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뉴스 전체보기

닫기
더보기닫기

[비바100] 도토리, 잘 먹었습니다~람쥐!

[이희승의 영화 보다 요리] 집에서 만들어 먹는 '묵', 줍기부터 쑤기까지 AtoZ

입력 2022-10-27 18:30
신문게재 2022-10-28 11면

애비규환
도토리묵을 더 맛있게 변주하는 법은 ‘묵밥’으로 먹는 것이다. 잘게 잘라 뜨겁거나 찬 다시국물 등 기호에 맞는 온도에 말아먹으면 꿀맛. (사진제공=리틀빅픽쳐스)

 

연하의 고등학생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한 토일(정수정)은 결혼을 결심한다. 심지어 자신의 과외 제자였던 호훈(신재휘)이 예비 아빠임을 당당히 밝히자 토일의 집안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어진다. 엄마와 재혼한 무던한 새아빠(최덕문) 대신 친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가고 싶었던걸까. 기억에 희미한 아빠가 있다는 대구로 무작정 내려간다.



대학생 초보 임산부답게 티셔츠와 청바지를 고수하는 토일은 식성도 남다르다. 언제나 그가 먹는 건 도토리묵. 오죽하면 예비아빠인 호훈(신재휘)이 “대구에 도토리묵 없으면 택배로 보내줄까?”라고 걱정할 정도다. 마카롱이나 치즈케이크만 먹을 것 같은 정수정은 ‘애비규환’에서 다양한 도토리묵을 그야말로 맛깔나게 퍼먹고 찍어먹는다.

영화는 ‘아비규환’이란 사자성어를 살짝 비튼 코믹소동극이다. 한 여성의 자아찾기이자 친아버지와 새 아버지 그리고 곧 태어날 자식의 아빠들이 가진 각자의 가치관과 부르짖음이 가득하다. 한자 선생님인 토일 새아빠의 유교적인 분위기와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호훈 아빠의 정반대적인 매력도 ‘애비규환’의 재미다. 집안 망신이라는 토일의 분위기와 달리 호훈의 집은 경사분위기다. 혼전임신을 축하하는 그들은 아들에게 “이게 울 일이냐?”며 새생명을 축하한다.

 

2022102801010012574
영화 '애비규환' 스틸컷.(사진제공=리틀빅픽쳐스)

토일은 생물학적인 아빠를 찾아나서며 도토리묵을 전혀 팔지 않을 것 같은 분식집에서 도토리묵을 발견한다. 매일 그곳을 다니다 보니 가게 딸 일월(이진주)하고도 친해진다. 요일에서 따온 둘의 이름을 눈치챈 관객이라면 이들이 이복자매 사이임을 눈치챌 것이다.


영화 ‘애비규환’은 한국사회에서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이혼, 재혼, 혼전임신에 대한 시선을 다루며 점차 바뀌고 있는 요즘 분위기를 반영한다. 자신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과 자신과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는 입장도 세련되게 녹여냈다. 걸그룹 f(x)(에프엑스) 출신의 정수정이 첫 영화로 미혼모를 택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어쨌거나 ‘애비규환’을 보면 자연스럽게 도토리묵이 미치도록 먹고 싶어진다.

 

사전적 정의로 ‘도토리, 메밀, 녹두 따위의 앙금을 되게 쑤어 굳힌 음식’을 뜻하는 이 음식, 묵은 말랑하고 건강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19세기 중반 간행된 어휘서 ‘사류박해’에서는 묵을 두부의 일종으로 보았는지 ‘녹두부’(綠豆腐)라 기록하고 있다. 섬유질을 제거한 순수 녹말로 만들어서인지 소화도 잘될 뿐더러 도토리가 예로부터 해독에 탁월한 것으로 알려지며 가을마다 산속 전쟁(?)이 벌어진다.

 

애비규환1
평소에도 도토리묵을 싸서 다니는 극 중 토일의 모습. 실제로 ‘애비규환’의 연출을 맡은 최하나 감독의 최애 음식으로 알려져있다.(사진제공=리틀빅픽쳐스)

 

‘몇 개쯤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도토리를 주웠다가는 큰 코 다친다. 자연공원법 제23조 제1항에 따르면 허가 없이 공원 구역에서 나무를 베거나 야생식물을 채취하는 행위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국립공원이 아니더라도 현행 산림자원법 등에 따르면 산주 동의 없이 산림 내에서 임산물을 절취한 자는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실제로 북한산을 비롯해 등산객들이 주로 찾는 산 입구에서는 실랑이가 종종 벌어진다. 가방 속에서 발견된 도토리를 뺏는 사람과 “한 봉지도 안되는거 가지고…” 라고 억울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수거한 도토리는 바로 주변에 뿌려진다. 공단 직원은 이렇게 규제하는 이유로 “도토리 등의 열매가 다람쥐나 꿩, 멧돼지 같은 야생동물이 겨울을 나는 데 중요한 식량원”이라고 밝혔다.

 

책임 있는 시민의식이 필요하지만 직접 쑨 도토리묵을 먹는 기쁨은 남다르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연식이 꽤 된 은행과 도토리 나무가 뒷마당에 있는 시댁 덕분이다. 결혼 한 뒤로 더이상 등산 후 도토리묵과 막걸리는 먹지 않는다. 차라리 살은 더 찌더라도 감자전을 시킨다. 파는 도토리묵도 가게마다 직접 쑨다는 말을 철썩 같이 믿었고 간혹 입에 맞는 곳도 있었다. 

 

도코리
도토리를 까야지만 가구를 만들 수 있는데 그나마도 갈아주는 방앗간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슬플뿐이다. (연합)

 

하지만 도토리묵을 ‘직접 쑨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임을 그때는 몰랐다. 아마도 중국산 도토리 가루를 물에 풀어 직접 만들 수는 있지만 국내산 도토리묵을 ‘만들어 판다’면 적어도 한 접시에 5만원은 해야 수지가 맞을 정도다.

도토리를 주워 가루를 만든 뒤 가라앉혀 녹말만을 분리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수월치 않다. 얼마전 KBS2 ‘신상출시 편스토랑’에 출연한 가수 이찬원이 집에서 직접 도토리묵을 뚝딱 만들었지만 그것은 ‘따고, 말리고, 가루내서, 녹말을 분리’한 과정을 건너 뛴 ‘도토리 가루’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직접 만든 묵은 때론 진하게 혹은 좀 묽어도 탱글하게 그리고 어떤 기름을 넣는지에 따라 완성도가 달라진다.

해마다 은행과 도토리를 즐거운 마음으로 줍는데 그걸 까거나 쑤는 건 송구스럽게도 내 몫이 아니다. 도토리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 중 길다란 졸참나무와 동그란 상수리 나무가 있는 우리집은 많이 떨어진 걸 위주로 줍고 일부러 나무를 털어 수확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다.

과거 시아버님은 ‘한 알도 안 놓치리라‘는 투지가 있는 분이셨는데 다람쥐가 굶는다는 사실을 배운 아이들의 성화에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으신다. 모두 터는 것보다 아직 나무에 붙어있는 걸 먹으러 오는 다람쥐와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를 굴리러 오는 길고양이를 보려는 손주의 기쁨이 더 좋다는 걸 깨달으신 것 같다. 도토리묵 한 접시가 다람쥐 한달치 식량이라고 하니 다들 도토리를 양보합시다.

 

 

GettyImages-1409423666
(사진출처=게티이미지)
기자가 추천하는 '도토리묵 양념장' 비법

 

* 도토리묵을 만드는 건 시어머니의 몫이기에 자세히 알지 못한다.

 

① 일단 도토리 가루의 5배가 넘는 물을 넣으며 풀 쑤듯 저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엄청난 고난이고 의외로 길다는 것만 알 뿐이다.

 

②소금 간은 필수, 거기에 들기름을 두르면 찰 지게 잘 되는 비법은 전수 받았다.

 

③이왕이면 집간장이 좋지만 그냥 시중에서 파는 진간장도 무방하다

 

④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데 묵간장에는 볶은 깨가 빠지면 안된다. 되도록 많을 수록 좋다. 

 

⑤모든 양념장의 레시피가 거기서 거기지만 여기에 참기름은 살짝, 뭔가 심심하다면 약간의 파를 썰어 섞는다. 파가 과하면 씹을 때 묵이 씹히는 맛이 덜하므로 양 조절을 잘 해야 한다.

 

⑥간장이 흐르지 않고 매끈한 묵의 표면에 ‘찍힐’ 정도의 농도면 좋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기자의 다른기사보기 >

이시각 주요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