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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옛 것 갈고닦은 지혜, 성군의 교과서가 되다

[논어 따라 떠나는 우리 땅 역사기행] ②안동

입력 2021-07-13 07:00
신문게재 2021-07-13 13면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 전경. 사진=남민

 

옛 것에서 배워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 온고지신이란?

 

子曰(자왈),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공자께서 “옛 것을 잘 익혀 새로운 것을 알아내면 스승(군자)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온(溫)’에는 익히다, 복습하다, 따끈따끈하게 만들다 라는 의미도 있다. 옛것을 다시 갈고 닦으면 따뜻한 새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이다. 

 

 

◇ 공자의 뜻을 실천한 퇴계의 ‘온고지신’

 

병산서원 만대루
병산서원 만대루. 사진=남민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모두 어제의 일이 바탕이 되어 오늘을 거쳐 내일의 일로 이어진다. 공자는 제자 자공에게 “지나간 것을 말해 주니 다음에 올 일을 아는구나”라며 칭찬했고, 배우기를 좋아한 안회에겐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았다”며 추켜세웠다.



조선 최고 학자로 칭송받는 퇴계 이황은 공자의 이 온고지신 가르침을 일생 동안 배우고 실천한 인물이다. 옛글을 읽고 외우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기를 성찰함으로써 진정한 도학(道學,성리학)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해 냈다.

퇴계는 줄곧 ‘옛 선현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했고 저술들 또한 옛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창의성을 가미해 완성했다. 이로써 퇴계학파가 탄생했다. 퇴계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며 그는 이제 동양 도의철학(道義哲學)의 창시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무오사화가 일어난지 3년 후 태어나 갑자, 기묘, 을사사화까지 조선 4대 사화(士禍)라는 난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그는 치세(治世)의 해법을 경세(經世)가 아닌 학문적 완성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것은 바로 성학이었다.

퇴계는 송나라 주자(朱子,본명은 주희)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켜 조선 성리학을 집대성했다. 특히 앞선 선현들의 이론을 바탕으로 해 자신의 학문적 독창성으로 완성시킨 <성학십도>는 ‘성군(聖君) 교과서’로 평가된다.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유교 철학적 지침을 10가지 도표로 간결하게 설명한 것이 <성학십도>다.

퇴계 이황은 68세이던 1568년 7월에 새 임금 선조(宣祖)의 간곡한 부름으로 한양으로 다시 올라왔다. 이때 <성학십도>를 바치며 ‘준비되지 않은’ 어린 임금께 두 번 절을 하고 “먼저 뜻을 세우시어 ‘순(舜) 임금처럼 되도록 공부에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10폭 병풍과 수첩에 이 내용을 담아 방 안에 두고 수시로 익히기를 청했다.

생이 얼마 남았을지 모를 조선 최고 학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왕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자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고향 예안(禮安, 지금의 안동)으로 내려와 이듬해 1570년 12월 8일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7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 ‘유비군자’ 정신의 소유자

 

하회마을
하회마을 전경. 사진=남민

 

퇴계 선생은 조선의 수많은 선비들과 다른 독특한 삶을 살았다. 명성과 벼슬을 구걸하지 않고 늘 뒤로 물러나 차분히 자기 인격을 수양하는, 진정한 유비군자 정신의 소유자였다. 과거시험에 붙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진정 고전을 읽고 사색한 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추구했다. 그의 영원한 로망은 항상 벼슬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었다.

역사상 퇴계만큼 벼슬을 많이 사양한 사람도 없다. 중종과 인종·명종·선조까지 네 명의 임금이 벼슬을 내린 것만 해도 170회 안팎이 되지만 그 절반은 사양했고, 마지못해 나아가도 다음날 그만두거나 대부분 병을 이유로 곧바로 사직하곤 했다. 오죽하면 자신의 호를 ‘퇴계(退溪)’라 했을까? 퇴계를 그리워한 명종 임금은 과거시험 문제에 ‘초현부지(招賢不至, 불러도 오지 않는 어진 신하)’라는 시를 출제했을 정도다.

대학자 퇴계 이황은 아이러니하게도 24살 때까지 과거에 세 번이나 낙방했다. 합격의 간절함이 없었던 때문이다. 말하자면 시험을 ‘마지못해’ 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밖에서 늙은 종을 찾느라 “이 서방”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자신이 아직 한 가지 호칭도 이루지 못했음을 깨닫고 28살에야 서울에서 소과(小科)인 진사시에 합격을 한다.

그마저도 시험을 마치고 곧바로 귀향길에 올랐는데, 한강을 건너기 전에 합격 소식을 들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려가 버렸다. 이어 모친의 권유로 할 수 없이 대과(大科) 문과에 응해 34살에 합격하며 벼슬길에 나아갔다.

퇴계 이황은 안동 예안의 온계리(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사 이식(李埴)과 춘천 박씨 부인 사이의 다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퇴계를 낳던 날 밤에 공자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퇴계가 과거에 급제하자 어머니는 “너는 뜻이 높고 깨끗하니 세상이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벼슬은 고을 현감 정도가 좋으니 높은 벼슬은 탐하지 말라”고 일러 주었다고 한다.

 


◇ 퇴계의 유산 ‘도산’… 인생 마지막 날이 인생의 전성기

 

퇴계 선생이 태어난 방인 퇴계태실
퇴계 선생이 태어난 방인 퇴계태실. 사진=남민

 

퇴계의 온고지신 숨결은 안동시 도산면 일대에 산재한다. 그가 나고 자란 집은 도산면 온혜리의 노송정(老松亭)이다. 온천물의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온혜리라 했다. 노송정은 조부 이계양(李繼陽)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보고 1454년 이 마을에 은거하면서 지었다. 노송정은 이계양의 호였다. 한 스님은 이 터에서 귀한 자손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해 줬다는데, 그중 퇴계가 500년 조선사에 독보적인 족적을 남겼다.

퇴계가 태어난 방을 ‘퇴계태실’이라 부른다. 정문인 솟을대문은 모친이 공자가 들어오는 꿈을 꾼 태몽으로 인해 ‘성인이 들어온 문’이란 뜻으로 성림문(聖臨門)이라 부른다. 훗날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부친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정자 노송정이 있고 오른쪽에 사당이 있다. 왼쪽 ‘온천정사(溫泉精舍)’라는 건물이 퇴계태실이 있는 생가 본채다. ‘ㅁ’자형의 전형적인 경상도 사대부 가옥이다.

노송정 현판은 명필 한석봉의 글씨다. 노송정에는 옥루무괴(屋漏無愧)와 해동추로(海東鄒魯)라는 편액이 있다. ‘옥루무괴’는 <시경>에 나오는 ‘상재이실 상불괴우옥루(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에서 인용한 것으로,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늘 행동을 삼가해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는 뜻이다. <중용>과 <대학>에서는 이를 ‘신독(愼獨)’이란 말로 강조한다. ‘해동추로’는 ‘해동, 즉 조선의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곳’을 뜻한다. 퇴계 선생을 공자와 맹자에 비유한 말이다. 이렇게 써놓는 이유는 오가며 글을 보고 언행을 함부로 하지 않기 위함이다.

 

퇴계종택
퇴계종택. 사진=남민

 

온혜리 동쪽 토계리에는 퇴계 후손이 지은 퇴계 종택이 있다. 그곳 토계천 산비탈에는 계상서당(溪上書堂)이 있다. 퇴계 선생이 51세에 제자들을 맞기 위해 지은 집이다. 바로 이 집에서 500년 조선 역사상 성리학의 두 거봉 퇴계와 율곡이 처음 만났다. 23세의 율곡이 58세의 퇴계 선생을 찾아와 2박 3일간 함께 지낸 곳이다.

퇴계는 같은 예안 출신의 선배 농암 이현보(李賢輔)처럼 ‘귀거래(歸去來)’를 꿈꾸었다. 서른 살에 지산와사(芝山蝸舍)라는 작은 집을 지었고, 46세 때 벼슬을 내려두고 내려와서는 양진암(養眞庵)을 지었다. 이때부터 호를 ‘퇴계’라 불렀다. 벼슬에서 물러나겠다는 배수진을 친 호다. 퇴계의 묘소는 양진암 터에서 계단길 따라 산으로 오르면 둘째 며느리 봉화 금 씨 묘 위쪽에 있다.

퇴계 선생은 명종 때인 1557년 낙동강의 경치를 품은 도산(陶山) 기슭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기 시작해 1561년 무려 5년에 걸쳐 완공하고 무척 기뻐했다. 도산의 ‘도(陶)’를 전원으로 돌아간 도연명(陶淵明)으로 생각하고 자신도 도연명처럼 작은 이상향을 얻은 기분에 취했으리라. 자신도 이곳에서 온고지신 정신으로 고전을 연구해 새로운 학문을 정립했고 많은 후진을 양성했다.

퇴계 사망 4년 후인 1574년에 후진들은 도산서당 뒤편에 ‘도산서원’을 건립한다. 선조도 한석봉의 명필을 빌려 ‘도산서원(陶山書院)’이란 편액을 하사했다. 지금의 도산서원은 그렇게 탄생했다.

 

도산서원 추로지향 비석
도산서원 추로지향 비석. 사진=남민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서원으로 향하면 공자의 77세 적손이자 마지막 연성공(衍聖公, 황제가 내려준 작위)이었던 고 공덕성(孔德成) 선생이 방문해 쓴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의 고향)’ 비석을 만난다. 퇴계 선생이 공자의 사상을 온전히 보전해 마치 공자와 맹자의 본향을 보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 썼다. 이로써 안동은 공자의 후손도 인정한 공자·맹자의 고향과 같은 곳이 되었다.

도산서원 앞 낙동강 건너편 언덕에 시사단(試士壇)이라는 비각이 내려다 보인다. 1792년 정조가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 영남 유생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특별과거인 ‘도산별시’를 치른 곳이다. 지방에서 과거를 치른 특별한 사례다.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는 오른쪽으로는 용처럼 생긴 산이 강물을 따라 꿈틀거리는 모습이다. 천원 지폐 뒷면에 등장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 함께 둘러보면 좋을 안동의 명소

 

이육사문학관
이육사문학관. 사진=남민

 

퇴계 선생 묘소에서 가까운 곳에 역시 퇴계의 후손인 ‘이육사 문학관’이 있다. 본명이 이원록(李源綠)인 이육사는 <청포도> <광야> 등을 남긴 일제 강점기 저항 시인이다. ‘이육사’란 이름은 감옥에서 받은 수인 번호 ‘264’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하회탈과 풍산 류씨의 고장인 하회마을은 엘리자베스 여왕과 부시 대통령도 찾은 가장 한국다운 전통마을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이 마을은 낙동강이 휘감아 돌아가는(下回, 하회) 곳에 섬처럼 떠 있는 듯한 지형이다. 

 

하회마을에서 강 상류 쪽엔 서애 선생을 모신 병산서원이 있다. 도산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입교당 마루에 앉아 만대루 기둥 사이로 보이는 앞산과 낙동강은 한 폭의 액자 속 그림과 같다. 

 

봉정사 극락전
봉정사 극락전. 사진=남민

 

봉정사(鳳停寺)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찰이다. 이곳의 극락전은 고려 시대 양식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다. 국보로 보호받고 있다. 

 

안동 시내에는 1519년에 지은 오래된 한옥 임청각(臨淸閣)이 있다. 원래 99칸 집이었다고 하나, 독립운동을 했다 하여 일제가 철길로 집터 일부를 헐어버렸다. 초대 국무령(1925~1927년 사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을 지낸 석주 이상룡(李相龍) 선생의 생가다. 

 

임청각 가까운 곳에는 통일신라 시대 전탑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있다. 벽돌로 쌓아 올린 칠층탑의 상승감이 고색창연함과 어우러져 이국풍을 자아낸다. 국보로 등재된 귀중한 문화재다.


글·사진=남민 여행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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