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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경제의 ‘신간(新刊) 베껴읽기’] <판문점의 협상가 정세현 회고록> 정세현

변곡점 맞은 남북 관계...그래도 교류협력만이 답인가?

입력 2020-07-14 07:00

 

 

부제 ‘북한과 마주한 40년’이 말해주듯, 저자는 남북 협상의 현장에서 평생을 보낸 북한 전문가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부터 청와대와 통일부, 북한문제 전문연구소 등을 두루 거쳤다. 덕분에 그는 지금도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에 적지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한미워킹그룹와 별개의 독자적인 대북 문제 해법이나 창의적인 해법 등 이인영 통일부장관 후보자가 최근 언급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저자의 지론과 상당히 맞닿아 있어 보인다. 저자는 실제로 이 책에서 “한미동맹은 결코 깨질 수 없으며, 주한미군 철수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전제 하에 도발적인 주문을 한다. 유엔 제재와 별개로 개성공단을 다시 재개하는 문제 등이 대표적이다. 현 통일안보 라인이 제 역할을 못하고 미국에 끌려다니고 있다고 나무라기도 한다. 통일이 우리만 합의한다고 될 일은 아니기에 다소 과격한 주장이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국제 역학관계 속에서 북한 문제의 슬기로운 해법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일독을 권한다.   

 

 

 

* 86 아시안게임을 원했던 북한 - 1980년 이후 우리가 확실히 경제적 우위를 점하는 사이에 북한은 제로(0) 성장 상태였다. 우리가 1981년에 88올림픽을 유치한 것을 보고 자극받은 북한은 대신 86 아시안 게임 유치를 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올림픽 예행 연습차 아시안게임까지 유치하라는 특명을 내리는 바람에 북한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북한이 눈을 돌린 것이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이었다. 결정권을 갖고 있던 소련을 설득해 간신히 허락을 얻어 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대회 유치가 북한 경제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고 한다.

 

* ‘아웅산 테러’에 강경대응 않은 전두환 정부 - 88 서울올림픽과 86 아시안게임까지 유치한 우리 정부는 1983년에는 이산가족 상봉 방송을 내보면서 북한을 더욱 자극했다. 그 때 국민들이 모두 북한을 저주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북한이 아웅산 테러로 앙갚음을 한 것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당시 강민철이라는 북한 공작원이 버마 랑군 앞바다에서 잡혔는데도, 우리 정부의 강경대응이 없어 모두들 의아해 했다. 당시 한반도에서 또 전쟁이 일어나길 원치 않았던 미국이 말려서 였다고 저자는 전한다. 이후 북한이 남북 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을 제의했다. 결국 회담은 결렬되었지만 북한은 아웅산 사건에 대해 면죄부를 받게 되었다.  

 

* 남한 수해와 북한 수해물자, 이산가족 상봉 - 1984년 8월말 엄청난 폭우로 남한 곳곳에서 수해가 발생했다. 9월 초 북한이 수해물자를 지원하겠다는 제의를 해 왔다. 처음에는 적십자총재 이름으로 거절의 서한을 보냈다가 “그동안 숱하게 위장평화공세를 북한이 펼쳐왔는데 다시는 그런 장난을 치지 못하도록 받아버리자”고 한 저자의 의견이 받아들여 졌다고 한다. 북한은 예상 밖의 남쪽 변화에 다급히 1000톤에 이르는 쌀과 시멘트 등을 구하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고 한다. 당시 내려온 쌀과 시멘트 품질을 보고 북한의 당시 아려운 경제 현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적십자회담이 이어지고 1985년 추석 무렵에는 이산가족과 예술단원 50명이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다. 

 

* 1987년 KAL기 폭파는 우리 자작극? - 이 책의 대담자인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는 최근 미얀마 해상에서 잔해가 발견된 것 등을 기초로 이 사건이 대선을 앞두었던 우리 정부의 자작극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구심을 제기한다. 이에 저자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던 것을 보면 능히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고 말한다. “북한이 남측에 대한 앙갚음으로 일을 저질렀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말도 이어진다. 그렇지만 물증이 없어 근거없이 말하기는 어렵다고 한 발 물러선다.

 

* 1986년 김일성 사망설 헤프닝 - 판문점 북쪽 북한의 기정동에 가로 27m, 세로 18m 짜리 대형 인공기가 걸려 있다. 그런데 우리 관측병이 인공기가 바람에 말려 마치 조기(弔旗)처럼 보이자 윗선에 보고했다. 이를 이기백 당시 국방장관이 “김일성이 죽었다”고 청와대에 보고한다. 하지만 며칠 후 김일성은 몽골 대통령 환영 행사에 건재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의 낙후된 정보력 수준을 들킨 사례였다. 저자는 오산 공군작전사량부 통신감청실에 한국군이 들어갈 수 없다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왜 과학장비가 필요하고, 전시작전통제권이 필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고 전한다. 정보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 미국의 북한 수교 요청 거부가 북핵을 불렀다? - 저자는 1992년 1월에 열린 북미 간 최초의 고위급 회담에서 북한이 주한미군 계속 주둔의 조건으로 수교를 맺자고 했을 때 미국이 이를 수용했다면 북핵 문제가 안 생겼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북한이 곧 붕괴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IAEA를 시켜 북한을 전부 뒤지라고 했고, 북한도 이에 분개해 NPT 탈퇴를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92년 5월 북한이 핵 시설에 대한 최초 보고서를 제출한 후 IAEA가 첫번째 임시사찰을 나가 조사해 보니 플루토늄 추출량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미국이 추가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궁지에 몰린 북한이 극단의 선택을 하기에 이른 것이라는 얘기다. 

 

* “서울 불바다” 발언의 진실 - 1994년 3월19일 판문점에서 남북 부총리급 회담을 위한 5차 실무회의가 열렸다. 이 때 우리 측 대표인 송영대 통일부 차관이 먼저 북한에 “그런 식으로 핵을 가지려면 온전치 못할 거요”라고 위협적인 말을 꺼냈다. 그러자 북한 박영수 대표가 “뭐야?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아! 불바다가 될 수 있어”라고 맞받아 쳤다. 미국은 북한을 거칠게 다뤄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의 이 발언은 ‘북한은 저런 놈들’이라는 인식을 주도록 대대적으로 보도케 했다.

 

* 김일성 사망으로 무산된 남북 정상회담 -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은 취소되었다. 이 때 김영삼 대통령은 바로 전군경계령을 내렸다. 북한 입장에서는 굉장히 적대적으로 느꼈다고 한다. 특히 우리는 정부 차원의 조문단도 보내지 않았고, 문익환 목사가 방북하겠다는 것도 말렸다. 북 측은 이에 “인륜도 모르는 천치 바보”라며 극단적인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고 말해 북한으로 하여금 기대를 낳게 했으나, 북한의 NPT 탈퇴로 마음이 돌아선 것 같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 일 저지르고 사과는 미국에 하는 북한 - 1996년 9월18일에 북한 잠수정이 강릉에서 우리 어민들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올라온다. 총격전이 벌어져 일부 승조원은 사살되는 등 군사적 적대행위가 분명했음에도 북한은 발뺌을 했다. 하지만 이 일을 사과하지 않으면 더 이상 상종 않겠다고 압박하자, 북한은 12월29일에 남한 정부가 아닌 미국에 공개 사과를 한다. 작전통제권도 없는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그러면서 미국이나 우리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서로 함께 노력하자”며 물타기를 했다.

 

* 김대중 정부에 통일부 차관으로 발탁되지만… - 저자는 김영삼 정부 때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음에도, 정적인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1998년 3월 9일에 통일부 차관으로 발탁된다. 당시 인수위원장에게 중국이 도시 5곳의 개방으로 개방을 시작했던 전례를 북한도 따르게 해야 한다”고 보고한 것이 배경인 듯 하다고 회고한다. 나중에 김 대통령 서거 후 수첩에 “정세현. 대북 전문가는 많지만 전문성과 리더십을 겸비한 사람은 그 하나 뿐이다”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듬해 1999년 5월 이른바 ‘옷로비 사건’으로 대폭 개각이 이뤄지면서 그는 청와대를 나와야 했다. 그렇게 나온 12명 차관들이 천안 상록 골프장에서 ‘삼구회’를 조직하게 된다. 이곳에서 이후 3명의 장관이 나왔다고 한다

 

* 현대그룹과 대북 투자 상한선 500만 달러 - 김대중 정부는 500만 달러로 묶여 있던 대북 투자 상한선을 풀어주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곧바로 금강산 관광사업을 하겠다고 나서면서 유명한 소떼 방북이 이뤄지게 된다. 현대는 이미 1989년에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금강산 사업에 대한 양해각서 비슷한 것을 받아둔 상태였다. 하지만 1992년 대통령 선거에 나갔다는 죄로 YS 정권에서는 꺼내지도 못하고 있다가 정권이 바뀌자 들이민 것이다. 금강산에 배를 댈 부두를 지으려면 500만 달러 갖고는 안되니(실제 장전항 부두 공사비는 1억5000만 달러) 상한선을 철폐해 준 것 같다고 저자는 회고한다. 요시다 다케시라는 일본 교포가 북측과 정주영 회장의 다리를 놔주었다고 한다.    

 

* 대북 송금사건의 실체 - 현대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대북 사업을 본격화하려 했다. 북에서는 현대에 외환반출 상한선을 넘어서는 돈을 요구했고, 현대는 이를 편의를 봐 달라고 국정원에 부탁을 한다. 이에 국정원에서 이근영 산업은행 총재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 대북 송금 사건의 실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 송금의 편의를 봐 준 것이 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 얘기하는 ‘돈을 주고 정상회담을 샀다’는 말은 그래서 억측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 “금강산과 개성공단, 우리가 그냥 하면 된다” - 금강산 관광 중단이나 개성공단 조업 중단은 행정명령에 불과하며, 우리 국무회의에서 결정한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유엔 제재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래서 “저질러 버리면 된다”고 말한다. 지금은 청와대 국가안보실로 모든 권한이 넘어간 상태라 완전히 ‘옥상옥’이라며, 국가안보실장이나 하다 못해 비서실장이 “저질러 버리시죠”하면 되는 문제인데 그걸 못하고 있다고 현 통일안보 라인을 질타한다.  

 

* “북한은 악의 축”이란 한 부시를 설득한 DJ - 저자가 통일부 장관으로 발령을 받은 직후인 2002년 1월29일에 부시의 이른바 ‘악의 축’ 발언이 터졌다.북한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2002년 2월20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 참석차 방한한 부시 대통령은 도라산역 기자회견에서 “나는 북한을 침공할 의도가 없다”고 말한다. 김 대통령이 과거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규정해 놓고도 끊임없이 대화를 해 성공했다는 교훈을 들려주며 부시를 설득한 것이다.   

 

* 개성공단? 우린 원래 해주를 원했다 - 정주영 회장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해주를 공단으로 만들는 걸 합의하길 원했다. 하지만 북한은 해주가 군사기지라 안된다며 신의주를 추천했다. 밀고 당기기가 게속되다 결국 개성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북한 군부가 들고 일어났다. 김정일 위원장이 “그러면 개성은 누가 먹여 살린건가? 군부가 먹여 살릴건가”하고 대노했고, 군부가 찍소리도 못하고 내놨다고 한다. 당시  일차로 800만 평 공장을 들리려면 최소한 35만명의 노동자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김정은 위원장은 “내가 인민군 35만명을 제대시켜서라도 노동자로 공급할테니 걱정말고 공장 지으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1인당 인건비도 잔업 및 휴일 수당은 별도로 하고 기본 57.5달러로 시작해 3년후부터는 연 5%씩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1인당 300달러를 주장하던 북한이 베트남 등의 상황을 파악해 본 후 합의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 때 북한도 경제에 관한 한 협상이 가능한 사람들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 연평해전으로 한일월드컵 결승전 차질 빚을 뻔 - 2002년 6월30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전날인 6월29일에 2차 연평대전이 터졌다. 1999년 6월15일 1차 연평대전에서 우리가 승리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그런데 북쪽에서 청와대 우리 외교안보수석에게로 급전이 왔다. “절대로 이것은 평양의 지시가 아니다. 일선에서 일어난 사고일 뿐이니 확대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 대통령도 본래 일정대로 일본으로 갈 수 있었다. 

 

* 강경파 볼턴의 등장 - 부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른바 강경파 네오콘들이 속속 포진하게 된다. 부시 정부는 내내 남북 교류협력 활성화 움직임에 불만이었다. 2001년 3월 워싱턴에서 열린 첫 번째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는 김 대통령을 “this man”이라고 하대했다. 그 부시 1기 내각에 국무부 차관을 지냈던 본 사람이 존 볼턴이었다. 그해 7월 서울에 온 그는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만들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증가가 있느냐고 임동원 통일안보외교 특보의 질문에 그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압박하면 자백할 것이다”라고 자신 있어 했다고 한다. 나중에 강석주 제1부부장이 “우리는 당신네들이 문제 삼는 프로그램 말고 그 이상도 가질 권리가 있다. 그러면 어쩔 것이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미국 측은 북한이 사실을 시인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시종일관 북한에 강경했던 볼턴은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중용되더니 결국 팽 당했다. 저자는 볼턴을 포함한 미국 싱크탱크나 정부 관료들이 대개 로스쿨 출신이라며 “이들은 북한을 범법 국가라고 생각한다”고 전한다. 범법자에게는 벌을 줘야 하는 것이지. 보상은 안되는다는 것이다. 존 볼턴도 예일대 로스쿨 출신이다. 

 

* 천안함 사건과 조작설 - 2010년 3월에 천안함 사건이 터졌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소행으로 일찌감치 단정하고 있었다. 그란데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가 이명박 정부의 조작설을 제기한다. 미 CIA출신인데다 당시는 한미 연합훈련 중이었기 때문에 미국이 아무런 근거없이 그렇게 말하진 않았을 것이란 관측이 돌며 논란이 증폭됐다. 특히 당시 일본 총리였던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가 후텐마 해병대 비행장을 오키나와현 외곽으로 옮기려던 때였다. 천안함 사건이 북한 소행이라고 해야 이전 문제가 쑥 들어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6월 지방선거를 앞둔 5월24일에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천안함은 북한 소행”이라고 발표해 버렸다.    

 

* 5.24 조치에 대한 보복 ‘연평도 포격’ - 2010년 천안함 사건으로 남북 관계는 완전히 냉전 상황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당시 군부에서도 당장 북한을 치자는 얘기가 나왔으나, 그렇게되면 당장 전쟁이고 우리는 작전통제권도 없는 상황에서 무슨 응징할 권한이 있느냐는 현실론에 막히게 된다. 저자는 “결과적으로 연평도 사건은 이명박 정부로 하여금 남북관계를 불가역적인 적대관계로 끌고 갈 수 있도록 하는 명분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 노무현 대통령의 ‘도리’ - 저자는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4월에 장관급 회담을 하러 평양에 가면서 보고하러 들어갔다가 대북 지원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대북 지원을 나는 인도주의도 아니고 동포애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우리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고 저자는 회고한다.

 

* 통일대박론과 북한붕괴론의 환상 - 박근혜 정부도 처음에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온건한 대북 정책을 표방했다. 하지만 정작 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을 보니 말과 행동이 완전히 다르더라고 저자는 회고한다. 박근혜 정부 출범을 열흘 앞둔 2월13일에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비핵 개방 3000과 같은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 박 대통령은 2014년 1월6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며 그 해 7월에는 통일준비위원회까지 출범시켰다. 북한 붕괴론에 빠진 것이다. 1월 중순에는 남재준 국정원장이 “2015년에는 자유 대한민국 체제로 조국이 통일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해 논란을 빚었다. 

 

* 중국이 우리를 도울 것이란 박근혜의 오판 - 2015년 9월에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 전승절 기념행사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오른편에 서 천안문 성루에 올랐다. 저자는 “중국이 북한 붕괴 후 남한의 흡수통일에 협조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박 대통령이 중국에 갔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미국이 크게 반발하자 결국 연말에 사드 배치, 위안부 문제 합의, 한일 지소미아(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등 미국의 3가지 핵심 요구를 모두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저자는 박 대통령의 대북관이 최순실의 작품인 것으로 단정하는 듯 하다. 그는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6년이나 한 사람이 국내외 정치 식견이 그렇게 없나”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특히 개성공단은 한국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완화해 주던 곳이었다며 안타까와 했다.

 

* 북한 미사일 개발은 ‘대북송금’ 아닌 ‘군수경제’ 덕분? - 박근혜 대통령은 개성공단 폐쇄 결정을 하면서 “1995년부터 2015년 연말까지 20년 동안 남쪽에서 북쪽으로 간 돈이 30억 달러에 이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자는 개성공단이 가장 번성했을 때 연간 1억 달러가 안되는 돈이 북한으로 들어갔다고 반박한다. 특히 총 30억 달러 중 70~80%가 현금이 아닌 쌀이나 비료 등 현물이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북한이 2006년에 최고 6000km에 달하는 대포동 2호 미사일을 쏘자 이를 말리는 미국 측에 ”이것은 우리의 수출용 판촉행사“라고 말했다며, 미국도 북한이 미사일 판매로 매년 10억 달러 씩 벌어들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전한다. 저자는 북한의 군수공업위원회가 별도로 돈을 벌어 쓰기 때문에 핵과 미사일은 군수경제 쪽에서 번 돈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고 단언한다.     

 

* 문재인 정부의 업적과 한계 - 보수 쪽에서 엄청난 반발을 가져왔던 9.19 군사합의에 대해 저자는 “남북 간 군사 긴장을 완화하는 중요한 합의였다”고 평가한다. 2018년 8.15 경축사의 정신대로, 북한이 원하는 것을 우리가 먼저 합의해 미국이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해 주면 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실무진의 미숙함을 지적하기도 한다. 2018년 10월 문재인 대통령의 유럽 순방 때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대북 경제제재 완화 협조를 제안했다가 거부당한 것은 외교적 망신이라고 까지 혹평한다.  사전 정지작업이 없었던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질타한다. 그는 “북한은 석탄이나 섬유 수출 제재 해제 정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권과 발전권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안전권은 군사적으로 북한을 치지 않겠다는 약속이고, 그 시작은 연합훈련 중단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 군사적 충돌 막을 방법은 경제적 의존도 키우는 길 밖에 - 저자는 군사적으로 남북이 충돌할 가능성을 줄이는 확실한 방법은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군사력을 쓸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당장에 손해가 막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개성공단 폐쇄는 자충수 정도라 아니라 ‘악수 중의 악수’라고 비판한다. 오히려 개성공단을 통해 점점 북쪽으로 올라갔어야 한다고 말한다. 해주공단 남포공단 신의주공단 식으로. 일본이 평양~원산 고속철을 만들고, 중국이 신의주~평양~개성 고속도로를 만들면 한국은 기회를 잃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 한미워킹그룹이 족쇄가 되어선 안돼 - 9.19 군사분야 합의서가 채택되던 날,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은 강경화 외교부장관에 전화를 걸어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11월에 한미 워킹그룹이 생기고 발이 묶이면서 사태가 틀어졌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대통령이 현장 외교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앞으로 한미 워킹그룹이 엄청난 ‘원칙의 굴레’가 될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앞으로 미국이 만들어 놓은 함정에 빠져 사사건건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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