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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왕의 기운' 누르려던 일제, 하늘이 심판하다

[근현대사의 흔적들] ⑪창원

입력 2021-06-15 07:00
신문게재 2021-06-15 13면

 

중원로터리에서 바라본 제황산. 일제가 산 꼭대기에 러일전쟁 승전 기념탑을 세웠다. 사진=남민

 

◇ 일제 침탈 복수한 드라마 같은 ‘진해’ 탄생기

 

1905년 5월 27~28일. 일본 해군은 대한해협 쓰시마 해상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하고 러일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잔뜩 기세가 오른 일본 해군은 진해에 접한 해발 110m 제황산 정상에 승전기념탑을 건립한다. 하지만 이내 재앙이 들이닥친다.

 

여기에 전설 같은 실화가 전해온다. 제황산 봉우리를 깎아 평평하게 다진 날 밤, 묘법사의 일본인 주지 아사히 간세이(旭寬成)의 꿈에 백발노인이 피를 흘리며 나타나 경고한다. “무도한 일본 해군이 내 두상을 깎아 상처를 입히고 피를 흘리게 했다. 당장 해군사령관에게 말해 원상복구하지 않으면 재앙이 닥칠 것이니 명심하라.”

 

이튿날 묘법사 주지가 사령관에게 급히 꿈 이야기를 전했지만 그는 코웃음을 쳤고 공사는 강행됐다. 이 무렵 진해에서는 진해~창원 철도 개통식이 열렸다. 그런데 마산에서 일본인 관광객을 가득 태운 여객선이 현동만 부두에 도착하는 순간 배가 뒤집혀 25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때도 백발노인이 재차 주지의 꿈에 나타나 경고했으나 마찬가지였다.

 

그 직후 기념탑 공사 자재운반 케이블카 쇠줄이 갑자기 끊어지는 사고가 터졌다. 중국인 석공과 한국인 잡역 노동자는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으나 무수한 일본인 공사감독과 석공들이 사상하는 참사를 빚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제는 승전기념탑을 완공했고 백발노인은 주지에게 삼세번의 경고를 하지만 일제는 진해만 요새사령부 육군기념일 축하행사를 강행한다.

 

 

북원로터리 이충무공 동상. 임진왜란이 일어난 날짜에 맞춰 1952년 4월 13일에 제막식이 거행됐다. 사진=남민

 

문제는 기념식 후에 어린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는 점이다. 250명의 어린이들로 가득 찬 상영관에서 극장 조수 이시베가 영사기를 트는 순간 필름에 불이 붙었고 장내는 금세 불바다로 변했다. 영화관은 아수라장이 되어 이튿날까지 불탔고 107명이 사망했다. 이 사고로 한국인 아이는 단 한 명 희생됐다.

 

제황산은 풍수적으로 ‘임금이 날 명당’으로 주목받았다. 일제는 그 기를 누르기 위해 승전기념탑을 세우려 했지만 꿈의 경고가 잇따라 현실적 재앙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전설 같은 현실이었다. 1927년에 완공한 승전기념탑은 일제가 전함의 마스터를 본떠 세웠다. 광복 후 1967년에 헐렸고, 우리 해군 군함을 상징하는 9층 전망탑으로 다시 건축했다.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던 해에 일제는 천혜의 요새 진해 현동 일대에 군항을 건설했다. 인근 중평 들판의 기름진 농토를 착취해 주민들을 경화동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진해 계획도시를 탄생시킨다. 대륙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은 것이다. 

 

1912년 야마타 우시타로가 ‘진해군항 대시가 계획도’를 설계하면서 넓은 들판은 계획도시로 변모했다. 들 복판의 고목 팽나무를 중심으로 중원로터리를 만들어 8방향의 방사성 도로를 내고 북쪽에는 북원로터리, 남쪽에는 남원로터리를 만들었다. 한국인은 이곳 거주권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벚꽃이 예쁜 진해우체국 전경. 사진=남민

 

일제가 만든 이 3개의 로터리에는 현재 각각 상징물이 하나씩 남아 있다. 일제는 원래 중원로터리에 8개의 방사선 도로망 별로 당시 관여했던 8개국의 독특한 건물을 배치할 계획이었는데 차질이 생겨 러시아풍 건물만 지었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1912년에 준공한 이 희귀한 러시아풍 건물은 현재 사적 제291호 진해우체국이다. 

 

흰색 목조건물로 지붕은 동판으로 마감했고 반원형 채광창을 설치했다. 정면의 현관 기둥은 배흘림 양식(투스칸 오더, Tuscan order)으로 주목받는 건축물이다. 이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진해근대역사테마거리가 조성돼 있다.

 

북원로터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 이충무공의 얼굴 모습 제작 때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우여곡절 끝에 1952년 4월 13일 마침내 성대한 제막식이 거행됐다. 4월 13일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날짜를 상징했다. 일제가 이 땅에 세운 도시를 이순신 장군이 수복한 의미를 담았다. 이 동상 건립을 계기로 훗날 ‘진해군항제’가 열리게 됐다.

 

 

백범 김구의 친필을 음각한 이충무공 시비. 이 장군의 시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가 새겨져 있다. 사진=남민

 

남원로터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쓴 이충무공의 시비가 있다. 화강암 입석 비에 이순신 장군의 시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 바다에 맹세하니 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산천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더라)’가 백범의 글씨로 음각돼 있다.

 

진해 벚꽃축제 무대이기도 한 로터리 일대는 도로망을 비롯해 일제가 남긴 흔적들로 빼곡하다. 1926년에 지은 진해역 건물은 당시 일반적인 지방 역사의 형식과 규모를 완벽하게 보여주어 사료가치가 높다. 남원로터리 근처에는 진해요항부 병원장 사택이 남아있다. 일식과 양식이 결합된 ‘ㄱ’자형 평면의 목조주택이다.

 

 

시인이자 승려이자 애국지사였던 월하 김달진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김달진문학관. 사진=남민

 

◇ 승려 김달진, ‘웬수’ 일본 경찰 눈 속에 처박은 사연

 

1941년 겨울 눈이 수북한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이 곳 승려였던 김달진(金達鎭, 1907~1989)은 자신을 밀착 감시하던 일본 경찰과 외길에서 마주친다. 그는 일본 경찰이 지목한 ‘요주의 인물’로 집중 감시 대상이었다. 달아날 수도 없고 달아날 이유도 없었다. 김달진은 격투 끝에 건장한 일본 경찰을 메쳐 눈 속에 처박아 버리곤 유유히 사라졌다.

 

세속 나이 34살, 법랍 7년. 김달진은 항일운동 중 처음으로 일제에 무력을 행사하며 울분을 삭였다. 사건 직후 그는 주변의 권유로 유점사를 탈출해 만주 용정으로 향한다.

 

‘한 벌 옷에 바리때 하나면 인생에 더 바랄 것이 없다’던 월하 김달진. 그는 서울 경신중학 4학년 때 일본인 영어선생 추방운동을 주도하다 퇴학을 당했다. 고향 창원(현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으로 돌아와 모교인 기독교계 계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민족 항일 교육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학교마저 폐교당한다. 

 

일제강점기 암담한 민족의 현실 앞에서 절망과 좌절을 거듭 맛봐야 했던 김달진은 어느 겨울밤 찢어진 벽지 사이에서 초벌 신문지에 인쇄된 글 ‘佛(불)’자를 보게 된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가 우리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가호만을 기도하던 그가 그 순간 그 하나의 글자에 곧바로 승려가 되기로 결심했다.

 

1933년 늦가을 그의 나이 만 26살 때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소작료를 받아오라는 심부름을 보냈고 김달진은 이를 여비 삼아 부모와 처자식까지 버리고 그 길로 금강산으로 향한다. 이듬해 봄 금강산 유점사에 도착한 그는 김운학 주지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머리를 깎았다. 이어 3.1독립선언 33인 중 한 명인 백용성 스님이 세운 대각교에서 화엄경에 몰두하게 된다.

 

 

진해역 전경. 사진=남민

 

일제와의 악연은 승려가 된 후에도 이어졌다. 유점사 법무(法務) 승려로 70여 개 사찰을 다니며 일제의 부당함을 강론하자, 일제는 그를 요주의 인물로 밀착 감시하며 괴롭혔다. 김달진은 1년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고 해방이 되자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월하 김달진은 시인이자 승려였고 한학자이자 교사로 일생을 살다 갔다. 22살이던 1929년 시작(詩作)에 입문한 그는 무애 양주동 선생에 의해 처음 작품을 발표하면서 평생 시인의 타이틀을 달고 살았다. 고향 창원은 그에게 시상(詩想)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의 원천이 되어 줬다.

 

김달진은 유점사 시절 절에서 보내준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1940년 총 85편의 작품을 수록한 시집 ‘청시(靑枾)’를 발표한다. 

 

이 중 ‘비시’는 생가의 6월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사립문 안 감나무의 푸르름을 빗대어, 꿈이 푸르고 깨끗함이 세상의 중심임을 노래했다. 그는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남을 내친다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은둔하며 살았다. 해방 후 춘원 이광수 소개로 동아일보 기자가 됐지만 이내 자신의 길이 아니라며 향리로 돌아와 해군사관학교 출강과 창원 남면중학교 교장으로 후진 양성에 몸담다가 정년퇴직한다. 

 

김달진이 마지막으로 열정을 쏟은 일은 법정 스님을 아들로 삼은 이운허 스님과 함께한 고려대장경 번역사업이었다. 작고할 때까지 20년간 200자 원고지 15만 장 분량의 불경을 번역했다. ‘월하(月下)’는 이운허 스님이 지어준 호다. 

 

일제에 맞서 몸을 던졌던 월하. 평생 순수하고 청빈으로 살다간 그의 흔적은 고향에 후진들이 문학관으로 담아놓았다. ‘김달진문학관’ 바로 앞에 그의 생가가 있다. 초가집 생가의 사립문을 들어서는 순간 선생의 혼이 느껴진다. 김달진 정신이 깃들어 숨 쉬는 곳이다.

 

◇ 함께 둘러보면 좋을 창원의 명소

▲ 군항문화 = 진해는 2010년 7월 1일 마산시·창원시와 함께 통합, 창원시로 출범해 ‘진해구’가 되었다. 군항의 도시인 창원시 진해구에는 해군사관학교와 함께 해군기지 내에 해군의 역사와 문화가 숨쉬고 있다. 해군기지 안에는 해군의 집과 안중근 의사 유묵비, 이승만 대통령 별장, 해군사관학교 박물관과 거북선 등이 있다. 사전 신청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

▲ 벚꽃 명소 여좌천과 경화역 = 드라마 ‘로망스’ 촬영지인 여좌천 로망스다리는 벚꽃이 만발할 때면 더 주목받는다. 좌우에서 오래된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듯 만개해 전국 최고의 벚꽃 경관을 자랑한다. 이웃한 경화역 자리도 벚꽃길로 사랑받는다. 벚꽃 진해의 명소다.

▲ 김씨박물관 = 김달진문학관에 바로 이웃한 곳에 있다. 일제강점기 전후의 각종 유물이 보관 전시돼 있어 꼭 함께 둘러볼 곳이다. 김현철 대표가 근현대사를 이어오며 사용했던 생활용품을 모두 수집해 빼곡하게 전시해 놓았다

 

글·사진=남민 여행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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