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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체 복원능력이 100%인 남자가 사랑에 빠진다. 어둠의 세계에서 괴물로 불렸던 그는 국가의 부름을 받고 온갖 비밀 작전에 투입된다. 사람들은 뼈가 부서지고 피를 분수처럼 흘려도 금세 복구되는 그를 무서워한다. 하지만 그 너머에 눈물 많고 길치인 남자, 그 남자의 진심을 알고 결혼한 여자는 매달 한달에 한번 고기를 먹으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간다. 남자는 몰랐다. 그때가 아내의 배란일이고 힘 쓰기 전에 배불리 먹이겠다는 일종의 신호였음을.
사실 남자의 직장생활은 고단하기 그지없다. 늘 현장의 최전선에서 뛰던 그가 배치된 부서는 총무부로 몸이 아닌 숫자와 싸우며 힘든 하루하루를 견딘다. 직장인의 필수품이라는 사직서를 품에 안고 출근 하는 것도 이제 지쳤다. “쓸모가 없어진 기분이 든다”는 남편의 푸념에 아내는 “넌 나의 쓸모야. 난 너의 쓸모고”라며 입안 가득 고기쌈을 싸서 우겨넣는다. 그 말에 감동받은 남자는 눈물을 닦다 말고 “쌈이 너무 커서…”라고 얼버무린다.
“넌 나의 쓸모”라며 회사에서 쓸모없음을 느끼는 남편의 입에 한 가득 쌈을 넣어주는 ‘무빙’의 한 장면.(사진=디즈니플러스 캡쳐) |
올해 디즈니+의 늦둥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무빙’의 이 장면들에서 사람들은 ‘쓸모’라는 대사에 열광했지만 실제 배우 곽선영이 싸서 입에 넣어준 상추의 연두빛 싱싱함을 자세히 봤다면 분명 침이 고였을 것이다. 한국 요리의 한 종류인 쌈은 밥이나 고기 등을 채소에 얹어 싸먹는 방식을 말한다. 쌈에 들어가는 채소로는 상추, 배추, 치커리, 깻잎 등이 있다. 21세기 초 웰빙 열풍이 불면서 채식 식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외식 식단으로 ‘쌈밥’이라는 메뉴가 등장하기도 했다.
‘싸다’의 어간 ‘싸-’에 명사화 접미 ‘-(으)ㅁ’이 결합한 단어인 ‘쌈’의 기원은 고구려까지 올라간다. 당시 상추의 종자를 사기 위해 천금을 주고 샀다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천금채’로 불렸는데 신라시대에 주먹밥을 김에 싸먹는 복쌈이 있었다고 하니 뭔가를 싸먹는 방식은 꽤 오래된 문화임에는 틀림없다.
쌈은 왕실에서도 즐겨 먹을 정도였으나 조선 후기에 와서는 평민들에게도 보급돼어 대중 음식이 된 후로는 양반들은 잘 안 먹는 음식이 됐다. 정약용이 귀양 가서 집으로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여기는 반찬이라고는 별로 없어서 상추에 그냥 밥을 싸먹는다’며 한탄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고급 요리라면 절대 이런 한탄을 안 했을 테니 흔한 음식임이 가늠되는 대목이다.
고종은 상추쌈을 즐겨먹었는데 생선조림, 새우볶음, 고기조림, 약고추장 등의 다양한 재료를 넣어 수라상에 올렸다. 대중적으로 쌈 안에 들어가는 것은 주로 밥이나 고기다. 겉에 싸는 잎의 대표격은 역시 상추인데 호불호가 갈리는 깻잎과 당귀 등이 식탁에 자주 오른다. 쪄서 부드럽게 만들어 싸먹는 호박잎과 양배추의 부드러움을 경험해 봤다면 익힌 채소가 주는 색다른 맛이 얼마나 중독적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잎이 아닌 미역이나 다시마 같은 해조류도 쌈의 종류에 들어가는데 단백질과 무기질이 풍부한 곰피는 한번 싸 먹으면 잊을 수 없는 맛이 일품이다. 미역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울퉁불퉁한 표면에 구멍이 뚫려 있어 곰보 미역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실 쌈은 혼자 먹기에는 좀 과한 경향이 있다. 쌈 문화는 음식을 먹는 행위를 넘어 사람들 간의 소통과 취향을 나누는 자리에 더 매력을 더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와 함께 쌈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유대감 형성과 사회적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드는 중요한 시간이 된다.
무엇보다 쌈 싸먹기는 영양과 맛을 조화시키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전문가들은 다양한 신선한 재료를 함께 먹으면 다양한 영양소를 고루 섭취할 수 있어 건강한 식습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다양한 소스와 양념을 활용해 식재료마다 다양한 맛과 풍미를 느낄 수 있어 식사가 더욱 풍부해지기도 한다.
대세 방송인 풍자가 38kg 체중 감량 소식과 함께 공개한 레시피에는 아예 쌈장을 만드는 방법까지 나와있다. 일명 ‘풍자 쌈장 레시피’로 저염 쌈장에 참치, 청양고추, 마늘 등을 섞고 현미밥 약간에 얹어 먹는 방식이다. 그는 최근 방송을 통해 “많은 분이 따라 해서 드셨는데 너무 맛있어서 도리어 10kg씩 쪘다는 분들이 많다”면서 “밥을 조금 넣고 쌈장도 적게 해서 쌈을 싸 드셔야 한다. 맛있으니까 밥 한공기가 뚝딱인데 절대 그렇게 드시면 안 된다”는 당부를 전하기도 했다.
바라만 봐도 좋은 초록색 잎사귀는 한 번 삶았을때 더 진해진다. 여름내내 나의 식탁에 올랐던 호박잎쌈.(사진=이희승 기자) |
내 최애 쌈은 뭐니 뭐니 해도 호박잎이다. 누군가 호박 뿐 아니라 그 잎도 이렇게 맛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 보면 분명 천재가 아닐까. 잎이 두꺼운데다 까칠 까칠한 털이 수북한 호박잎은 사실 따기도 쉽지 않다. 넓은 잎사귀만큼이나 줄기도 굵고 상추나 깻잎처럼 똑하니 따 지지도 않는다. 그렇게 줄기까지 따왔으면 굵은 심지를 살살 벗겨내야 한다. 그렇게 두번의 손질과정을 거쳐 수증기에 쪄 내면 진한 녹색을 지닌 보들 보들한 잎사귀가 숨이 죽은 채로 조신하게 퍼져있다.
호박잎을 오래 찌면 약해져서 잘 찢어지기 때문에 옛 선조들은 뜸을 들이는 시간에 밥 위에 올려 시간도 절약하고 불도 아끼는 일석이조의 방식을 쓰기도 했다. 김장철을 앞두고 작년에 담갔던 푹 익은 김치를 쌈 싸 먹는 것도 10월의 별미다. ‘묵은지’라 불리는 이 쌈은 오래 숙성된 김치일수록 감칠맛이 남다르다. 너무 시어서 쿰쿰 해진 김치를 흐르는 물에 잘 씻고 반나절 정도 담궈둔다. 새살을 드러낸 김치의 색은 살색에 가까운 노란색이다. 혹자는 여기에 비슷한 길이의 베이컨을 말아 먹기도 하고 반으로 잘라 쌈 채소 대용으로 고기를 싸서 먹기도 한다. 싱싱한 채소가 주는 아삭함은 없지만 묵은 김치가 주는 세월의 맛은 어떤 고기든 무한대로 들어가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주말농장에서 키우는 상추는 따 먹는 족족 두배로 빨리 자라는 탓에 결국 다 먹지 못하고 상추꽃이 피기도 했다.(사진=이희승 기자) |
캠핑 등 가을 나들이 철에 많이 찾는 쌈 채소 가격이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 한 대형마트에 진열된 쌈채소들.(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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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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