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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미선 기자의 컬처스케이프] ‘양혜규’라는 이름 뒤의 이름들 “결국 사람”

입력 2022-04-02 16:00

양혜규 작가
양혜규(사진제공=국제갤러리)

 

“제가 생각하는 것과 세상의 기대가 다른 경우가 99%예요. 궁극적인 걸 절대 헷갈리면 안되는데 헷갈릴 때도 있죠. 그래서 같은 작가 친구들이나 업계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진언들이나 우리까지 하는 선문답 같은 것들이 중요한 것 같아요.”



국내외에 꽤 알려지면서 겪는 딜레마를 풀어내는 실마리를 양혜규는 “사람에서 찾는다”고 했다. “오해도, 이상한 기대도 많아서 창작자의 역할에 충실하기가 쉽지는 많지만 표현과 자유, 과정과 도구의 구분은 확실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인 걸 잊지 말자는 것”이라는 양혜규는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든 이 안에서 쳐주는 작가들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부연했다.

“현대미술은 컬렉티브한 작업이 많아요. 저 혼자는 못해요. ‘양혜규’라는 이름이 앞에 나서서 그렇지 그 이름 뒤에 엄청난 크레딧이 많이 붙는 거죠. 영화처럼.”


◇여전히 모를 나의 객관화, ‘살림 잘하는 주부’ 양혜규?

양혜규
양혜규(사진제공=국제갤러리)
“저를 초대할 때는 작가로서 관심이 있어서겠죠. 객관적으로 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근데 객관화를 하지 않으면 모르는 게 또 나 자신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 모르겠는 걸 어느 정도 남이 보는 것처럼 해서 아는 것처럼 하려고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진짜 안보이는 게 자신이니까요.”

그리곤 “사실 어떤 때는 제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작업이나 재료, 소재 등 전시에 필요한 걸 팔로업하다 보니 제 취향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며 “사실 취향이 있긴 하다. 소재적 취향이 아니라 태도나 버릇 같은 건데 ‘일을 성실하게 열심히 한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낸다’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태도가 확실히 영향을 준다”고 털어놓았다.

“가까운 분들은 저를 예술적이라고 생각 안할 거예요. 오히려 살림을 열심히 잘하는, 성실한 사람이죠. 쓰레기 봉투는 꽉꽉 채워야하고 청소도 그때그때 해야하고…. 전시를 할 때도 그래요. 예산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어떤 전시를 할지가 나와요. 마치 다 들어줄 것 마냥 ‘뭐 할래?’라고 하지만 어차피 예산은 정해져 있잖아요.”

“책상(협상)에 자신들이 가진 패를 안보이는 미술관이랑 일하는 걸 싫어한다”는 양혜규는 “예산을 중시한다, 금전적 대가를 꼭 받아야한다 등이 반드시 ‘경제적으로만 생각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열심히 따지고 계산하지만 바로 잊기도 해요. 그렇게 망각이 되게 중요하죠. 물론 일을 하다 보면 중간 과정에서 열심히 따지고 계산하고 요구해야할 필요도 있고 많은 걸 배워요. 하지만 궁극적인 건 자유로움이거든요. 그 궁극적인 걸 잊지 않기 위해 배운 건 다시 놔야 하고 망각해야 하고 항상 다시 잃어야 하죠.”

스스로를 “살림 잘하는 주부” “모범생” “엄청난 오지라퍼”라고 정의한 양혜규는 “하다 뒤집어지거나 중단할 것들은 절대 시작하지 않는다. 하기로 한 건 모든 부분을 열심히, 성실하게 임해 끝을 보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스스로를 객관화한 데 따르면 양혜규는 “작품과 전시관 꾸리기는 물론 작업실 청소부터 가계부쓰기, 예산 꾸리기, 팜플릿의 사진 하나까지 관여해 책임지는 스타일”이다.

양혜규
덴마크 국립미술관 ‘이중 영혼’ 전경(사진제공=국제갤러리)

 

“너무 혼자 조몰락조몰락, 이건 제 장점이기도, 단점이기도 해요. 중요한 데 집중하고 나머진 좀 놔야하는데 그러질 못해요. 나쁘게 말하면 많이 분산돼 있죠. 우스갯소리로 친구들한테 ‘나는 주부 같다’고 해요. 가계부도 열심히 쓰고 살림을 엄청 열심히 하거든요. 예를 들어 사이드 프로그램까지 다 신경쓰는 스타일이에요. 젊어서는 전시 초대장까지 제가 다 만들 정도였죠. 사실 ‘모범생’이라는 말도 상당히 미화한 거예요. 굉장한 오지랖에 오버를 하는 거죠.”

스스로에 대해 냉철하게도(?) 분석하고 표현하는 양혜규는 “느끼는 바가 있는데 일이 커질수록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며 “몇십명이 같이 하는 일이고 혼자 다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리곤 “이제는 정말 조금씩 손을 놓으려고 한다”며 덴마크국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 ‘이중 영혼’의 작품들을 설명하는 책자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인 ‘드렁큰 스피치’(Drunken Speech)를 예로 들었다.

“TV 앞에 앉으면 소리가 아닌 완전 다른 소리가 나와요. 싱크로나이제이션(Synchronization)이 안된 상태인데다 조형성도 없이 주절주절 얘기한사운드 작업이죠. 비주얼로 표현하기가 정말 어려운 작업인데 명작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빛이며 느낌이 최고인 사진이에요. 근데 이건 제가 관여를 전혀 안한 사진이에요. 제가 관여한다고 꼭 좋은 결과를 내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죠.”


◇여행이 주는 가장 큰 교훈…우정, 연대, 차이의 인정

양혜규
양혜규(사진제공=국제갤러리)
“어느 순간 제가 해야할 역할이라고 스스로 정의내린 것도 같아요. 세상에는 여러 역할이 있어요. 누군가는 해줘야할 일들이죠. 누군가는 블록버스터 역할을 하고 저는 저한테 제일 자연스럽고 어느 정도 실행 능력이 되는 부분을 제 몫이라고 생각해요.”

일상 및 사회 문제를 깊이 파고드는 작업들, 아카데믹하게까지 느껴지는 역사 및 인류 탐구 그리고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필리핀 마닐라, 두바이, 아랍에미리트, 중국, 북아프리카 등에서 전시를 하는 이유에 대해 “어느 순간 나의 몫이라고 정의한 역할”이라고 답했다.

“모두가 똑같은 걸 할 수는 없으니 제 방식은 아니지만 인정하는 작가들도 분명 있어요. 정치성을 함의하거나 이슈를 건드리는, 저라면 절대 비슷하게도 안할 방식이지만 누군가는 해야하는 부분이죠. 미술의 영역은 넓고 해야할 일도 많으니 제가 못하지만 반드시 해야할 걸 하는 사람들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스스로의 몫으로 지운 역할은 어쩌면 문화적으로 소외되고 아직도 문화적 발전이 요원한 곳으로의 여행이다. 국가주의, 지역 홍보성 등을 지닌 엑스포나 월드컵 등 글로벌 행사 유치에 시니컬하게 반대투표에 나서는 유럽과 달리 그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애쓰고 이해하지 못해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의 일부가 돼보는 여행.

“평생 사는 건 아니지만 그 사회의 일부가 돼보는 거죠. 그를 통해 지역이나 시대를 알아가는 거고 아랍 문화를 어떻게 구현할 수 있나를 고심하게 돼요. 제가 대학다닐 때 진저리나도록 들었던 말이 ‘한국성 구현’이거든요. 그걸 여전히 하고 있는 지역들이 있어요. 아랍의 정체성, 현재와의 공존 등 식상한 얘기같지만 그들에겐 절실한 고민이죠.”

이어 양혜규는 “산업적으로 아랍권은 돈을 벌어보려는 시장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며 “아직도 세계는 그렇게 돌아간다. 이권, 권력 그리고 이해관계로. 특히 아랍에미리트 쪽은 돈과 자원은 많지만 문화예술이 정돈되지 않은 지역”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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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사진제공=국제갤러리)


“콤플렉스의 일부 같기도 해요. 아시아의 문화강국이라는 한중일의 발전은 서구적 모델을 따르고 있어요. 문화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치우쳐 있다고 생각해요. 저 자신도 유럽(독일 베를린)에 거주 중이라 상쇄해야한다는 감각도 가지고 있죠. 균형 이상이죠. 균형이라면 마치 중간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중간은 없어요. 현대미술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나라가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두바이 엑스포, 마닐라 라쌀대학 부속 전시장, 아랍에미리트, 중국 등에서의 전시에 그가 기꺼이, 더 나아가 자청까지 해서 나서는 이유도 그래서다.

“저는 그 기억이 아직도 있어요. 몰이해요. 유럽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라 이름 발음도 안되고 젓가락질도 못하고…그런 시대를 알고 겪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고 싶지 않아요. 후발주자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겸손하게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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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사진제공=국제갤러리)

그는 “아랍에미리트는 저한테 싱가포르 같은 느낌”이라며 “싱가포르가 말레시아,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등 글로벌 사우스, 특히 동남아를 볼 수 있는 게이트웨이라면 아랍에미리트는 마그레브(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의 총칭) 지방, 아랍 지역, 중동 등의 산업적이고 상업적인 시간으로 통하는 문”이라고 정의했다.


“유럽에만 있으면 자꾸 잊어요. 위치와 장소지만 그 안에는 시간들이 있는데 유럽이나 서구 사람들이 가진 오만불손함이 있어요. 거기도 산업만 열심히 하다가 강이 오염되던 시기가 있었거든요. 그 과거를 잊고 지금 그런 시기를 겪는 나라를 저급하게만 보죠.”

더불어 물, 전력 등의 부족이 일상인 분쟁지역에서 현대미술을 하는 작가들은 “많이 다르다”며 “중앙시스템이 잘 갖춰져 안정되고 평화스러워서 잊고 있던 부분들을 일깨울 수 있어 (교수로 재직 중인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슈테델슐레 미술대학) 학생들에게도 많이 권하는 중”이라고 털어놓았다.

“너무 함몰돼 있고 진짜 위기를 모르는 것 같아요. 사실 위기가 중요한 건 아니에요. 궁극적인 건 ‘연대의식’이죠. 너무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에만 있으면 차이 밖에 안보이거든요. ‘저 사람은 나랑 의견이 달라서 얘기를 못하겠어’라고 치부하고 말죠. 하지만 거시적으로 내다보면 이 정도는 연대가 가능하다는 걸 알게 돼요. 서로를 인정하고 설득하고 싶어지면서 더 끈끈해지죠. 여행은 그런 마음을 다잡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우정, 연대, 차이의 인정…여행에서 얻는 가장 큰 교훈은 이런 것들 같아요.”


◇동료들과의 선문답 “결국 사람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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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사진제공=국제갤러리)

  

“사실 전 공공미술이나 엑스포 작업을 안해요. 많은 관련자들의 생각들이 다 딴 데 가 있거든요. 그래서 절대 근처에도 안가고 발 하나도 안 담그는데 두바이 엑스포를 하게 된 건 순전히 사람이었어요. 이집트 출신의 타렉 아부 엘 페투(Tarek Abou El Fetouh) 큐레이터가 설득을 잘해서 한 거예요.”

그렇게 한다고 하고도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던 작업으로 3번이나 고꾸라지기를 반복하다 완성된 작품”이라며 “사실 이 친구도 엑스포나 공공미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도대체 그걸 왜 했냐’는 제 물음에 돌아온 그 친구의 답에 둘이 동시에 박장대소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 친구 말이 자기가 하면 달라질 줄 알았데요. 그 말을 한 그 친구나 듣는 저나 박장대소를 했죠. 그 순수한 마음이 정말 황당하잖아요. 하지만 자신이 하면 달라지고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면 못했을 일이죠. 시작도 안하고 ‘그거 안돼’라며 뺀질거려서는 세상은 바뀌지 않아요. 좀 황당하더라도 누군가는 영혼을 갈아넣으면서 불가능할 일을 하기 때문에 1밀리라도 세상은 달라지는 거잖아요. 진심으로 ‘이런 작가들과 엑스포를 했다는 데 평생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말해줬어요.”
 

양혜규
양혜규(사진제공=국제갤러리)

이어 “디테일한 것까지 완전 다 이해했고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됐다”며 “제가 줄 수 있는 크레딧은 그 말이 다였다. 그 말이 이 사람의 인생을 바꾸지는 않겠지만 인사이더끼리 하는 평가, 경력 인정 등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것들이 쌓여서 뭐라도 되는 거잖아요. 그 박장대소했던 순간이 저희에겐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황당한 생각이고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뛰어드는 데 대한 이해와 동의, 격려 등 많은 것들이 담긴 웃음이죠. 제가 엑스포를 왜 했겠어요. 계약서를 보고 토할 뻔 했어요. 하지만 그 친구의 ‘내 말만 믿어’라는 말에 바로 사인했어요. 결국 사람의 일이잖아요. 순항하면 같이 순항하고 빠지면 같이 빠진다는 것만 동의되면 기꺼이 배에 올라 함께 노를 젓기 시작해요. 저는 선진국이 아닌 데서 선진적이고 프로그래시브한 미술을 보여주는 걸 지원할 뿐이에요. 서구 예술의 발전 모델처럼 나라가 선진화된 후에 선진 미술을 보여주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죠.”

어려운 상황에서도 예술을 위해 과감하게 도전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다. 양혜규는 “훌륭하고 좋은 인간들, 작가들이 너무 많다”며 “최근 가장 인상적으로 본 건 두바이에서의 로렌스 아부 함단(Lawrence Abu Hamdan)이라는 작가의 렉처 퍼포먼스였다”고 예를 들었다.

“아크람 자타리(Akram Zaatari)도 너무 훌륭하죠. 그런 사람들은 그들의 주거지에서 만나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이 그 땅에서 어떤 인터랙션을 하고 어떤 활동이나 삶을 영위하고 어떤 사회적 태도를 견지하는지…그렇게 힘든 환경에서도 어떻게 그런 좋은 작가들이 많이 나오는지 존경스러워요. 알리고 싶은 작가가 별처럼 많죠.”

이어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가보지도 못하고 막을 내렸지만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제일 열심히 했던 게 필리핀의 마닐라 라쌀대학 부속 전시장에서의 개인전”이라고 말을 보탰다. 

 

“제가 자원하다시피한 전시였어요. 환경은 열악하고 예산도 ‘0’ 하나가 빠질 정도로 적어 퀄리티를 내기도 힘들었지만 절대 타협하지 않고 정말 열심히 준비했죠. 이 전시 역시 영국에서 유학하고 10년 넘게 그 부속 전시장을 기관다운 기관으로 만들려고 노력 중인 큐레이터 호셀리나 크루즈(Joselina Cruz) 때문이었어요. 그쪽 기관에서 그간 한번도 일해보지 않은 수준까지 끌어올리려 무진장 노력을 했죠.”


◇인류에 대한 자괴감과 가능성

  

[국제갤러리] 양혜규_상자에 가둔 발레Boxing Ballet
양혜규의 ‘상자에 가둔 발레’(사진제공=국제갤러리)

 

“코로나19로 국가주의나 국경이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해졌죠. 물리적인 거리감이 실질적인 거리감이 돼 버렸어요. 국가주의 보다는 트랜스 내셔널리즘, 국경보다는 시티즌 개념으로 물자만큼 사람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인류라는 사회가 코로나 사태로 반성하기를 바랐는데 그게 아니어서 자괴감이 들기도 해요.”

이렇게 토로한 양혜규는 “지역감정과 실제적 거리감을 회복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며 “철학적으로 타인에 대한 상상력, 정치적 상상력, 사회적 공감 등이 지켜지면 좋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인류에 대한 자괴에도 그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주립 미술관에서 진행될 ‘슐레머에 동動하다-100년만의 삼부작 발레’(Moved by Schlemmer 100 Years of Triadic Ballet, 4월 10~10월 9일)로 인류에 대한 가능성을 엿보기도 한다. 이는 바우하우스의 작가 오스카 슐레머의 대표작으로 1922년 초연됐던 ‘삼부작 발레’를 양혜규와 올라 폰 브란덴부르크, 칼린 린데나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국제갤러리] 뉴욕 현대미술관MoMA 《양혜규 손잡이》 전시전경
슈투트가르트 주립 미술관에서 열리는 '슐레머에게 동하다-100년만의 삼부작 발레'에 전시될 '손잡이'(사진제공=국제갤러리)

“그쪽에서는 (2015년) 리움미술관이 소장 중인 ‘상자에 가둔 발레’(Boxing Ballet, 1971)를 전시하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그건 ‘계승하자’ 밖에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거리 있는 작업을 통해 퍼포먼스, 조각적인 퍼포먼스는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싶었죠. 이 작품은 대중성이랑 동시에 갈 수 없는, 슐레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잘 모르겠는 수수께끼처럼 남은 부분이 많아요.

 

그리곤 제목인 ‘Triadic Ballet’와 등장 캐릭터들을 예로 들었다. 

 

“제목인 ‘Triadic Ballet’는 뉴욕을 근거지로 했던 중국계 유명 갱단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설이 있어요. 캐릭터 중에는 터키적이거나 발레적인 인물, 초현실적인 스파이럴 우먼도 있죠. 맨 마지막에는 반쪽이 같은 캐릭터가 나오는데 갑자기 무대 전체가 까매져요. 거의 움직임도 없어요. 수수께끼죠.”


양혜규에 따르면 이 ‘3부작 발레’는 “엄청 유명하고 사랑받는 작품이지만 공연 당시에는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에 많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완벽 복원은 불가한 작품”이다.

 

양혜규는 “슐레머가 생전에 재연을 위해 애 썼지만 결국 호응이 없어 못했던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더불어 “이 작품은 퍼포먼스 뿐 아니라 안무, 음악, 현대미술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제일 큰 부분은 무대 의상”이라며 “슈투트가르트 주립미술관 소장품인 그 오리지널 의상과 저희 현대작가 3명이 재해석한 작품이 함께 전시된다”고 소개했다.

“저한테 ‘삼부작 발레’는 모르는데도 좋아하는 예예요. 사람들은 알아야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만한 오해가 없죠. 이해도, 공감도 안되지만 좋아할 수는 았거든요. 당시 바우하우스 안에서 퍼포밍 아트는 주변부였어요. 중요했던 건 디자인, 건축, 회화, 조각 등 디자인적이고 사회 참여적인 부분이었죠. 슐레머가 퍼포밍 아트쪽을 맡았지만 변방 중 변방이었어요. 당시에는 그렇게 호응이 없었는데 나중에라도 발굴돼 가치를 인정받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환영받는 걸 보면 아이러니죠. 인류가 바보같거나 어리석게 보일 때도 있어요. 하지만 이런 경우들을 보면 마냥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 가능성을 믿게 되고 기대를 갖게 되죠.”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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