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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식 기자의 세상만사] 녹우당(錄雨堂)의 비련(悲戀)

입력 2020-08-11 10:43

땅끝(土末), 전라도 해남 땅, 소백산맥 끝부분에 우뚝 솟은 두륜산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산자락으로 천년고찰 대흥사(大興寺)의 잘 배치된 고루걸각들이 대가람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흥사에서 해남읍을 향해 약 이십여 리 길을 따라오다 보면 우측 8부 능선에 검푸른 상록수 숲이 우거져 마치 녹색 문양을 넣은 듯한 400m가 조금 넘는 산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특히 겨울철이면 상록수 숲이 더 돋보이는 이 산의 이름이 덕음산으로 산기슭에로 약 350년 전에 건립되었다는 60여 칸의 반듯한 기와집이 한 무리를 지어 터를 이루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남도 명문가로 소문난 해남 윤 씨 종가(宗家)로 당대 재상 출신이며 정철, 박인로와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자택입니다.

 

본시부터 해남 윤 씨는 남도 지방의 토호(土豪)로서 세를 이루고 살았으며 고산은 부모님 덕택으로 한양에서 출생하고 1628년 42세 나이로 세자(봉림, 인평대군)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효종은 즉위한 뒤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수원에 집을 한 채 지어 하사했으며 1660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고산은 낙향하며 그 집을 뜯어 해남으로 옮겼습니다.

 

임금께서 하사하신 가옥을 남에게 팔거나 빈집으로 둘 수 없었던 당시 사회 관습 때문에 천리(360km)가 다되는 머나먼 해남 땅까지 옮겨지었던 집이 지금의 녹우당(錄雨堂)입니다.

 

집 뒤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선 덕음산에 500년생 비자나무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마치 장대비가 쏟아지듯 쏴아 하는 소리가 들려 녹우당이라 이름 지었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60여 칸으로 이루어진 가옥 일체를 녹우당으로 알고 또 그렇게들 부르고 있지만 실상은 효종께서 하사하셨던 수원의 집을 옮겨 지은 사랑채 이름만 녹우당입니다. 

 

천연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된 비자나무숲은 뒷산 바위가 드러나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조상의 유언에 따라 윤 씨 가문 사람들과 주민들이 함께 심어 가꾸었다고 전해집니다.

 

수원에 있던 가옥을 천리 길이 넘는 먼 곳으로 옮겨 녹우당을 완공했으나 고산은 완공 3년 후 은둔 생활을 하던 보길도 부용동(芙蓉洞) 낙서재(樂書에齊)에서 85세로 생을 마쳤습니다. 

 

세자의 스승으로 임명될 만큼 학식(學識)이 뛰어나 한때는 인조의 신임을 받기도 했었지만 타협할 줄 모르는 대쪽 같은 곧은 성품 때문에 그의 일생은 유배생활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642년 해남군 현산면의 산속 자그마한 분지(盆地)를 쇠로 만든 자물쇠라는 뜻의 금쇄동(金鎖洞)에서 은거하며 지은 오우가(五友歌)는 좌절 앞에서 자연의 불변을 찬양한 노래입니다.

 

남도의 명문가 해남 윤 씨 집안은 고산 윤선도뿐만 아니라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 삼재로 불리는 공제(恭齋) 윤두서(尹斗緖)와 같은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습니다.

 

당시 날던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권문세가(權門勢家)였던 해남 윤 씨 집안이었지만 관습과 체통(體統)이라는 굴레 때문에 녹우당에는 가슴 아리도록 슬픈 이야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유학(儒學)을 근간으로 삼던 그 시대 사람들은 일부종사(一夫從事)가 미덕이라는 풍습에 따라 남편을 여의고 홀로된 여인들이 수절(守節)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겼답니다. 

 

수절로 생을 마치면 국가가 앞장서 절개를 칭송하고 열녀문을 세워 주었으니 천민인들 명예롭기 싫었겠습니까? 그로 인해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자 재혼을 적극 권장하기도 했습니다.

 

가문의 체면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시절이었으니 사대부 양반가에서는 정혼(定婚)을 한 뒤 예비 신랑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 정혼 자는 결혼식 없는 시집을 가야 했습니다

 

그리 흔치 않는 일이었지만 이런 기막힌 일이 벌어지면 신랑의 얼굴도 못 본채 시가(媤家)의 귀신이 되어야 하는 불운한 여인들을 까막과부나 망문과부(望門寡婦)라고 불렀습니다. 

 

본인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양가 부모님들의 혼약(婚約) 때문에 평생 청상과부로 늙어가야 하는 박복한 여인들의 슬픈 삶을 범부의 졸필로 표현해 낼 수 있겠습니까?

 

하찮은 양반은 범접하기도 힘든 해남 윤 씨 종가 솟을대문 높은 담장 너머로 소혼단장(消魂斷腸)의 애절한 소녀의 곡성이 새어 나오며 한바탕 때아닌 큰 사단(事斷)이 벌어졌습니다. 

 

윤선도의 후손(後孫) 가운데 어느 처자가 혼인하기로 한 정혼자(定婚者)가 불의에 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리자 시가(媤家)로 장례를 치르러 가야 할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까막과부, 망문과부로 시집에 들어가 살게 되면 신부에게 액살(厄煞)이 끼어 예비신랑이 제명에 죽지 못했다며 갖은 학대로 괴롭혔으니 평생을 수난과 고초 속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호랑이 보다 무서운 부친의 엄명에 반항할 엄두도 낼 수는 없으나 결혼을 할 만큼 성숙했으니 청상과부로 어찌 살꼬? 차라리 죽겠다며 가마 안에서 목을 매는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반쯤 넋이 빠진 상태로 울고 있는 조카딸을 달래는 당숙(堂叔)은 네가 시집에 가서 정말 못 살겠으면 내가 너한테 잠자듯이 죽을 수 있는 약을 꼭 구해다 줄 것이니 오늘은 집안 망신 그만 시키고 마음을 단단히 해라. 협박보다 무서운 위로와 아씨를 편안하게 잘 모시라는 불호령에 종자들 발걸음은 나는 듯 어느새 가마는 시야에서 사라져 갑니다.

 

가문(家門)의 체통을 중요시(重要視) 하던 악습 때문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던 딸의 인생을 짓밟고 멀어져 가는 가마 행렬을 바라보는 아비 심정은 어땠을까 궁금합니다.

 

전국 팔도의 백성들 사이에 부러움의 대상이며 아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고관대작 출신의 명문가 양반 집안에도 말 못 할 그런 기막힌 사연들을 가슴속에 묻고 살아야 했답니다.

 

 

이승식 기자 thankslee57@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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