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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그라운드] ‘졸수’ 구순에도 식지 않는 ‘비움’ 행보, 박서보 “자연이, 인간들의 모습들이 내 스승”

입력 2021-09-20 18:00

박서보 작가
10월 31일까지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박서보 작가(사진=허미선 기자)

 

“자연이, 인간들의 모습들이 내 스승이에요. 원초적 자연 뿐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제2의 자연, 예를 들어 쇼윈도 풍경 등은 계속 변해요. 그게 시대감각이죠. 예술가는 그걸 느끼고 자기화할 줄 알아야 해요.”



형광 연두빛 마스크, 연보라 셔츠, 파스텔 블루톤 커프스, 흰색 정장과 운동화 차림으로 전시장에 들어선 박서보 작가의 모습은 그가 일생을 바쳐온 ‘색채’ 연구 그대로를 보는 듯했다.

1970년대 초기 연필 묘법을 시작으로 1980년대 중기 묘법, 2000년대 색채 묘법까지 시대와 사회를 담아낸 그의 개인전 ‘PARK SEO-BO’(10월 31일까지 국제갤러리)가 한창이다. 2010년 이후 국내 두 번째 개인전에는 ‘색채 묘법’이라 불리는 2000년대 이후의 후기 작품 16점이 전시됐다. 

 

박서보
박서보 작가 개인전 전경(사진=허미선 기자)

 

“예전엔 책을 많이 봤는데 이제는 일체 보질 않아요. 봐야 나와는 관계없거든요. 내 그림 속 계단식으로 된 건 한강 주변, 밤섬 옆 아파트 8층에 살 때 내려다 본 한강다리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그때까지 저는 한강 다리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너무 빨리 기능적으로 만들어진, 세상 못생긴 싸구려 다리라고 여겼죠. 그런데 밤에 그렇게 아름답더라고요. 조명에 매혹돼 여러 각도에서 바라봤죠. 보는 각도에 따라 기둥이 두개가, 네개가, 하나가 되기도 하는데…조명과의 관계에 따라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렇게 내 그림에 기둥이, 계단이, 문이 생겼죠.”

제목 자체가 ‘묘법’(描法, Ecriture)인 작품들을 이루는 구도와 색채들은 볕 좋은 가을날의 제주 하늘과 바다가 맞붙은 선을 가로지르는 섬, 계절마다 바뀌는 쇼윈도 풍경, 단풍이 절정인 일본 후쿠시마현의 집어 삼킬 듯한 빨강, 점층적으로 꺼지고 밝혀지는 한강다리 조명에서 영감을 받은 형광 연초록 등 자연과 일상, 인간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자연에서 온 것들이다.
 

박서보
박서보 작가(사진=허미선 기자)

“혼자서 별의 별 생각을 다해요. 밤중에 500호짜리를 제작해놓고 ‘멋있구나’ 혼자 감동해요. 어떤 때는 꼭 지옥문 같기도 하죠. 언젠가 내가 저 문을 열고 들어가겠지 싶고. 꽃도 그래요. 내 기억 뿐 아니라 카메라로 촬영해두고 연구하죠. 색 감성은 물론 시대 감성까지 보는 사람에게 잘 전달되록요.”

 

 

◇단색화, 채움 아닌 ‘비움’의 미학

“단색화는 단색이라서 단색화가 아니에요. 단색화는 행위의 무목적성, 행위의 무한반복성, 행위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성의 정신화가 있어야 해요. 그것이 없으면 무늬만 단색화죠. 행위의 무한반복성은 스님이 하루 종일 반복해 염불을 외듯 자신을 비워내는 일이에요. 어떤 방식으로든 그런 정신의 세계에 도달해야 하죠.”

단색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박서보 작가는 “5살 때부터 아버지가 절에 데리고 다녔다. 내가 부처를 모신 것도 아닌데 그 교리에 나날이 침전돼 갔다”고 털어놓았다. 더불어 그는 “도공의 물레질과도 같다”고 설명했다.

“도공이 흙과 물레를 통해 반복적 행위로 만들어낸 달항아리에는 엄청난 우주가 있어요. 모든 걸 안아주죠. 외국인들이 달항아리에 미치는 이유예요. 물레가 있고 그 위에 흙이 있고 그것들이 사람 손에 의한 반복 행위를 통해 세계가 하나 되는 합일을 이루죠.”

그는 “젊어서는 부족함이 많았다. 반대로 남보다 뛰어남도 너무 많았다”며 “이 두 개가 내부에서 충돌을 했다. 그 충돌하는 모양들이 뛰쳐나와 저항운동을 하게 되기도 했다”고 반추했다.

“문득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불교 교리에 맞는 일을 찾아다니고 책도 엄청 읽었어요. 결국 비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허둥대다 3살이던 둘째 아들이 저희 형 국어 노트에 ‘한국’이라고 쓰는 걸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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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작가 개인전 전경(사진=허미선 기자)

한칸에 한 글자가 다 들어가질 못하고 칸칸이 ‘ㅎ’ ‘ㅏ’ ‘ㄴ’ 이렇게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데도 도무지 안돼 빗금을 긋는 걸 보면서 ‘포기’ ‘체념’의 깨달음을 얻은 그는 “아들이 하던 짓을 그림에 흉내내면서 반복하다보니 저만의 세계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그 무럽부터 그림은 수신을 위한 수행의 도구라고 생각했어요. ‘단색화’가 이탈리아 현대미술백과사전에도 등재돼 있어요. 서양화가들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토해내는 데 중점을 둔다는 저는 비워내는 쪽이거든요. 자신들의 미술사에는 없는, 부족한 역사 보충의 의미로 ‘단색화’에 주목하고 있죠. 그것이 한국회와의 한 흐름입니다. 한국서 대학을 나오고 한국서 운동하고 이 사회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면서 투쟁하고 일궈낸 것이 단색화죠.”


◇21세기 치유의 예술, 사람의 고뇌를 빨아 당기는 흡인지처럼

박서보 작가
박서보 작가(사진=허미선 기자)

 

“저는 70년 동안 아날로그 시대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살아온 작가예요. 그런데 21세기는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요. 수없는 사람들이 시대로부터 추락해 버리죠. 그런 사람들의 스트레스가 쌓여 지구가 병동화돼가고 있어요. 저는 그런 21세기를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요.”

그렇게 “20세기, 70년간 성공적으로 살아온 걸 71년째에 다 까먹고 망칠 것 같은 불안감에 무척 떨고 있었던” 박서보 작가는 “결국 극복해보자 결심했다.” 그 결심을 가능하게 했던 것 역시 자연이었다.

“2000년 일본에서 칠순을 축하하는 개인전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요구한 게 ‘단풍이 절정일 때 해다오’였어요. 쓰나미로 원전이 붕괴된 후쿠시마현이었어요. 그곳의 단풍이 든 골짜기를 보곤 충격으로 소리를 질렀어요. 골짜기가 새빨갛게 돼서 나를 태워 죽이려 쳐들어오는 느낌이었죠. 그 감정을 그려야 겠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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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작가(사진=허미선 기자)

그렇게 박서보 작가는 반다이산 화산폭발로 생긴 오제누마 호수 언저리의 단풍들에서 다시 한번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며 자신만의 색채들을 탄생시켜 갔다.


“단풍이 태양과 직렬된 전면에서는 형광 빨강을 발라놓은 것 같아요. 바람이 불면 한쪽은 형광 빨강인데 또 한쪽은 거무튀튀하죠. 바람, 태양과의 관계에 의한 자연의 조화로 내 빨강색이 탄생했어요. 감정의 잔파동을 표현할 줄 알아야 예술가죠. 아크릴 등 수성은 제가 갠대로, 바른대로 보이질 않아요. 말라봐야 그 진짜 색을 알 수 있죠.”

그의 전언처럼 “중간색, 오묘한 색 등을 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연신 개서 종이에 발라 보고서야 겨우 몇장을 건지는” 과정을 통해 탄생한 ‘단풍색’을 비롯한 그의 색채는 ‘홍시색’ ‘황금올리브색’ ‘벚꽃색’ ‘유채꽃색’ ‘와인색’ ‘공기색’ 등 자연의 이름을 하고 있다.

“20세기는 자신들이 느낀 것들을 다 토해내요. 사람들은 캔버스에 ‘표현’이라는 이름으로 다 토해낸 그림으로부터 폭력을 당하면서도 좋아하죠.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 상처, 폭력 등으로 헉헉대는 사람들을 위로는 못할망정 데미지를 가중시키는 예술이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병동화돼 가는 지구, 모든 사람들이 환자인 21세기의 미술은 치유의 예술이 돼야 해요.”

“불안한 사람들을 평안하고 행복해지도록 해야 하는” 그런 미술을 박서보 작가는 스스로 즐겨 쓰는 잉크를 찍어 쓰는 펜, 그 펜의 흥건함을 조절하기 위해 사용하는 ‘흡인지’에 비유했다.

“그림은 보는 사람을 향해 다가가는 게 아니라 흡인지처럼 보는 사람의 고뇌를 빨아당겨줘야 해요. 그래야 편안해지고 행복해지죠. 그게 미래 예술이에요. 자연의 색채를 내가면서, 그 색채가 많은 사람을 치유하면 좋겠어요. 그렇게 ‘색채치유론’을 생각하면서 색을 쓰죠.”


◇‘졸수’ 구순에도 꺼지지 않는!

박서보 작가
박서보 작가(사진=허미선 기자)

 

“얼마 전 낙상사고로 꿰매고 며칠 전에야 실밥을 풀었어요. 이제는 서 있거나 걷는 자체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새로운 일을 한답시고 200호짜리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2019년부터 시작해 아직 끝을 못내고 있죠. 수없이 반복해서 그리고 또 그리고 그 위에 또 그리고…연말쯤 완성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올 연말쯤 완성해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발표할 200호 작품을 비롯해 ‘졸수’(卒壽)라 불리는 구순에도 박서보 작가는 스승들을 담아내는 데 온힘을 다하고 있다. 이 200호 신작과 더불어 “과거의 연필 묘법, 두 가지 일을 함께 하고 있다” 귀띔한 박서보 작가는 “앉았다 일어나기도 힘들고 눕는 행위도 안된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도 꼬박 다섯 시간 정도를 서서 이젤 작업을 해요. 키가 모자라면 의자를 놓고 지팡이를 짚고 올라가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세계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밀도감을 그려내는 거죠. 내 인생을 걸고. 앞으로 지구상에서 지낼 시간이 별로 많질 않아요. 그러니 죽어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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