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뉴스 전체보기

닫기
더보기닫기

[비바100]“두 유 노 비빔밥?”

[이희승의 영화 보다 요리] K콘텐츠 속 비빔밥
영화 '30일'의 개싸라기 흥행과 더불어 비빔밥 열풍
구글 '올해의 검색어' 1위 등극

입력 2023-12-21 18:00
신문게재 2023-12-22 12면


 

97
 

불타는 사랑을 하는 사이라도 식성은 다르다. 개천에서 용난 남자는 “두유 노우 비빕밥?‘(Do you know bibimbap?)을 외치며 늘 밥 타령이다. 하지만 여자는 파스타를 즐긴다. 올해 조용한 흥행을 이끈 영화 ‘30일’은 불타는 사랑을 했지만 모든 게 상극인 남녀의 이야기다. 

 

손익분기점 160만을 넘어 200만 관객을 돌파한 이 작품은 서로의 똘기와 소심함을 견디지 못한 부부가 남이 되기 직전 동반기억상실증에 걸리며 본격적인 배꼽사냥에 나선다. 지난달 10일 베트남에서 개봉 후 쟁쟁한 할리우드 경쟁작과 현지 텐트폴 영화를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해외 시장에서도 함박 웃음을 지었다.


영화의 열풍 때문인지 구글은 2023년도 ‘올해의 검색어’ 중 레시피 부문에서 ‘비빔밥’이 글로벌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올해의 검색어’는 한해 동안의 검색량에서 작년 대비 높은 증가세를 보인 동시에 많은 관심을 받았던 검색어를 소개하는 순위다. 한류 열풍에 힘입어 K푸드가 세계인의 식탁으로 영토를 넓히고 있다. 

 

비빔밥1
영화 ‘30일’에서 토종입맛을 지닌 한국인의 일상을 표현한 배우 강하늘.(사진제공=영화사 울림)

 

유튜브와 K콘텐츠로 한국 음식들이 입소문을 타면서 10명 중 8명 꼴로 경험해 본 음식이 됐고 구글 검색량 기준으로 2021년부터 일식을 제쳤다. 비빔밥은 같은 ‘밥’ 문화권인 일본, 중국에는 없는 독특한 음식이다. 한국형 패스트푸드라 불릴 정도로 과거에는 품앗이 일꾼들의 허기진 배와 에너지를 채우는 음식으로 제 몫을 톡톡히 했다.



해외 거주 중인 교민들은 제사음식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면 유독 현지의 반응이 좋다고 귀띔한다. 제사를 지낸 뒤 조상신이 남긴 밥·고기·나물을 후손들이 한데 모아 비벼서 나눠 먹었다는 설이다. 이에 대한한공은 1997년부터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제공하며 세계화에 힘을 실었다. 

 

마이클 잭슨이 처음 비빔밥을 접한 곳도 비행기 안으로 그가 내한할 때 묵었던 특급호텔에서는 세계적인 슈퍼스타의 기호에 맞춰 육류와 고추장을 최대한 줄인 레시피를 개발했을 정도다.
 

비빔밥
올 한해 구글 이용자들은 비빔밥 레시피를 가장 많이 검색한 것으로 알려졌다.(사진제공=구글)

하지만 한국에는 아예 육회를 넣어 만든 비빔밥이 있을 정도다. 날고기에 탄수화물인 밥알을 함께 먹는 민족 아닌가.

 

임진왜란 진주성 싸움에서 남자들 못지 않게 가열차게 돌멩이를 던지던 여성들은 그 바쁜 와중에서 병사들에게 특식(?)을 해서 먹일 정도로 강인했다. 

 

9만명의 왜군이 고작 7000여명 군사가 지키고 있는 진주성을 둘러싼채 사실상 고립 상태였던 이들은 성안의 소를 모두 잡아 잘게 다진 후 나물과 함께 나눠먹으며 결사항전 의지를 다졌다.

 

사실상 마지막 식사였을지도 모르지만 의병과 성안의 사람들은 적이 공격해오기 전 서둘러 한끼를 먹으며 전의를 불태운 것이다. 지난달 전북도의회 정례회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식문화인 비빔밥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비빔밥은 5대 영양소를 손쉽게 고루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요리다. 밥(탄수화물), 고기·계란(단백질), 각종 채소(비타민, 미네랄), 참기름(지방) 등으로 이뤄진 비빔밥은 균형 잡힌 식사의 필수요소인 곡류, 단백질류, 채소류, 과일류, 유제품류, 유지 당류 등 6가지 식품군을 모두 아우른다. 하지만 비빔밥은 굳이 이런 조건이 아니어도 누구나 쉽게 만들고 먹을 수 있는 대중성으로 사랑받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드라마의 한 장면을 꼽자면 국민드라마로 추앙받았던 ‘응답하라 1988’ 정봉(안재환)의 나물사랑이 아닐까 싶다. 무려 7수 중인 그는 대학입학을 위해 절로 들어간다. 공부머리만 빼고 모든 게 박식한 그는 음식에도 남다른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다. 

 

비빔밥2
엄마 미란이 집을 비운 사이 평소에 못 해본 것들을 잔뜩해보는 정봉이네. 밥과 반찬을 잘 챙겨먹으란 말에 양푼에 넣고 비벼 먹는 삼부자의 모습이 큰 웃음을 자아냈다. (사진제공=tvN)

 

고기와 자극적인 양념없이 절밥만 먹을 걸 우려한 이웃들의 걱정에 정봉이 엄마(라미란)는 “라면 다음으로 좋아하는 음식이 나물”이라면서 “그렇게 (비빔밥만) 먹고 살찌기는 쉽지 않다”고 한탄한다.  

 

비빔밥의 번외편은 역시나 도시락 세대인 7080의 점심시간이다. 정봉이의 이웃인 덕선(혜리)은 친구들과 점심시간마다 양푼에 도시락을 비빈다. 고추장을 담당하는 친구, 참기름을 가져오는 친구, 아예 밥만 담당하는 친구도 있다. 아무도 숟가락만 얹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고 특유의 예의와 배려가 가늠되는 대목이다.

고 이어령 전 장관은 한국 비빔밥을 ‘한국문화의 진수’라고 단언했다. 섞고 비비는 과정에서 ‘나눔’이나 ‘가름’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면서도 결국은 화합해 제3의 맛을 보여주며 ‘맛의 교향곡’이라 추켜세웠다.“비빔밥처럼 무엇이든 섞고 보는 것이 한국인의 융복합 유전자”라며 실제로도 비빔밥을 즐겨 먹은 것으로 전해진다.  

 

dosirakbibimbap
'응답하라 1988' 덕선이는 점심시간이면 학교에서 양푼비빔밥 제조에 나선다.(사진=TV화면캡처)

사실 온전히 비빔밥을 위해 나물을 무치기에는 시간과 정성이 너무 들어간다. 그렇다고 남은 반찬만 모아 식은 밥에 비벼 먹기도 뭔가 모양 빠진다. 비빔밥의 기본 조건은 양질의 기름과 막 부쳐낸 계란 프라이다. 그게 겉면만 살짝 익힌 반숙이거나 완전히 익힌 완숙, 날계란이어도 계란이 빠진 비빔밥은 샴푸없이 머리를 감은 것마냥 개운하지가 않다.  

 

갓 짜낸 참기름이든, 산패된 들기름이든 비빔밥에 아보카도 기름이나 코코넛 기름만큼 겉도는 것도 없다. 비빔밥에는 무조건 깨의 응축된 기운이 들어가야 한다. 갓 지은 밥이든, 냉장고에 일주일을 보관한 밥이든 일단 비비면 맛은 얼추 보장된다. 문제는 같이 비비는 재료인데 계절 혹은 개인의 기호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고추장으로 양념한 도라지무침과 갓 무친 부추, 식은 전은 죽은 비빔밥도 살린다. 비빔밥 앞에 ‘꼬막’ ‘장조림’ ‘성게’가 들어가 있다면 그저 즐기면 된다. 메인이 되는 재료가 있는 비빔밥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비빔밥의 식감과 맛을 일취월장시킨다는 점만큼은 확실하다. 

 

영화 관상
영화 ‘관상’(사진제공=쇼박스)

 

영화 ‘관상’에는 희대의 관상꾼 내경(송강호)이 처남 팽헌(조정석)과 함께 한양을 주름 잡는 연홍(김혜수)의 기방에서 부러질 듯한 한상을 대접받는 장면이 나온다. 눈이 휘둥그레 해지는 천하일미의 맛에 자신도 모르게 손과 입이 가자 무안해진 그들은 바로 정신을 차린다. 왕의 마음조차 치마폭에 쥐락펴락하는 기생들은 관상을 보는 부자의 재치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하지만 반전은 다음 장면이다.

굶주리고 핍박받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양반들과 고위관직들이 주로 드나드는 기방에서 평소에 맛보지 못하는 음식을 먹었지만 결국 ‘먹었다’라는 느낌이 드는 건 늘 먹던 밥에 반찬을 아무렇게나 비빈 투박한 한 그릇이다. 

 

소박한 반상에 허겁지겁 밥을 비벼먹는 ‘헛배’ 부른 주인공들의 모습을 한데 아우르는 포용 보다는 피의 정치를 벌인 수양대군을 빗대며 이후 역사의 비극을 암시한다. 만약 이 장면에서 국밥이나 백숙이 나왔다면 서민적이기는 했어도 뭔가 와닿는 강력한 한방은 덜했을 것이다.

사실 비빔밥처럼 정성이 들어간 음식도 드물다. 남은 반찬이라고 해도 그 반찬들을 일일히 썰고 볶고 양념한 정성과 시간을 생각하면 ‘비빈다’라는 행위는 노동력의 끝판왕이다. 제철 야채를 얹고 한국산 들깨와 유기농 달걀 노른자가 들어간다면 가격은 한 그릇당 3만원도 저렴할 지경이다. 한국인은 여기에 그릇까지 돌솥을 써 따듯한 온기와 누룽지까지 챙겼다. 이래저래 비빔밥은 한국인의 밥심을 이끈 일등공신이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비빔밥은 젓가락으로 비벼야 제 맛?!

bibimbap-4887394_1280
● 일명 탕수육의 ‘찍먹’(소스에 찍어서 먹는) vs ‘부먹’(소스를 부워서 버무려먹는) 논쟁과 비슷하지만 개인적인 추천은 역시나 젓가락이다.

● 과거 비빔밥에 최적화된 도구를 투표하는 설문조사에서는 숟가락과 젓가락 파가 팽팽하게 갈렸다. 밥알의 식감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사람은 젓가락으로, 양념이 잘 배어야 한다는 사람은 당연히 숟가락 파다.

● 하지만 젓가락의 용도를 따지면 비빔밥은 숟가락으로 먹어야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밥이다. 젓가락은 타인과 공유하는 반찬을 ‘집어먹는’ 용도 아닌가.

● 맛으로 따지자면 확실히 숟가락은 밤의 질척거림과 퍼짐이 강했고 젓가락은 양념이 걷도나 싶다가도 들어가는 재료의 씹는 맛이 달랐다.

● 결국 비비는 도구가 젓가락일지언정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하니 비빔밥은 여러모로 평등한 음식이다.

 

 

기자의 다른기사보기 >

브릿지경제 핫 클릭
브릿지경제 단독
이시각 주요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