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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가격 함부로 올리지 마라… 마이 벌었다 아이가!

[이희승 기자의 수확행] 한국인의 유별난 라면 사랑...전세계 소비 1위
삼양,오뚜기,팔도등 '나만의 라면'을 찾는 사람들
국민음식 넘어 각종 사회현상의 '아이콘'으로 군림

입력 2021-09-07 18:30
신문게재 2021-09-08 11면

오뚜기라면1
대한민국에서 라면을 ‘안’먹는 사람은 있어도 ‘못’먹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시내의 한 마트에 진열된 라면의 모습. (사진제공=오뚜기)

 

시작은 가수 장기하가 쓴 에세이 ‘상관없는 거 아닌가?’를 읽으면서였다. 라면을 끓이면서 곁들일 김치로 총각무를 썰었다는 구절을 읽자 머리 속은 ‘갓김치가 더 맛있는데’로 시작해 ‘집에 지금 어떤 라면이 있지?’로 확대되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정수기를 눌러 냄비에 물을 받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라면은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인스턴트로 꼽힌다. 세계인스턴트라면협회(WINA)에 따르면 지난해 소비된 라면은 1165억개였다. 한국은 연간 41억개로 8위에 올라있지만 1인당 소비량에서는 다년간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1년에 79개로 5일에 한개씩은 끓여먹는다는 소리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적은 없지만 굳이 ‘라면의 날’을 따진다면 라면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삼양라면이 처음으로 나온 1963년 9월 15일을 꼽는다. 150도 기름에 튀긴 밀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는 원리를 이용한 이 음식은 ‘라면업계의 대부’로 삼양식품 창업자인 고(故) 전중윤 회장에 의해 최초로 개발돼 생활밀착형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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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전중윤 회장이 처음으로 국내에 출시한 삼양라면의 모습.올해로 정확히 56년 전이다.(사진제공=삼양)

 

1980년대까지 라면의 붐을 주도했던 삼양라면이 우지 파동을 겪기 전까지 라면은 개당 100원이 불문율이었다. 그 당시 동네 슈퍼에서는 10개를 사면 1개나 2개를 더 껴주는 행사를 자주 했다. 한국 먹거리 파동의 시초 격인 우지파동은 원유 상태에선 비(非) 식용이지만 튀기는 등 가공하면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분류된 기름으로 라면을 제조했다는 투서에서 시작됐다.

당시 미국은 고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부산물로 취급해 공업용으로 분류해 수출했고 삼양을 포함한 5개 업체가 정부의 동물성 지방 보급 권고를 따르며 20년간 이 기름을 써 왔던 것이 화근이었다. 오늘날 ‘우지 파동’은 검찰과 식품 전문가들의 무지, 언론의 과장된 보도가 라면업계를 파국으로 이끈 ‘기업누명 잔혹사’로 불린다. 삼양이 자신들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라면 판매를 중단하고 8년 가까이 법정 싸움에 들어가 무죄를 받으면서 일단락됐다. 

삼양식품의 박인웅 과장은 “명예는 회복했으나 이로 인해 입었던 엄청난 피해를 복구할 방법이 없었다”면서 “당시 정부를 상대로 배상금을 청구하자는 의견이 많이 제기됐지만 전중윤 회장은 이를 거절했다. 삼양식품이 이렇게 성장한 것도 나라 덕분이라는 이유였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이후 삼양은 ‘라면의 원조’라는 이미지를 강조해 최근 레트로 열풍과 맞물린 이색 마케팅으로 MZ세대에게 각인시키며 시장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삼양라면1
삼양라면을 먹고 자란 세대들은 이제 대한민국의 ‘허리’가 됐다. 라면의 원조로 돌아온 삼양라면 오리지널.(사진제공=삼양)

 

하지만 그 사건 이후로 집에서 ‘라면=건강을 해치는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았고 적어도 집에서는 라면을 끓여먹지 못했다. 20대가 되고 30대를 겪으며 이경규의 꼬꼬면, 신라면 블랙 등 당시에 큰 화제가 된 라면들이 속속 출시됐다. 하지만 나의 최애라면은 언제나 너구리. 가끔 동봉된 다시마 조각이 두 개 나오는 날이면 세상의 행운이 모두 내 것이 된 착각마저 들게 만드는 마성의 라면이랄까.

라면
무심한듯 꺼내놓은 라면은 역시나 ‘작업용’이었다. 바로 “자고 갈래요?”라고 말하는 영화 ‘봄날은 간다’의 은수.극 중 이영애는 드라마 ‘대장금’으로 아시아를 접수하기 전 라면으로 이미 수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훔쳤다.(해당영화캡처)

 

해가서쪽에서뜬다면
(사진제공=명필름)

 

영화적으로 소비(?)된 라면의 입지는 유독 섹시하다. ‘봄날은 간다’의 이영애가 “라면 먹고 갈래요?”라고 말한 이후 이 대사는 ‘썸을 끝내고 오늘부터 1일’의 대명사가 됐다. 고소영과 임청정이 주연한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은 또 어떤가. 평범한 대학생에서 톱스타가 된 주인공에게 구애하는 라면회사 대표가 라면땅을 디저트로 내오며 소탈함을 뽐내는 신이 등장한다. 극 중 라면 이름은 ‘너면’. 극 중 고소영의 얼굴 위로 “너면 먹고싶다”는 건전한(?) 광고 카피가 뜬다. 지금은 단종된 빙그레의 ‘뉴면’을 PPL로 내세우기 위한 설정이지만 곱씹을수록 탁월한 29금 작명이다.

최근 들어 본 영화 중에서 가장 맛깔나는 라면을 담고 있는 건 단연코 백승환 감독의 ‘첫잔처럼’이다. 소심한 제약회사 영업사원이 마법의 넥타이를 선물받고 자신감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에서 감독은 배우가 직접 끓여먹는 라면을 편집없이 롱테이크로 카메라에 담는다. 주연배우인 조달환이 실제로 자주 끓여먹고 영화계에서 ‘죽여주는 라면’으로 불린다. 그가 ‘무장해제라면’으로 이름 붙인 이 라면은 ‘앙리할아버지와 나’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으로 유명한 연극연출가 이해제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끓인 사람의 이름과 실제 먹은 뒤 느끼는 감정을 엮은 기발함이 눈에 띈다. 국물은 최대한 자작하면서도 면발이 퍼지지 않게 끓이는 게 관건이다. 이에 조달환은 “오뚜기는 면발, 농심은 스프라는 말이 라면 마니아들 사이에서 암묵적인 룰”이라며 영화 속에서는 평소 먹는 진라면이 아닌 신라면으로 끓였음을 고백했다.

라면이미지
예고편만 봐도 라면의 진수가 느껴지는 영화 ‘첫잔처럼’의 한 장면.(영화 예고편 캡처)

 

“실온이 아닌 냉동실에 보관한 라면을 꺼내와 고추와 양파를 넣고 물을 끓이는 게 시작이에요. 그 후 스프와 함께 면을 넣고 2분을 끓이는 거죠. 그 사이 계란 하나를 접시에 준비하는데 노른자는 살짝 터트려 놓습니다. 그리고 불을 1단으로 줄인 채 10시 10분 방향으로 ‘면 위에 얹는다’란 느낌으로 넣어요. 절대 휘젓지 않아야 해요. 그 후 오롯이 1분을 익힙니다. 물의 양이 적기 때문에 찬물을 계속 넣어주고요. 그러면 면이 불지 않거든요. 이 라면의 장점이자 단점은 분명 해장라면으로 끓였는데 먹는 도중에 소주를 부르는 게 함정이랄까요.”

개구진 모습에 숨겨진 다양한 능력으로 영화와 각종 예능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그는 실제로도 연예계의 ‘숨은 라면 고수’로 불린다. 오뚜기와 농심이 CF모델로 낙점할 만한 각종 라면 지식이 휴대폰 넘어 30분간 계속됐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함이 아쉬울 따름이다. 양심고백을 하자면 나만 알고 싶은 레시피랄까.

오뚜기라면
진라면은 가격 인상 후에도 경쟁사 제품보다 저렴하게 시중에 판매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영화 ‘증인’,넷플릭스의 ‘무브 투 헤븐’등에서 광고없이 순전히 창작자의 기호만으로 작품에 등장하는등 유독 높은 브랜드 충성도를 보인다.(사진제공=오뚜기)

 

어쨌거나 라면은 서민 음식의 대표격이자 한국인의 소울푸드로 불리기에 손색없다. 최근 넷플릭스 1위를 기록하고 있는 ‘D.P’에서도 속칭 뽀글이가 등장한다. 봉지에 끓인 물을 넣어 입구를 나무젓가락으로 밀봉해 불려(?) 먹는 그 맛은 군복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천상의 맛으로 불린다. 소재가 가진 비극 사이에서 짧은 시간 등장해 시청자들의 침샘을 자극하는 것. 극 중 선임병으로 나오는 구교환은 “뜨거운 물과 라면 봉지가 만나 나오는 환경호르몬마저 맛있다”며 국물을 들이킨다.

하지만 라면이 마냥 든든하고 맛있기만 한 건 아니다. 한 재벌 기업의 이혼 법정에서는 “면접교섭권으로 만난 아들이 라면이 맛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며 평탄치 않았던 결혼생활을 알리는 아이콘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지난 해에는 이틀에 한번 꼴로 집에 들어온 부모의 방관을 알리며 두 형제를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라면업계에서도 긴 눈치 끝에 가격인상을 단행한 모양새다. 오뚜기는 지난달 진라면, 스낵면 등의 가격을 일제히 올렸다. 진라면은 684원에서 770원으로 12.6%, 스낵면은 606원에서 676원으로 11.6%, 육개장(용기면)은 838원에서 911원으로 8.7% 상승했다. 농심은 지난달 16일 부로 신라면 등 주요 라면의 출고가격을 평균 6.8% 인상했고 삼양식품과 팔도도 이번 달부터 올린 가격을 받고있다. 각각 4년 4개월과 9년 2개월 만의 인상이다.

소비자들 사이에서 ‘갓뚜기’로 불리며 두터운 지지층을 갖춘 오뚜기 역시 2008년 이후 13년 4개월 만에, 농심은 4년 8개월 만에 값을 올렸다. 라면 업계는 인건비, 물류비 등 제반 비용 상승과 원재료비 인상 등의 요인으로 가격인상에 나섰다는 설명이다. 그들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은 라면을 향한 한국인의 사랑은 결코 멈추지 않을 거란 것이다. 그러니 너무 잦은 가격인상 만큼은 하지 말기 바란다. 누군가에겐 생계의 연장인 소중한 한끼일 수도 있으니까.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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