1987년 한국에서 첫 전시를 하고 파리에 갔다가 실크로드 갔다가 히말라야에 갔다가…지금도 제 아내가 평생을 ‘플레인 에어 페인터’(Plein Air Painter)로 산다고 해요. 유목민의 삶을 살았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바로 해봐요. 계획도 없어요. 재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덤비다 보니 뭐든 힘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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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열 작가(사진=이철준 기자)

그리곤 “노마드를 좋아해서 미국의 인디언, 중세 유럽의 아서리언 레전드, 칭기즈칸과 몽고 등을 평생 공부했다”며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다른 걸 보는 노마드의 룰은 굉장히 간단하다”고 털어놓았다.

 

“간단한 룰을 따르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평생을 던지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영역을 확장하죠. 이스트빌리지도 유목민과 같아요. 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자신을 던져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거든요. 그리고 지금 다시 노마드가 키워드가 되고 있죠.” 

 

◇꿈 보다 윌(Will) 파워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의 ‘If You Will It, It Is No Dream’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윌(Will), 의지가 그걸 만들죠. ‘드림 이즈 낫싱’(Dream is Nothing), 만드는 게 중요해요. 그 만드는 힘, 그 ‘윌 파워’를 저는 믿어요.” 

 

꿈 보다는 ‘윌 파워’가 강력하다고 믿는 최동열 작가의 얼굴은 거칠었던 삶과는 달리 평안해 보였다. 이에 대해 최 작가는 “긍정적이 되려면 굉장히 부정적인 상황이 있어야 한다”며 “니체의 ‘얼웨이즈 치어풀’(Always Cheerful)을 되새기며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 건강한 게 중요하다”고 털어놓았다.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긍정적으로 산달까요. 저는 고흐를 너무 좋아하지만 그의 자살을 미화하는 건 싫어요. 힘들 땐 저도 생각했던 적이 있지만 돌아서면 삶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그리곤 철학가였지만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수 초빙을 거절하고 유리 깎는 일을 했던 스피노자의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온다면 사과나무를 심겠다”, 니체의 “아모르 빠띠”(Amor Fati, 어떤 운명인 사랑하자)를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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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열 작가(사진=이철준 기자)

 

“의지를 가지고 매일 그리고 쓰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잘하든 못하든 그 의지가 최고죠. 윌은 현재를 미래로 끌고 가는 힘이고 미래가 현재를 당길 수 있게 하는 힘이거든요. 윌은 제가 평생을 살아온 방식인 노마드와도 관계가 있어요. 어딘가로 가서 새로운 걸 만들고 넓히는 행위의 시작은 ‘선택’(Choice)이 아닌 윌이거든요.”

 

그렇게 ‘윌 파워’로 넘치는 그에게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것이 사업이었다. 2016년 창업한 미술 콘텐츠 벤처기업 웨이브아이는 그의 표현처럼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던 사람이니 아무리 거칠어도 문인이나 마찬가지”였던 그에게 녹록치 않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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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열 작가(사진제공=작가본인)

“저는 여전히 30대, 1980년대 뉴욕의 이스트빌리지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아요. 사업을 하느라 좀 힘들었죠. 벤처기업을 하다 보니 무인이 된 느낌이에요. 하지만 늦게라도 하기를 굉장히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기중학 친구들 대부분이 사업가나 재벌이에요. 그런 친구들을 볼 때마다 문화도, 삶도 모른다고 무시하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직접 사업을 하다 보니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뭐든 직접 해봐야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죠.”  

 

이어 최 작가는 “그 험한 1980년대 이스트빌리지에서 살아남아 열심히 작품활동 중인 친구들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소개할 수 있어서 가장 좋다”며 “게다가 사업을 하면서 너무 많은 걸 배우고 깨달아서 늦게라도 안했으면 후회했겠다 싶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최근엔 도시재생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뉴욕 1세대 그래피티 작가와 한국, 중국 작가들을 초청해 서울, 부산, 제주 등의 낙후한 지역을 살려보려고 몇 군데와 논의 중이죠. 한국인은 물론 해외에서 온 사람들도 꼭 가야하는 거리로 조성해보고 싶어요.” 

 


◇또 다시 짐쌀 채비 중인 못말릴 노마드 “이번엔 에베레스트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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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열 작가(사진=이철준 기자)

 

“요즘 열심히 운동 중이에요. 상반기 안에 히말라야로 또 떠날 계획이거든요. 잔스카, 아나플라 등 히말라야 인근 지역 대부분을 갔는데 에베레스트만 안갔어요. 8000미터 정상은 아니지만 4~5000미터에서 그림 작업을 하고자 합니다. 갈 때마다 한번씩은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생각하긴 해요. 실제로 한두명은 죽기도 하죠.”

 

지난 10여년간 이어온 히말라야 트래킹과 그림 작업을 다시 재개할 계획을 전한 최동열 작가는 “갈 때마다 죽음을 떠올린다”고 털어놓았다. 

“마지막까지 박력있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가면 두세달은 걷고 그림 그리고를 반복해요. 유화 작업은 마르는 시간이 있다 보니 그럴 때마다 걷는데 정말 아무 생각도 안나요. 최고죠. 높고 추운 곳에서 접하는 극한 상태가 주는 에너지가 정말 엄청나요.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이성 없이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것만 남는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아요. 지금으로서는 그 꼭대기에서 그림을 그리다 죽으면 좋겠어요.”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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