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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나의 하루키… 가상 인터뷰로 위안을!

[이희승 기자의 수확행]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공식적으로 '단 한번도'한국 오지 않은 아쉬움,작품과 에세이 통해 달래

입력 2021-05-11 18:30
신문게재 2021-05-12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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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병철 기자 burnhair@viva100.com

 

대학생이던 큰언니의 책상에서 일본 작가의 책을 우연히 읽었다. 중학교 친구들이 거의 가지 않는 고등학교에 배정받아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시기였다. (당시)국민학교 동창들을 남녀로만 구분해 반을 나눴던 중학교와 달리 여자고등학교의 첫 학기는 다리 건너 잠실과 암사, 고덕동에 사는 다양한 10대 여고생들의 개성이 넘실거리는 과도기였다.

그들 사이에서 외로웠던 나는 대책없이 무라카미 하루키 월드에 입성했다. ‘조금이라도 있어 보이려고 들고 나갔던 책’에 빠진 내 인생의 중요 포인트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모두가 제 2외국어로 불어를 택할 때 언젠가는 꼭 하루키를 만나 대화를 할 거라는 야심찬 포부로 일어를 택했다.

대학시절은 10대에 철모르고 읽었던 ‘양을 쫓는 모험’ ‘댄스댄스댄스’와는 사뭇 다른 세계였다. 혜화동의 올댓재즈와 잡지 ‘PAPER’에 나온 각종 바(Bar)들을 섭렵해도 나는 결코 하루키처럼은 살 수 없었다. 일본의 버블경제의 안락함 속에 하루키 부부는  아테네의 섬 어딘가, 터키,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전역을 두 달씩 돌며 약 3년간 체류한 경험을 ‘먼 북소리’라는 여행기로 내놨지만 나는 IMF를 온 몸으로 겪으며 휴학하지 않은 삶에 그저 감사해야했다.

어쨌거나 그가 일본 작가이면서 이국적인 색채를 가진 건 천운이었다. 지중해 바다를 바라보며 쓴 ‘노르웨이의 숲’이 메가히트를 기록하면서 더 이상 생업으로 소설가를 안 해도 됐던 것도 분명 일조했으리라. 하지만 젠 채하거나 소비적인 인간이었다면 매력이 덜했을 것이다. 편집증환자처럼 모으는 LP판도 5달러가 넘으면 몇 시간이고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라고. 이 섹션(수확행)의 원어이기도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으로 다림질을 꼽을 정도로 그는 일상을 충실히 사는 작가다.

신혼여행지를 산토리니 섬으로 택한 것도 국내 모 음료 CF가 아니라 하루키의 영향이었다. 그가 극찬한 이아 마을의 선셋을 보며 그리스 와인을 마시지 않으면 내 20대의 마지막이 너무 아까울 것 같았기에 발리 혹은 동남아로 대표되던 허니문 관광의 두 세배가 넘는 금액에도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30대에 만난 ‘1Q84’ 시리즈의 여자주인공 아오마메는 또 어떤가. 혹자는 야설로 부를 만큼 빈번하게 등장하는 섹스 장면과 고양이, 빈 우물, 동굴, 쌍둥이 등이 다양한 버전으로 반복되지만 확장되는 세계관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그의 글은 ‘상상력 다한 작가’라고 하기엔 너무 아까울 정도로 언제나 매력적이다. 현지 문학계에서는 이단아이자 왕따로 불리지만 해외에서는 일찌감치 그를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올릴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넘사벽의 인기로 일흔이 넘은 나이에 자신이 직접 노래와 레코드를 트는 라디오 DJ로 나서 눈길을 끈다. 시간은 정해졌지만 방송일은 규칙적이지 않다. 일주일 혹은 이·삼주 간격으로 불특정 어느날 갑자기 방송한다고 하니, 이 또한 하루키답다.

국내에서도 여전히 두터운 팬덤을 자랑한다. 반일감정의 장기화가 정착되면서 국내 매장이 현저히 줄은 유니클로가 일본 현지와는 다르게 몇 개 버전만 내놓은 하루키 티셔츠는 일찌감치 전 사이즈 품절됐다. 어쨌거나 이 인터뷰는 가상으로 진행됐다. 30년 가까이 하루키 팬으로 살아왔지만 결코 하루키처럼은 살 수 없었던, 죽기 전에는 인터뷰이로 꼭 마주하고픈 기자의 어설픈 예행 연습 쯤으로 봐주시길.

하루키책들
간혹 세월이 흘러 제목만 바꿔 출간한 책들이어도 기꺼이 구매한 하루키 책들.책장 한 칸을 가득 채우고 있다.(사진=이희승기자)

 

제가 처음 당신의 작품을 접한 게 17살 때 였습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였는데요. 데뷔작이었죠. 스물 아홉살에 운영하던 재즈 바 부엌에서 일이 끝나면 짬을 내 소설을 쓰셨다고요.

“많이 알려졌다시피 학생때 결혼을 한 뒤 처가의 도움을 약간 받아 가게를 차렸습니다. 창업비의 반은 어린 부부였던 저희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아둔 돈이었고요. 대학을 졸업하고 어딘가에 취직한다는 게 고루해보이는 시절이었거든요. 아마도 사회생활에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지레 했던 것 같습니다. 낮에는 커피를 팔고 저녁에는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만들어 팔았는데 제법 장사가 잘 됐어요. 가게 정리를 다 하면 새벽이었는데 몸은 엄청 피곤했지만 맥주를 마시며 부엌 테이블 구석에서 글을 쓰곤 했습니다. 사실 그 작품이 제81회 군조 신인 문학상을 타게 되리라곤 정말 몰랐죠. 일단 서른 살에 소설가로 데뷔했으니 올해로 42년이 되었군요.”


지금도 응원하는 야구팀인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선발타자가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2루타를 친 순간 불현듯 “글을 써봐야지”했다는 설도 있던데요.

“맞습니다.아무래도 회사원이 아니니까 한가한 시간이 생기면 맥주를 들고 야구장에 가곤했죠. 프로야구 개막전이었는데 그 순간 머리에 스치듯 써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운영하던 가게 이름이 키우던 고양이의 이름을 딴 ‘피터 캣’이었는데 전업작가를 하기로 결심하고는 다른 사람에게 넘겼습니다. 이후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등을 썼죠. 이후 외국에 나가 체류하며 ‘노르웨이의 숲’을 썼는데 일본으로 돌아오니 제 소설의 제목이 흡사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건물을 두르고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그 소설은 한국에서도 꽤 인기가 있었죠?”


저는 그 소설을 ‘상실의 시대’로 읽었어요.(웃음) 이후에는 원제로 나오기도 했지만 지금도 하루키의 초창기 팬들은 이 제목을 기억할 겁니다.

“아직까지 한번도 한국에 가보질 못했어요. 이상하게 인연이 닿지를 않네요. 아…‘스푸트니크의 연인’ ‘1Q84’에 한국인이 등장하긴 합니다. 독자들은 잘 아실테지만요.(웃음) 일단 저는 작가투어에 대한 반감이 심합니다. 미국 에이전시하고도 그 부분에 대한 마찰(?)이 있었고 선을 확실히 그었습니다. 존 업다이크도 사인회와 낭독, 라디오 출연을 하는데 ‘네가 뭔데?’라는 시선은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리셉션과 기자회견, 사진촬영이 적응되지 않아요. 기회가 된다면 개인적으로 한국의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보고 싶은 생각은 좀 있습니다만.”


일전에 마라톤의 마지막 코스에서 ‘맥주, 맥주’하며 뛴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맥주 나라가 있다면 필시 VIP대접을 받았을 거라는 에세이를 쓰기도 했고요. 그러고 보니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을 내셨죠.

“전업 작가의 삶을 사니 확실히 군살이 붙어서 집 주변을 뛰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달리기에 입문했죠. 지금도 매년 풀 마라톤 코스를 완주합니다. 마지막 5km에서는 그야말로 다 뛰고 벌컥 벌컥 마시는 맥주를 위해 달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제 잡문집에도 썼지만 ‘일찍 일어나고 일찍자며 맥주를 좋아하고 조개를 먹지 않는 보통남자’일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루키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제가 이렇게 맥주파가 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중년이 되어 하곤 합니다. 부엌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모임이 생길 정도로 인간 무라카미 하루키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음식은 빼놓을 수가 없죠. 오믈렛, 스파게티, 오징어 초밥, 풍로에 구운 전갱이 등 현지 음식과 더불어 당신만의 레시피가 작품에 드러납니다.

“가장 기쁜 반응이 바로 이런 겁니다. 한 30년 전쯤 제 소설을 읽다가 기숙사를 탈출해 남자친구와 사랑을 나눴다는 편지를 받았던 기억이 나는군요. 음식은 재즈와 더불어 제 삶을 위로해 주는 즐거움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위스키와 와인 등으로 기울고는 있지만 해외에 가면 늘 마시는 술은 현지 맥주와 하이네켄입니다. 밀러나 쿠어스를 발음하면 제대로 가져다 주지를 않거든요. 평소에 자주 해 먹었고 20대 시절 만들어 팔았던 음식들을 글로 쓰는 건 즐거운 일이죠. 에세이에도 썼던 적이 있는데 샐러드의 경우 아내가 ‘세수대야에 가득 담길 정도로 먹는다’고 구박을 합니다.”

하루키
무라카미 T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저/권남희 역 |가격=1만4800원.(사진제공=비채)

 

대학동창인 아내분이 직접 찍은 사진이 들어있는 ‘위스키 성지 여행’도 참 좋았어요. 최근 국내 출간 된 ‘무라카미 T’에서 모아온 티셔츠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전설의 서퍼가 부동산업자가 되어 있는 부분에 나온  ‘아내를 두려워 하는 기분’은 읽다가 크게 웃었습니다.

“우리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으니 일본 경제의 거품이 있을 때 운 좋게 유럽생활을 하게 됐고 미국으로 건나가 교환교수 등을 하며 체류한 경험이 작가로서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당시에 터키나 아테네 같은 곳에 장기체류하는 아시아인은 드물었으니까요. 낮잠과 빈둥거림이 생활인 곳에서는 당시만해도 ‘왜 맨날 달리냐?’는 질문을 받았고 미국에서는 ‘아내의 직업은 뭐냐?’는 물음을 자주 받았습니다. 당시 일본과 다르게 미국은 여성의 사회진출이 당연한 때였으니까요. 그래서 딱히 할말이 없어서  ‘내 사진을 주로 찍는다’고 했죠. 거기에서 출발해 아내가 찍어준 사진으로 여행기가 책으로 나왔고요. 어쨌거나 그런 이국적인 감정이 작품에 녹아들었고 또 독자들이 그런 점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로도 소설 못지않게 인기가 많습니다.

“긴 장편을 작업할 때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작업을 하는데 한 작품에 빠져 있을 때 좋아하는 작가와 나의 일상을 정리하는 글들이 머리에 휴식을 주죠. 리셋을 하게 해주고요. 제 작품을 모두 기억해 두진 못해요. 부끄럽지만 우연히 읽은 번역본이 제 소설인 경우도 있었어요. 재미있었냐고요? 흥미가 생겨 저자를 보니 제 이름이 있었을 때의 황당함이란.”


2000년대에 들어서는 국제적인 위상도 달라졌고 작품의 세계관도 확장되고 성숙되어짐을 느낍니다. 사실 ‘해변의 카프카’와 ‘기사단장 죽이기’는 좀 실망했지만 ‘1Q8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등은 정말 좋았어요.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오르고 해외문학상을 많이 타기도 했던 시기입니다. 특히 2009년  이스라엘 최고의 문학상인 ‘예루살렘 상’을 받은 뒤의 수상소감은 큰 화제였는데요.

“그 전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전쟁에 참전했던 분이셨는데 매일 희생된 사람을 위해 기도했던 분이었어요. 적이든 내 편이든 죽은 사람을 위해서요. 당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에 대해 저는 할 말을 해야 했습니다. 소설가는 자신의 눈과 손으로 직접확인해야 하는 직업이었으니까요. 아무튼 지금도 강자가 얼마나 올바르건 약자가 얼마나 나쁘건 나는 그래도 약자의 편에 서겠다는 제 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제 곧 하루키 문학관이 일본에 생긴다고 들었습니다.

“모교인 와세다 대학에서 ‘국제문학관, 무라카미하루키 라이브러리’를 오픈합니다. 서적, 자료, 음악컬렉션 등등을 모아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간 간직해온 육필 원고와 취미로 모은 레코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 건물의 개축 설계를 유명한 현대 건축가 구마 켄고가 맡았다는군요. 원래는 지난 새학기에 열려고 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미뤄졌습니다. 더불어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지만 이따금 하는 ‘무라카미 라디오’도 많은 관심가져주세요. 언어는 달라도 재즈는 만국공통어니까요.”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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