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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恨과 눈물'로 운명을 점쳤던 미아리 고개, 이제는 적막감만이…

[It Place] 미아리 점성촌

입력 2015-09-23 07:00
신문게재 2015-09-23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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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40년 전통의 미아리 점성촌의 명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점집이나 철학관을 찾아오는 발길이 뚝 끊기면서 한때 100개가 넘던 점집이 이제 20곳이 채 안 남았다. 18일 오후 미아리 점성촌을 지나는 시민들의 발걸음만 뜸하고 실제로 상담을 위해 문을열고 입장하는 시민들을 찿아보기 힘들다.(사진=양윤모 기자)

 

젊음과 활력이 넘치는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형형색색의 의상으로 한껏 멋을 낸 여대생들 틈바구니를 지나 7번 출구로 나오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XX철학원’, ‘00역학사’, ‘점보는 집’, ‘작명 사주’…. 

 

벌건 대낮이지만 오가는 행인의 인적마저 드문 이곳은 성신여대로 통하는 1번 출구와는 공기마저 확연하게 다르다.



이곳은 대한민국 최대 점집의 메카 ‘미아리 점성촌’이다. 지금은 쇠락해 20여곳의 역술원만이 남았지만 잘 나가던 시절에는 100여곳의 점집이 성행해 시쳇말로 돈을 쓸어 모았다.

 

승진, 이사, 결혼을 앞두고 있다면 미아리 점집에 들러 길흉화복을 점치곤 했다. 언제부터 미아리가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장소로 자리잡게 됐을까. 역술인들은 미아리의 지형이 점성촌을 형성하는데 관계 있다고 주장한다.

서울의 마지막 관문인 미아리고개는 예로부터 4대문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조선의 한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치욕을 안긴 되놈이 넘어온 고개가 바로 미아리다. 당시에는 ‘되놈이 넘어온 고개’라는 의미로 ‘되너미재’라고 불렸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돈암현’이다. 지금의 돈암동, 동선동 지명이 여기서 유래됐다.

미아리는 일제 때 공동묘지로 사용됐다. 가난한 이들은 사대문을 지나 미아리 고개에 죽은 이를 묻곤 했다. 뿐만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국군의 교전이 벌어진 곳도 미아리다. 젊은 군인들이 미아리 고개에서 피를 뿌리며 청춘을 마감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심금을 울리는 노래의 배경도 바로 이곳이다.

한많은 영혼들이 떠나지 못한채 음기가 가득 찼기 때문일까. 자연스럽게 신 내린 보살들이 터를 잡았다. 미아리 점성촌은 1966년 역술인 이도병씨가 이곳에 정착한 게 시초인 것으로 알려진다. 원래 점술가들은 한국전쟁 전 종로3가에 집단거주하다 남산 근처로 생활터를 옮겼다. 그런데 미아리의 이씨가 ‘용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각장애 역술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집단 점성촌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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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발길이 뜸해진 미아리 점성촌. 점성촌을 찾은 기자는 사주를 보기 위해 여성 전문 점집에 들어섰다.(사진=양윤모 기자)


하지만 삼라만상은 생로병사가 있기 마련이다. 한때 대한민국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미아리고개도 땅의 기운이 다한 모양이다.

‘별자리점’을 크게 붙여놓은 한 점집 앞에서 만난 역술인 강모(67)씨는 “점 보는 사람이 거의 없어 생활도 어렵다”고 한숨을 쉬었다. 전라도 광주 출신인 강씨는 2002년 교통사고로 실명했다. 전맹 판정을 받은 뒤 안마를 배웠지만 시각장애 6급까지 안마교습이 허용되자 역술로 방향을 바꾸고 2005년 상경했다.

강씨는 “처세에 능한 젊은 역술인들이 빠져나가던 시기였다”며 “나는 막차를 탄 셈”이라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곳에 남아있는 역술인들 대부분이 70대 중후반이다. 내가 이곳에서 가장 젊다”며 “나도 시각장애인 복지관이 가까우니 담뱃값이라도 벌 요량으로 ‘별자리점’ 간판을 내걸었는데 손님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토로했다.

돌아서니 성북구에서 써붙인 표지판에 ‘이곳은 처녀보살이 없습니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시각장애인 역술인들로 이뤄진 점성촌이라는 의미지만 처녀보살마저 떠난 미아리고개에는 왠지 모를 적막감만이 흐른다.

글=조은별 기자 mulgae@viva100.com

사진=양윤모 기자 yym@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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